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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시민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최실비 |《경기문화저널》 편집위원
새로 쓰는 노년학개론, ‘선배시민론’

생산 효율성만으로 존재가치를 판단하는 사회에서 노인에 대한 이미지는 ‘아집’, ‘쓸모없음’, ‘나약함’, ‘의존적’ 등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에서 비롯된 아이와 청년에 대한 지원은 투자이지만, 노인에 대한 사회적 노력은 낭비라는 관점은 노년기 사람들의 사회참여를 어렵게 만들고, 결국 사회적 역할 상실로 이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곧 700여 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조만간 노인층의 핵으로 진입한다. 이들은 육체적인 건강을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며, 교육 수준과 사회정보 획득 능력도 높은 편이다. 또 이들 중 많은 노인이 지나온 시간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이나 행동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노인들이 자신의 가치와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욕구 사이에서의 합의점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경향신문 칼럼*1)에서 “호모 헌드레드 시대 노년의, 노년을 위한, 노년에 의한 새로운 노년학개론이 요청된다”며 “평균 기대수명 65세 시대의 노년학개론으로 지금의 신중년 및 노년 세대의 생애주기별 ‘나이듦 수업’을 포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범상·유해숙의 『선배시민』(마북, 2022)은 선배시민의 정체성을 “시민권을 당연한 권리로 자각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공동체에 참여하여 자신은 물론 후배시민과 소통하며 목소리를 내는 존재”로 정의한다. 노인은 시민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갖고 공동체에 참여하여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노인은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선배가 된다. ‘선배시민론’은 곧 새로 쓰는 노년학개론이라 할 수 있다.

. 선배시민

‘사례관리’에서 ‘사회관리’로

유범상·유해숙은 ‘선배’와 ‘시민’의 합성어인 선배시민에서 중심을 이루는 개념은 선배가 아니라 시민라고 설명한다. “노인은 시민이다. 따라서 시민권을 가진 존재이다. 시민은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노인은 시민인 동시에 삶을 더 살아온 선배이다. 시민으로서의 삶을 먼저 산 존재, 즉 시민선배는 시민권을 누리고, 시민권을 요구하고 실천하며, 시민권이 보장된 공동체에 사는 존재”*2)라고 정의한다. 시민성을 갖는 존재로서 후배에게 시민권을 알려주고, 이들이 더 안전한 공동체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실천하는 존재로 노인의 역할을 재정립하며, 노후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철학적 기반을 제시한다.

선배시민론은 첫째, 생존을 위한 ‘빵’을 늙어서도 품위 있게 획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빵을 국가로부터 권리로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시민은 국가보장을 권리로 자각하는 노인이다. 둘째, 선배시민론은 노인을 선배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노인은 돌봄의 대상에서 돌보는 주체가 된다. 선배시민은 시민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실천하는 노인이다. 이를 위해 노인들만이 아니라 후배시민들과 연대함으로써,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3)

이러한 선배시민론을 적극 수용하여 실천하고 있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노인종합복지관에서 발간한 『우리는 선배의 길을 만든다』(마북 2023)는 ‘선배시민 실천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노인이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는 ‘주체’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집중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는 시민의 삶을 책임지고, 노인은 시민으로서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고 변화시키고자 실천해야 한다는 이론을 토대로 선배시민론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사회복지사들의 고민과 노력을 담았다.

. 우리는 선배시민의 길을 만든다+중원노인종합복지관의 선배시민 실천목표

중원노인종합복지관 평생교육팀 서재순 팀장은 이전의 사회복지사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클라이언트로서 어르신을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고, 만족도 조사를 통해 평가하는, ‘사례관리’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선배시민론을 만난 이후의 사회복지사는 선배시민이 된 이들과 지역사회를 함께 변화시키는 활동가, 즉 ‘사회관리’를 하는 사람으로 역할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사회복지사가 노인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 ‘시민’과 ‘인간’이라 이해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도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을 돌보는 자(carer)가 아닌, 노인과 함께 현안을 논의하고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매개자(mediator)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4)

“‘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로’라는 말의 무게와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어요. 제가 노인복지를 선택한 이유도 사실은 노인을 ‘잘 돌보고 싶다’는 마음에서부터였거든요. 그런데 선배시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어르신 본인이, 사회복지사가, 그리고 사회가 노인을 돌봄의 주체로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중원노인종합복지관은 2012년도부터 현장에서 선배시민을 적용하여 실천하고 있다. 노인이 단순한 서비스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본인이 돌봄의 주체이면서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서 활동하도록 한다. 설명과 안내 중심의 기존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화와 토론 중심으로 진행된다. 선배시민이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서로 공감하며 실천계획과 정책 아이디어를 찾아간다. 이를 위해 사회복지사는 직접 선배시민 교안을 만들고 교육을 하는 등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매개자로서 사회복지사에게는 선배시민과 토론하고 함께 해결 방법을 찾는 능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소통과 경청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가 곧 역량인 것이죠. 우리가 민감하게 현상과 변화에 반응해야 선배시민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거든요. 따라서 선배시민과의 대화를 통해 욕구를 이해하고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실천하고 결과를 도출하고 있어요.”

선배시민 프로그램에서는 사회복지사의 대화와 토론, 그리고 공감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 중원노인종합복지관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선배시민 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모든 구성원들이 선배시민의 가치와 철학을 공유하며 토론과 자유로운 의견 나눔을 통해 모든 활동에 선배시민 가치를 녹여 낸다. 이러한 기반에서 어르신 대상 선배시민 가치철학 교육을 위한 선배시민대학은 2023년 현재 10기가 진행 중이다. 기수별 모임과 더불어 기수 간의 만남과 재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선배시민대학에서 학습과 토론을 한 선배시민들은 다양한 학습동아리를 만든다. 학습동아리는 후배시민과 소통하고 지역사회의 안전, 환경, 건강, 의제 발굴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 선배시민대학 교육목표

“선배시민은 과정 중심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숫자로 드러나는 실적이나 성과보다는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아고(변화하고) 있는지, 우리와 연대하고 참여하는 주변 지역자원이 많아지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사회복지사로서 그 변화는 선배시민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많이 느껴요. 노인들에게서는 변화가 아주 천천히 나타나기 때문에 빠르게 이루어지긴 어렵지만, 앞으로 내딛는 한 발의 걸음은 결국 앞으로는 나가되 후퇴하지 않거든요. 오래 걸리더라도 선배시민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넓어지고, 지역 내에서의 연대가 더욱 확산되길 바라고 있어요.”

선배시민 동아리는 각자 활동만 하지 않는다. 동아리 연합인 중원선배시민위원회를 만들어 분기별 모임을 갖고,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선배시민박람회와 전국환경챌린지는 중원선배시민위원회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중원노인종합복지관은 노인과 청소년, 지역주민들의 화합의 장소이다. 이 안에서 토론, 상상, 실천이 나오는 민주주의의 실험실이자 제작소이다. *5)

. (사진 좌)선배시민 활동(중원노인종합복지관) / (사진 우)제3회 대한민국 선배시민 대회(중원노인종합복지관)

나이 든 보통 사람의 사회

선배시민은 곧, 시민권을 권리로 인식하고 이것을 공동체에서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실천하는 노인이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시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시민권 이론을 토대로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고 변화시키고자 실천하는 ‘나이 든 보통 사람’인 것이다.
유범상·유해숙의 선배시민론에는 ‘시민의 집’ 개념이 함께 존재한다. 훌륭한 가족은 그 어떤 구성원도 특별대우하거나 천대하지 않듯이, 좋은 국가는 그 구성원인 시민들 간에 차별과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적·경제적 장벽이 없는, 사회를 하나의 ‘집’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구성원들 또한 기준이나 조건 없이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우리는 너무 쉽게, 당연히 잊어버린다. 사회적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노인 역시 역할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민으로 먼저 살아본 경험으로서 후배를 이끄는 선배시민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한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시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공동체를 안전하게 만드는 주체로서 공동체 일에 관여하며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다른 세대의 인식 전환과 사회 전반의 합의 과정이 전제되어, 결국에 시민들 간의 우정인 ‘연대’를 획득해야 한다. ‘나 때는’보다 ‘너 때는’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지금, 필요한 이유다.

선배시민 선언문 우리는 선배시민이다
우리는 선배시민이다. 공동체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시민이다.
우리는 선배이다. 후배시민과 소통하고 그들을 돌보는 선배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후배시민을 돌보는 의무를 다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당당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꿈꾼다
우리는 돈, 지위, 학벌 앞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우리는 시민들을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에 함께 맞서 누구나 안전하고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풍요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이가 편안히 드러나는 광장에서 서로에게 당당하고 풍요로운 세상에 대해 말하고 상상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기력한 늙은이도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도 아니다.
우리는 선배시민이 되기 위해 늘 함께 생각하고, 질문하고, 상상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돌봄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후배시민과 공동체를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배시민이 걸어가면 그것은 곧 공동체의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1)고영직, 「‘선배시민’의 새로운 서사」, 2021.8.5.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8050300095
*2)유범상·유해숙, 『선배시민』, 마북, 2022, 83면.
*3)유범상·유해숙, 『선배시민』, 마북, 2022, 8면.
*4)유범상·중원노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들, 『우리는 선배시민의 길을 만든다』, 마북, 2023, 51면.
*5)유범상·중원노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들, 『우리는 선배시민의 길을 만든다』, 마북, 202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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