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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기르고 돌보는 ‘모심’의 행위는 우리에게 가능한가?‘먹어치움’에서 ‘모심’의 시대로
이동준 |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관심의 신(神) 쿠라 - 우리에겐 ‘돌봄’이 아니라 ‘관심’이 필요하다!

인간 창조에 관한 로마신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쿠라(Cura) 여신이 강을 지나가다 진흙을 발견하고는 거기서 한 덩어리를 떼 내어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다 만들어놓고는 마침 찾아온 유피테르에게 혼을 불어넣어 움직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흙덩이가 움직이자 쿠라는 기뻐하면서 거기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고 했다. 그러자 유피테르와 텔루스(대지)도 나서서 서로 자기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관으로 나선 사투르누스(시간)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판결했다.

“그대, 유피테르는 혼을 주었으니 그가 죽을 때 혼을 받고, 텔루스는 육체를 선물했으니 그 육체를 받아 가라. 하지만 ‘쿠라’는 이 존재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쿠라가 차지하거라. 하지만 이것의 이름은 후무스(humus, 흙)로 만든 게 사실이니 호모(homo, 인간)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인간을 빚은 쿠라 여신의 ‘cura’는 영어 ‘care, cure, curious’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인간(homo)은 쿠라 여신의 호기심(curiosity) 때문에 만들어졌기에, 늘 무언가를 걱정하고 염려하며 그것을 떠안고(taking care) 살아가지만, 또 누군가에 대한 관심(carefulness)을 통해 회복(cure)되고 성숙되어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쿠라는 강을 건너는 중이다. 거기서 쿠라는 흙덩이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만든다. 그런 다음 쿠라는 거기에 혼을 불어넣어 주고 또 이름도 지어주고 싶어 한다. 이렇듯 쿠라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감행하고, 발견하고, 창조하면서 그와 연관된 수많은 관계를 끌어들이는 신이다.
이 ‘쿠라’라는 말을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쿠라에는 먼저 ‘불안’ ‘염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불안에 처해진 존재이고, 이 불안이 그의 존재적 정황이기에 인간은 늘 무언가에 신경을 쓰고 안절부절못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늘 ‘호기심’과 ‘잡담’으로 채워지는데 이것이 잠시나마 인간의 존재적 불안과 염려를 잊게 만드는 효과를 주기는 하지만 그 약효가 오래가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쿠라에는 ‘돌봄’과 ‘보살핌’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 ‘돌봄’이란 어떤 사람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것저것, 그 사람의 상태와 정서를 보살피는 행동들을 말한다. 끝으로 쿠라에는 ‘회복’ ‘치유’란 의미도 숨어 있다. ‘회복’이란 상실된 것, 또는 상실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고안된 행동들을 말한다.
이런 인간의 정황성이 만들어낸 창조물이 바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의 이야기에서 도시의 기원을 찾는다. 동생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아벨을 찾는 하나님에게 항변한다. “제가 동생을 돌보는 자입니까?” 돌봄을 거부한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이리저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가인은 이 벌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워했다. 그를 알아본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이 절대적인 불안정성. 가인은 이 염려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해했고, 결국 에덴 동편에 최초의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발견했다. 도시는 인간이 욕구하는 재화를 끊임없이 공급하고 관심을 쏟을 만한 ‘꺼리’를 끊임없이 제공해 그것을 소비하게 만든다. 이런 해소책을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도시의 기능이자 목적이기에 사람들은 그가 세운 도시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낀다.

‘먹어치움’ - 소름 끼치는 삶의 실상

먹고 먹히는 것이 삶의 실상임을 보여주는 인도의 한 신화가 있다. 바로 시바(Shiva) 신전의 입구에 걸려 있는 어떤 얼굴에 관한 이야기다. 잘 알려진 대로 시바 신은 춤을 추며 우주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신이다. 어느 날 한 괴물이 시바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아내 파르바티(Parvati)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들었소. 그 여신을 내 애인으로 삼고 싶소.”
시바는 불경스러운 이 괴물의 말에 화가 나서 잠깐 그의 ‘제3의 눈’(Third Eye)을 뜬다. 그 순간 시바의 눈에서 벼락이 나와 땅을 때리고 연기와 불길이 인다. 그런데 연기가 가시고 보니, 그 옆에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새로 나타나 있었다. 이 괴물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붙어서 태어나자마자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그래서 먼저 와 있던 괴물을 발견하고는 먹어치우려 든다. 이에 먼저 온 괴물은 놀라 시바 신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몸을 던진다. 시바 신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자비 앞에 몸을 던지면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내린다. 그러니 깡마른 괴물이여, 이 가엾은 괴물을 먹지 말아라.” 그러자 굶주린 괴물이 거세게 항변한다.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당신이 나를 이렇게 허기지게 창조했으니 이 괴물을 먹어야겠소.” 이 말에 시바가 대답한다.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그러자 이 괴물은 자신의 두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괴물은 자신의 몸통과 사지를 다 먹어치우고 얼굴 하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러고도 괴물은 여전히 허기에 괴로워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먹어야 사는 생명의 이미지다. 시바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한다. “삶이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를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이제부터 너를 ‘영광의 얼굴’(Kirtimukha, 鬼面)이라고 부르겠다. 누구든 나에게 오려면 너를 먼저 예배하고 들어와야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누구든지 시바 신전에 들어가려면 신전 문 위에 올려둔 이 ‘영광의 얼굴’을 바라보며 삶의 본질을 음미하고 들어가는 관습이 생겼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먹고 스스로를 충족하는 생명의 본성이야말로 절절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화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름 끼치는 삶의 폭력성과 마주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시바는 창조의 신이다. 그가 우주를 창조하는 방식은 바로 파괴를 통해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른 생명을 먹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간다. 먹는 것은 그 생명을 죽이고 해체해서 나의 것으로 녹이고 흡수하는 일이다. 무시무시한 파괴다. 이런 매일매일의 파괴를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나는 나의 생명을 이어가고 그 생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다.

이런 먹어치움의 이미지는 그리스적 사유에 있어서는 크로노스(Chronos) 신에게 투영된다. 크로노스라는 말은 ‘시간’이라는 뜻인데 그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신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 살아 있는 것들은 이 시간의 흐름 속에 삼켜지고 사라지게 된다. 이 시간의 폭력성에 저항하는 길은 또다시 다른 생명을 희생 삼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길뿐이다. 그것이 서양 카니발리즘(cannibalism)의 기원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 종교의 비밀스런 제사 의식과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의 여신도들」에서 자행되는 행위들은 모두 이 삶의 처참한 실상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자, 한번 보아라. 이것이 너희 삶의 실상이다!’

이천식천(以天食天) – 너 자신을 먹이로 내주어라!

전거론(全巨論)은 지금은 경기도 여주 강천면에 있는 마을이지만 원래 원주에 속하였던 땅이다. 동학혁명 이후 충북 일대를 전전하며 피신 생활을 이어가던 해월 최시형은 1897년 2월 이천 앵산동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8월 여주 전거론에서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가르침을 베푼다. 12월에는 의암(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나서 1898년 1월 갑작스런 체포 위기를 겪은 해월은 폭설로 덮인 산길을 더듬으며 원주 송골로 피신했지만 거기서 관군에게 체포되어(4월 5일) 한양으로 압상(押上)된다.

. 좌: 여주 전거론 마을 전경. 지금의 여주시 강천면 도전리. 도성동과 전거원동이 합쳐진 지명이다.
우: 이천 앵산동 향아설위 반포지. 현재의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수산리는 수곡리와 앵산동을 합친 마을 이름이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은 먹고 먹히는 논리가 아닌, 우주적 친교의 밥상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상생의 원리로 등장한다. 스스로를 먹이로 내어주는, 우주적 성찬에로의 초대다. 이천식천의 사상은 동학이 담지하고 있는 생태적 감수성의 절정을 보여준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이치를 알면 세상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된다’(萬事知食一碗)는 깨달음과도 통한다. 음식을 먹음으로 한울님을 내 안에 모셔들이기에 이제부터 그 한울님을 기르고 돌보는 것은 나의 몫이다. 시천주(侍天主)가 양천주(養天主)가 되는 경이로운 장면전환.
‘젖이란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곡식이요, 곡식이란 것은 천지의 젖이다’(乳也者 人身之穀也 穀也者 天地之乳也). 따라서 밥을 먹는 일은 천지의 젖을 먹는 것이고, 우주만물은 하늘의 화현(化現)이기에, ‘하늘로써 하늘을 먹고 하늘로써 하늘로 화하는 것이다.’(以天食天 以天化天). 해월이 말하는 이천식천은 개체들 간의 약육강식의 논리가 아닌, 지구적 생명체, 우주적 친교의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상생의 원리가 숨어 있다. 이 친교의 공동체는 인간 중심주의인 ‘데모크라시’(democracy)를 뛰어넘어 모든 생명이 참여하는 ‘바이오크라시’(biocracy)를 지향한다.
만물은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고, 나락 한 알에도 한울님이 계시기에 밥 한 그릇을 먹는 일은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는 일이다. 이는 생태여성주의 신학자인 샐리 맥파규(Sallie McFague)가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소통, 친교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하나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자연과 인간의 일체화, 신과 피조물의 합일, 지구생명체의 유기적인 상호의존성을 보여주는 생태적 사유는 서구 사상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성 프란치스코는 굽비오마을에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한 사나운 늑대를 찾아가 이야기하고 설득했는데 이는 당시 ‘동물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 중세적 사고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지배의 개념을 전복시키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평등하게 형제애로 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태양의 노래>에서 형제인 태양과 자매인 달, 형제인 바람과 자매인 물, 그리고 형제인 불과 자매인 흙을 노래했고, ‘가난’ 여인을 평생의 동반자로 여겼으며, ‘죽음’조차 삶의 완성을 불러오는 착한 형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작음’(minority)과 ‘형제애’(fraternity)로 그의 실천의 삶을 보여주었다.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는 실천의 삶 속에서 생명의 문제를 고민했다. 그는 물질이 나의 몸으로 들어가 나를 살리기에 물질에 대한 예(禮)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물질은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바치는 대속(代贖) 행위를 통해 그의 본성을 실현한다. 그것이 진물성(盡物性)이다. 따라서 인간이 물질을 보고 욕망을 일으키지 않으려면(見物不可生) 이러한 물질의 대속 행위를 깨달아야 한다. 단식(斷食)은 이런 물질의 본성을 체휼(體恤)하면서 몸을 줄임으로써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일이기도 하다. 일식(一食)은 하루 한 끼 먹으면서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단순한 삶을 실천하는 일이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이제 인류가 현실로 직면하게 된 기후 위기 문제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시바 신이 그의 눈을 떠서 창조행위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그의 창조는 냉혹하고 거침없는 파괴행위를 통해 실현되고야 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그의 신화로부터 익히 보고 들은 바 있다. 어떻게 해야 인류가 시바 신의 파괴행위를 좀 더 늦출 수 있을까? 인류의 삶의 방식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와 전환이 이루어져야 시바 신은 다시 잠을 취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삶에서 진정 육식(肉食) 없는 하루를 마련하고 있는가? 그런 안식의 세계에 들어갈 삶의 태세 전환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인류가 생태적 회심(回心)을 위해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물음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식사는 ‘제사’이고 ‘예배’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식사’라는 글자에서 깨달았다. ‘식사’(食事)는 먹는 것, 음식을 섬기는 일이다.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는 일은 만물을 기르고 보살피는 한울님을 내 안에서 체험하는 일이 된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주인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는 행위이기에 ‘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먹는 밥상은 알고 보면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들을 나를 향해 돌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나의 밥상은 향아설위(向我設位)가 된다. 나는 그동안 생명을 탐식하고 생명을 ‘맛’으로 소비해왔던 나 자신을 회개한다. 맛집 검색과 맛집 탐방에 생각 없이 열중했던 나의 기름진 일상을 조금씩 바꾸어내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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