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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사업>
증평, 기록의 정원(庭園)
신유림 | 증평기록관 기록연구사

증평기록관은 지난 해 8월 30일,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먼지투성이의 낡은 문서창고로 존재하던 행정기록관에서 주민을 위한 품격 있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하였습니다. ‘기록관’이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던 증평의 주민들은 지난 1년 3개월간 그 기록관을 ‘씹고, 맛보고, 즐기고’ 있습니다. 소중한 증평 기록을 찾아내어 기증하고, 기록관의 전시를 위해 카메라 앞에 앉아 인터뷰도 하고, 나 혹은 내 가족이 주인공인 기록전시를 관람합니다. 이제는 주민의 눈높이로 ‘지금’을 기록하여, 주민이 주인이 되는 지역 역사를 만들기 위해 증평기록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속한 마을과 단체의 기록집도 만들고 있습니다.
주민의 관심과 지원 덕분에 증평기록관은 짧은 기간 동안 벌써 두 번의 전시를 개최하였고, 다시 세 번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민과 증평기록관이 함께 수집·채록·생산한 증평의 기록으로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증평기록관의 전시를 살펴보면 주민과 기록관이 어떻게 협력하여 지역의 기록과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함께 성장해 나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 과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 2020년 8월 새롭게 개관한 증평기록관의 모습

증평, 첫 번째 기억

증평기록관은 시작부터 주민과 함께 준비했습니다. 증평기록관 개관전시 [증평. 첫 번째 기억]은 9살 초등학생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나이·성별·직업·국적이 다양한 증평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열다섯 팀의 주민이 인터뷰에 응하고 증평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 모여 기록 콘텐츠가 만들어졌습니다. 증평기록관 첫 전시의 주인공이 증평 사람으로 정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증평기록관의 주인은 주민이고, 증평기록관에서는 주민이 주인공인 기록을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민과 함께 만드는 전시는 기록관에서도 처음이라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증평을 살아가는 다양한 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재미있고, 증평 사람의 기록은 ‘맥락’과 함께 모여지니 큰 가치가 생겼습니다.
열다섯 주인공 중 가장 어린,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는 인근 청주에 살다 증평으로 이사 온지 얼마 안된 시점에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죽리마을은 꽃과 나무가 많은 예쁜 곳이고, 차가 다니지 않아 자전거도 씽씽 타고 길거리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어 참 좋다고 했습니다. 마을 안의 학교(죽리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닐 수 있고, 새로 사귄 마을친구와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놀고, 나무그림 그리는 일이 재미있다는 일상을 알려주었습니다.
증평에서 나고 자란 50대의 여성은 증평을 가로지르는 보강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너른 잔디밭과 미루나무숲이 있어 아름다운 보강천이 과거에는 흙바닥의 예비군 훈련장이었다며, 이렇게 멋스럽게 변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증평의 옛 모습이 아쉬웠는데, 기록관이 생겼으니 지금의 모습을 잘 기록해 두었다 먼 훗날에도 꺼내볼 수 있게 되었다며 기록관의 존재 이유를 짚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연세가 많은 70대의 어르신은 젊은 시절부터 증평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한 분이었습니다. 직업 탓에 증평 골목골목을 다녀 모르는 곳이 없었는데, 2003년 군(郡)으로 승격한 이후 우리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요즘은 길을 잃기도 한다며 웃어 보였습니다. 또 증평에서 택시운전사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기록관 전시를 위해 폐차장에서 어렵게 구한 ‘자동차 핸들’을 기증하였습니다. 열심히 핸들을 쥐어 아들 둘을 대학까지 가르쳤고, 손님들에게도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었으니 나에게는 참 중요한 기록이라는 어르신의 설명을 들으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핸들이 특별한 기록으로 변신하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주민들의 기억과 기록으로 채워진 이 전시는 온라인 증평기록관(larchiveun.net)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세 분을 포함한 열다섯 명 주민이 증평에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널리 공유되면서 증평이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증평기록관은 멈추지 않고 온라인을 통해 계속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온라인에는 오프라인 공간보다 더 많은 기록을 채울 수 있었고, 수많은 증평기록을 큐레이션하여 웹진 《주간 증평》도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증평기록관은 기록을 매개로 온·오프라인 통해 주민과 소통해오고 있습니다.

. [증평, 첫 번째 기억] 전시 모습

. [증평, 첫 번째 기억] 전시를 담은 온라인 증평기록관(larchiveum.net)

기록하는 증평의 봄

올 봄 개최한 [기록하는 증평의 봄]은 두 개의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시의 첫 주제는 주민들이 기록관에 기증한 기록을 활용한 옛 사진전입니다. ‘증평기록 수집전’을 통해 지역의 근현대 일상을 담은 주민소장 기록물 365건을 수집하였고, 그 중 일부를 추려 작은 전시를 꾸렸습니다. 집안 한쪽 구석 앨범 속에 있던 가족사진을 다함께 보니 증평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현재 증평에는 예식장이 없지만 과거에는 5개나 있었고, 장뜰시장에 있던 제일극장에서는 영화나 공연도 보았지만 결혼식도 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증평역이 한때는 지금 위치가 아닌 증평군청 인근에 있었고, 증기기관차를 위해 기찻길 옆에 세워졌던 급수탑은 만남의 장소였으며,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민의 기록으로 만든 전시는 뜻밖의 경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살아온 주민들은 공동의 기억을 갖고 있고, 한 장의 사진기록을 통해 잊고 있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고, 함께 즐거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증평기록가의 기록집 전시입니다. 증평에서는 ‘증평 아카이빙 프로젝트’라는 사업을 통해 주민이 주도적으로 자신이 속한 마을과 단체를 기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증평기록가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증평을 기록하는 활동에 관심이 있는 주민은 3개월간 3단계로 이루어지는 총 24차시의 기록공부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록을 가지고 개인 기록집을 만들게 됩니다. 올해 초, 제1기 증평기록가 11명이 자신의 기록집 한 권씩을 완성하고 프로그램을 수료하면서 처음 탄생했습니다. 증평기록가의 기록집에는 열심히 살아온 주민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되고, 때론 고통스러웠던 그간의 삶을 기록집을 만들며 되돌아보니 그래도 늘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라며, 발전해온 나를 보니 ‘참 잘 살았어’라며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었다는 분.

처음 증평에 왔을 때는 한국어도 잘 모르던 산업연수생 신분이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면서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젠 당당한 증평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본인과 같은 이주여성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며 많이 울기도 했지만 온 가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아버지 영전에 기록집을 바칠 수 있어 행복했다는 분 등…. 증평기록가의 기록집은 그 어느 소설보다도 재미있고 눈물나는 감동이 있습니다. 증평기록가의 기록 활동이나 기록집 제작은 ‘기록’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기록’으로 관계를 맺고, ‘기록’을 통해 치유하고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그 멋진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기록집을 전시로 펼쳐 함께 나누니 더 큰 가치가 만들어졌습니다.

. 제1기 증평기록가의 개인기록집

증평, 기록의 정원

지금 증평기록관은 개관 후 세 번째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증평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최근 3년 동안 수집·채록·생산된 다채로운 증평기록을 주민과 공유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기록전문가들의 연구와 조사를 통해 수집된 증평메리놀병원, 증평엽연초재건조장의 기록. ‘증평기록 수집전’을 통해 모인 증평의 근현대 사진기록. 증평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의 구술로 듣는 증평 이야기. 그리고 증평의 현재의 모습을 사진·영상·VR로 제작한 증평기록관의 생산기록. 여기에 증평기록가 주도로 제작한 마을·단체 기록집까지. 증평기록관 공간을 꽉 채우고도 기록이 넘쳐 온라인 증평기록관(larchiveun.net)을 통한 공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주민을 위한 공유공간으로 기록관을 만들어 터를 다지고, 주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시도로 씨를 뿌린 증평에서는 이제 막 ‘기록의 싹’이 트고 있습니다. 이 싹이 쑥쑥 자라나 다채로운 ‘기록의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증평기록관은 주민들과 함께 정성을 다해나갈 생각입니다.
근래, 기록을 남기는 활동으로서의 아카이빙은 꽤 인기 있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나와 내 삶터를 기록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발맞춰 수많은 기록관, 도서관, 박물관은 물론이고, 각 문화원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지역을 잘 아카이빙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하고 있고, 실제로 아카이빙 관련 사업들도 붐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세를 이어 주민과의 소통, 기억과 기록을 나누는 즐거움, 치유를 위한 지역 아카이빙을 할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한 지역살이가 가능하겠다 생각해 봅니다.

. 증평기록관의 생산기록으로 제작된 [증평, 기록의 정원]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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