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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코로나가 묻고 있다
황규관 시인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고 김종철 선생의 『녹색평론』 ‘창간사’는 1991년에 발표되었다. 선생의 의도와 얼마나 겹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같은 시간에 현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이 붕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실 현실 사회주의도 근대 산업문명체제의 바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경제를 자본가가 아니라 국가가 기획, 운영했다는 다른 점이 있지만, 자본주의의 수탈·착취 체제와 근본적인 지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1986년에 있었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만 해도 현실 사회주의가 근대문명의 다른 가지에 지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재촉했다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결국 근대문명이 쌓아올린 바벨탑이 무너질 때 그 하중을 못 견디는 나라나 문화는 함께 붕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 수탈과 침략이 극에 달하던 19세기 후반 조선 민중에게 들불처럼 번진 사상이 있었다. 근대주의자들에게는 19세기가 근대에 미치지 못하는 ‘전근대’의 시기이며, 무지몽매하고 문명화되기 이전의 어둠으로 인식되겠지만, 그것은 역사를 보는 눈이 오로지 자신의 시대에 붙박여 있어서 나타나는 불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주의자들에게 19세기 후반 조선 민중을 사로잡은 사상이 단지 역사 속의 유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 당시 조선 민중들이 그 사상에 빠져들었고, 심지어 무장봉기까지 일으키게 되었는지 묻는 일은 지금도 유효하다 할 것이다.
동학은 종교가 아니었고, ‘정도령’ 같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민간 신앙도 아니었다. 훗날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최제우는 애초부터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길’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뿐이고 그 고민의 절실함이 신비 체험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일단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뿌리 깊은 유자(儒子)였다. 아버지 근암공 최옥은 경주 일대의 명망 있는 사대부였다. 최옥은 늦게 낳은 아들의 교육에 매우 열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최제우에게 유학의 전통이 없었을 리 없다. 예수의 복음이 갈릴리 민중의 현실을 통해 야훼의 배를 가르고 나왔듯이, 최제우의 동학도 19세기 조선의 현실을 통해 유학의 틀을 부수고 나왔던 것이다. 이런 존재의 변신 자체도 감동적인 일이지만, 사상이라는 것이 단순히 서재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대를 뚫고 지나와야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공부거리가 된다. 그런데 최제우의 자기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학자들은 최제우의 자기 혁명이 일어난 계기를 최제우가 생계를 위해 떠난 장사치 생활에서 찾는다. 그 시기는 1844년부터 1854년까지 10년의 시간인데, 그 시기의 경험이 동학이 배태되는 결정적 계기였음은 최제우 자신이 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일부 드러나 있다. 일례로 ‘화결시(和訣詩)’라 이름 붙여진 시를 보면, 자신이 방방곡곡 안 다닌 곳이 없고, 그러면서 만난 물과 산 낱낱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장사치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삶 마디마다 절개를 다져 넣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최제우는 다소 유자적인 ‘절개’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 시기 동안 최제우의 유자 의식에 균열이 왔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민중-되기’가 자신이 처한 실존 상황으로 인해 일어났던 것인데, 이 ‘민중-되기’가 ‘하느님이 내 몸 안에 모셔져 있다(侍天主)’는 동학사상의 핵심을 낳은 씨앗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의 ‘민중-되기’는 장사치라는 구체적 삶에 맞닥뜨린 결과물이지 의식적인 노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동학을 다시 생각하는 오늘날, ‘시천주’라는 언어가 오늘날의 문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것은 먼저 ‘신’에 대한 관념부터 새로이 정초하는 일이기 때문인데 신이 죽은 시대에 신을 말한다는 것은 부질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스피노자가 『에티카』(1677)에서 기하학적으로 논증하는 신과 흡사한데, 이는 최제우와 스피노자의 시대에는 ‘하느님(신)’에 대한 관념과 정서가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이 죽은 자본의 시대에 ‘하느님(신)’을 먼저 말한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 혁명’ 차원에서라도 이 ‘하느님(신)’을 건너뛸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생명의 씨앗으로서 신적인 운동, 작용, 움직임을 현실적 곤란을 이유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다른 기능주의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최제우의 ‘하느님(신)’에 대해 표영삼은 이렇게 해석한 적이 있다, “수운 선생의 신 관념은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몸 안에 모셔져 있는 분이며, 완성자로서 초월해 있는 존재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시간적인 생성 변화의 과정에 있는 분이라고 하였다.” ‘시천주’에서 시작해 해월 최시형의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使人如天)’이라는 다시 한 번의 정신개벽이 일어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1865년 수운 선생 탄신기념 제례일에 해월 최시형이 동학도들에게 “집결력과 꿈”을 심어주기 위한 강론에서 발표된 것이다. 해월 최시형은 1891년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신분 문제에 대해 직접 내려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집안을 망치게 하고, 양반과 상놈의 구별은 나라를 망치게 한다.” 이런 평등주의적 관념은 사람 몸이 곧 하느님이라는 개벽 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인간의’ 권리에 집중하는 서구의 인권 개념은 사실 근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미 스피노자에게 존재자 모두가 신의 양태라는 급진적인 입장이 있었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기독교와 변증법에게 축출되어 철학사의 한 귀퉁이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단독자적인 철학자였다면, 최제우와 최시형은 민중과 함께 숨 쉰 사상가였다. 즉각적인 민중 봉기를 꾀하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최제우와 최시형을 보수적이라고 폄훼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단 최제우가 평민인 최시형에게 훗날을 맡긴 선택 자체를 찬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士)의 민(民)되기’(조경달)를 통과하지 못한 계몽주의의 참담한 몰골이 드러난 우리의 현실에 비춰 볼 때, 차라리 최제우에서 최시형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혹 ‘혁명적 사건’은 아닐까?
하지만 이 ‘되기’에는 한 개별자의 윤리적 선택 문제 정도로 축소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학자들은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이 급증하는 계기를 역병(콜레라)의 창궐과 임오년(1882년)의 군란(軍亂)을 꼽고 있다. 19세기에 조선에서는 역병이 수시로 창궐했다. 이때 최제우는 “몸을 화평케 하고 몸의 기를 편안하게 하라”며 위무와 함께 ‘깨어 있음’을 강조했는가 하면, 최시형은 간단한 생활 수칙을 통해 동학도들에게 자신의 건강을 생활 속에서 돌보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동학에 입도하면 역병이 피해 간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이를 단지 비합리적인 풍문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동학도 내의 관계가 얼마나 건강했는지 입증해주는 반증으로 삼을 만하다. 또 최제우는 포덕 초기부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이 서로 돕기를 권장했다. 이를 ‘유무상자(有無相資)’라고 부른다. 이는 당연히 가난한 민중들을 깊이 감화시켰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박맹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학사상의 혁명성의 또 한 측면은 바로 ‘유무상자(有無相資)’를 통한 경제 공동체 건설, 즉 경제 혁명을 지향하였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동학 창도 배경에는 삼정(三政) 문란과 외세의 경제적 침탈에서 비롯된 조선 민중들의 곤궁한 삶을 경제적 차원에서 구제하려는 강력한 동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학이 창도 초기부터 입도하는 도인(道人)들에게 있는 자(=富者)와 없는 자(=貧者) 사이의 상호부조(相互扶助)를 강력하게 권장하였다는 사실 역시 1862년 경상도 상주에서 발송된 동학 배척 통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은 ‘유무상자’, 즉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기 때문에 가난한 술장사와 백정들이 다투어 동학에 뛰어든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_ 박맹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왜 ‘혁명’인가」,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모시는사람들, 2014, 232쪽

이런 ‘유무상자’ 정신은 민중의 생활을 나라의 정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꾸려나가게 하는 동시에 내부 결속력과 연대의 정서를 크게 확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의 일에 등한시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보국안민(輔保國安民)’에서 ‘보(輔)’는 그 뜻이 ‘덧방나무’인데, 무거운 짐을 실을 때 수레바퀴에 끼워 바퀴살의 힘을 돕게 하는 나무를 ‘덧방나무’라고 한다. 따라서 ‘보국안민’은 휘청대는 나라를 도와서 민중을 평안케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민중을 평안케 하기 위해 ‘보국’을 하는 것이지 나라 자체를 위함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는 갑오년 농민군이 백산에서 기포할 때 올린 깃발이 ‘제폭구민(除暴救民)’인 데서도 드러난다. 즉 나라의 폭력을 제거하고 민중을 구제한다는 말은 민중이 앞서고 나라는 민중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보국안민’은 『동경대전』의 「포덕문」에 등장한다. 최제우는 서구 자본주의의 침탈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보국안민’과 그 실천적 방책을 고심했던 게 분명하다. 그것이 ‘안민’에 대한 직접적이고 시급한 실천으로서 ‘유무상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최제우가 10년 동안의 장사치 활동을 통해 직접 보고 겪은 경험에 의해서 가능했다. 앞에서 나는 이를 ‘민중-되기’라 불렀는데, 결국 ‘민중-되기’를 통하지 않고는 ‘다시개벽’은 어림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인이나 기득권자의 민중-되기만 필요하고 가능할 것인가?

소위 ‘근대화’ 이후 자본은 민중의 삶의 터를 빼앗아 처음에는 민중을 거지로 만들었다가 다음에는 (임금)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민중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노예가 되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도 노예가 되었다. 수탈은 먹고사는 문제와 더불어 정신과 영혼의 황폐함까지 가져다준다. 즉 우리는 소비하지 않고는 실존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근대라는 현실이 강제한 결과이지 각자의 결단으로 찾아온 변화가 아니다. 그런데 민중은 사라지고 소비자만 존재하는 현상과 지금 살고 있는 미증유의 문제들이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사례들은 일상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 물음은 오늘날에도, 아니 오늘날에 더욱 유효하다. 코로나19로 인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국가와 자본이 가고자 하는 ‘이후의 시간’이 우리를 더욱 암울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론 과잉 시대에 살고 있지만 민중-되기와 관계 없는 서재와 포럼의 이론은 우리를 놀라게[驚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독한 ‘고생’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뉴노멀’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고생스러운 ‘민중-되기’를 통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낼 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민중-되기’의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 다시개벽의 시간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씨알을 씨알이게 하는 일, 씨알을 쭉정이로부터 분간하는 일은 씨알이 더욱 번성하게 하는 실천에 달려 있다. 이 실천은 씨알이 날아와 싹이 틀 수 있도록 밭을 일구는 일일 텐데,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유무상자’는 무엇이며 ‘보국안민’은 어떻게 가능할까.

마르크스는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갖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새로운 ‘유무상자’는 소박한 상호부조에서 나아가 직접 생산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채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세상이 ‘고르게 가난하게 사는 사회’(김종철)의 토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되지 않는 한 기후위기가 가져오는 비극을 피하지 못할 것만 같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김종철 선생 글의 제목은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였는데,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 될 것인가?” 1886년에 해월이 말한 ‘이천식천(以天食天)’은, 천지만물이 서로를 먹고 서로의 밥이 된다는 ‘생명의 문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도 ‘이천식천’이 우리에게 유효하다면, 아직도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밥이 되지 못해서일 것이다. 이 순환의 사슬을 끊어버린 주범은 당연히 자본이다. 동학이 창도되고 민중혁명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조금 지난 후였다. 30년은 우리를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후 30년은 우리를 죽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럼 앞으로 30년은 어떤 시간이어야 할까? ‘코로나’라는 하느님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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