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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미켈란젤로씨, 숨어있지 말고 나오세요!새로운 정체성을 향하여
이동준 이천문화원
1. 홍수에서 살아남을 새로운 창문이 있는가?

백신 접종율이 높아지면서 (감염자 수는 여전히 줄어들고 있지 않지만) 이제 우리 사회에 코로나19에 대한 위기감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뉴질랜드, 노르웨이, 이스라엘 등은 코로나19 종식 선언을 했다. 이제 곧 해외여행도 가능해질 거란 기대감도 점차 커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재난과 위기에 직면할 때면 늘 내게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의 천정에 그린 ‘노아의 홍수’라는 그림이다. 노아하면 100년에 걸쳐 배를 건조하고 지구상의 모든 짐승을 한 쌍씩 불러모아 탑승시킨, 그의 치밀한 계획과 지도력에 놀라게 된다.
시스티나 경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엔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 있다. 그리고 그 위로부터 6개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천정화에 묘사되어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고 해와 달과 별, 땅과 바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이어서,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그리고 낙원에서 추방되어 죽음과 출산의 고통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뒤이어 노아를 소재로 한 3개의 천정화가 이어지는데 이렇게 9개의 천정화 가운데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그림이 바로 ‘노아의 홍수’다. 이 세상에 죄가 만연하면서 신은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대홍수를 일으켜 모든 인류를 멸절시키려 한다. 신은 노아를 부르고 그에게 방주를 짓게 하며 마침내 40일간 비를 내린다.

Michelangelo, The Delug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fresco, 1508-1512 (Vatican, Rome) Michelangelo, The Delug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fresco, 1508-1512 (Vatican, Rome)

노아의 홍수는 지구적 재난에 맞닥뜨린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한다. 이 그림은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와 구명보트, 오른쪽의 천막에 있는 성직자들, 그리고 왼쪽의 언덕 위로 피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방주가 배 모양이 아니라 상자 모양이다. 이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갈대상자에 실어 나일강에 띄워보낸 것처럼 인간의 구원이 오직 신의 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방주의 모습이 시스티나 경당과 같은 모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방주는 로마교회를 상징한다. 구명보트 위에는 저만 살겠다고 사람들이 서로 보트에서 떨어뜨리며 싸우고 있다. 바위 위 천막은 비바람에 곧 날아갈 듯하며 머잖아 곧 가라앉을 것을 예감한 듯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이 천막은 유대교를 의미하고 언덕 위의 사람들은 이교도 세계를 상징한다.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도 있다. 물속에 빠져가는 천막이 로마교회라는 주장이다. 대리석처럼 보이는 바위와 올리브나무, 천막 속에 피해있는 사람들의 면면으로 보아 이들은 가톨릭교회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방주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래에 나타날 ‘새로운 교회’를 상징한다. 이런 해석은 과거엔 화형에 처할 일이었지만 오늘날 그의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이 그림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언덕으로 피신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이리저리 권력에 휘둘리고 동원되면서 목숨을 부지해온 가난한 민중들, 사회적 약자들이다. 아무도 이들을 호출해주지 않았기에, 비싼 승선권을 얻을 수 없었기에 구원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다. 바로 이들 약자의 관점에서 이 그림을 다시 해석해볼 수는 없을까?

이들 언덕 위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방금 물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기진맥진해 있지만, 식빵, 냄비와 그릇, 프라이팬, 걸상, 담요, 옷가지 같은 생활물품들을 챙겨들고 오고 있다. 이들은 이전의 일상으로 곧 돌아가리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한동안 수재민 생활이야 감수하겠지만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언덕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미래가 무엇인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대부분 갓난애와 부녀자, 부상자와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보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다. 권력자들은 이들을 손쉽게 이교도로 규정하는데 이는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이고 위기의 순간에 이들에게까지 구원을 나눠 가질 여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겐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일까?

원 안에 Michelangelo로 추정되는 인물 원 안에 Michelangelo로 추정되는 인물

그림 속에 있는 이들 인간 군상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나는 뜻밖에 그동안 무심히 지나쳐버렸던 한 인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이다. 아무 죄도 없이 울고 있는 어린아이들, 엄마 다리를 꼭 잡고있는 아이, 상처를 입고 겨우 바닥에 누워있는 환자, 그리고 젖먹이 아기를 안고있는 엄마... 이들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다니.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이들에게도 어떤 희망이 있음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언덕 위로 피신하는 사람들 왼쪽에는 거센 바람에 휘어진 나무가 하나 보인다. 한 사람이 이 나무 위로 올라가고 있다. 나뭇가지가 뻗어있는 끝으로 따라가 보자. 가지의 끝에는 방주의 꼭대기가 닿아있다.

방주를 자세히 살펴보자. 방주는 굳건히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방도가 없다. 누가 안에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오직 한 사람 노아가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있을 뿐이다. 방주 아랫쪽으로는 끝단에 올라선 사람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려고 긴 사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오른쪽에는 한 사람이 도끼를 휘둘러 방주의 외벽을 부수려 한다. 방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방주 꼭대기의 창문뿐이다. 그 창문에 눈부시게 하얀 비둘기가 앉아있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다. 이 방주의 수호자가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창문에 왼쪽의 언덕에서 뻗어온 나무의 가지가 닿아있다. 이 나무 위로 오르면 방주의 꼭대기 창문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미켈란젤로는 어쩌면 종교와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이들에게 신이 직접 허락한 새로운 구원의 창문을 열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2. 팬데믹 노아 이야기!

이번에는 현대의 노아 이야기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현대적 변용에 대한 이야기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이제 막 언덕으로 올라온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비가 그치면 이들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보다. 물에서 건져낸 가재도구와 일상용품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아의 홍수 네러티브를 지금 상황에 적용하면 홍수는 지금 세상을 편만히 덮고 있는 팬데믹이다. 21세기에 인류가 맞게 된 홍수의 또다른 변주인 셈이다. 팬데믹 상황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와 이전의 생활을 복원하려 할 것이다. 명동 거리는 다시 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거리고 고용율은 올라가고 학교폭력도 다시 빈번하게 일어나고 유력자의 자녀 결혼식장엔 예전처럼 눈도장을 찍으려는 하객들로 넘쳐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로의 복귀를 꿈꾼다. 손님이 줄고 매출이 없어도 임대료와 세금, 대출이자는 당분간 눈덩이처럼 불어나겠지만 코로나 상황이 종식되고 나면 머잖아 다시 문을 열고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접을 순 없으리라.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우리의 일상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희망을 얘기하면서 온통 백신 개발에 기대를 건다. 이제 백신만이 인류의 희망인 듯하다. 지구뉴스는 2020년 하반기엔 언제 백신이 개발되고 생산되느냐에 모아지더니 2021년 상반기엔 얼마나 백신 물량을 확보하고 접종하느냐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화이자, 모더나, 얀센, 아스트라제네카, 스푸트니크V, 시노박, 시노팜, 코박신, 노바백스...

백신만이 희망이다.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백신 물량을 확보하는 것만이 국가의 덕목이다. 결국 자본력이,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가진 자들이 우선이다. 그들이 마련한 거대 방주에 승선하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이제 우리는 줄 서서 백신을 맞을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문득 이런 멘트를 듣게 될지 모른다. ‘먼저 투시스캔너를 통과하세요. 발열체크와 신분확인 후 검역소에서 발급한 접종증명서가 있어야만 승선이 가능합니다. 승선 후에는 방주의 모든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방주에 오르면서 당신은 승선권이 없어 아우성치는 인류의 비참한 실상을 보게 될 것이다. 부디 견디어다오. 백신접종율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집단면역이 형성될테니... 그때가 되면 백신을 맞지 못한 이들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제발 살아다오.
나는 방주에 탑승하는 탐욕스런 인간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물론 이미 방주에 안전히 타고 있어서 그림 속에서는 더이상 보이지 않지만, 그들 역시 방주 안의 퍼스트클래스 좌석에 앉아 이 세계고에 허덕이는 참담한 광경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노아 역시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사람들을 밖에 두고서 이대로 방주의 문을 닫을 수는 없다고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비난할 것이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그의 가족을 태우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우선 태워야 옳지 않을까? 적어도 그래야만 그의 결정과 행동이 공적이며 공정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테니까...

노아는 과연 의인이었나? 그저 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아무 생각 없는 하수인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이 상황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공정인지 그는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을까? 노아에게 묻는다. 그대는 모든 생명에게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고지를 제대로 하였는가? 만일 그 고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누군가 나는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그래서 방주의 승선 기회를 처음부터 얻지 못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노아에게 묻는다. 그대는 방주에 들어갈 기회가 모든 생명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가? 노숙인은 재난지원금 대상자 명단에도, 백신접종 대상자 명단에도 빠졌는데, 방주 승선자 명단에는 노숙인이 한 명이라도 포함되어있는가? 그대가 말하는 방주의 정의는 뭔가? 그대가 소지한 승선자 명단은 무슨 기준으로 작성된 것인가? 그들이 방주에 오르기에 합당한 자들인지 누군가 공개검증을 요구한다면?
방주에 오른 사람은 새로운 인류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인류다. 그러니 희망하건대 그들 중에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자들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설마 목숨을 구하고도, 값없이 은혜를 누리고도 그 은혜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성서에 따르면 홍수가 나기 전 온갖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줄 지어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에 승선한다. 방주에는 정결한 짐승만 타는 것이 아니다. 정결하지 못한 짐승들도 초대받고 방주에 오른다. 그렇다면 육식을 해온 사자는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사자는 과연 그의 본성을 참아내고 풀을 먹으며 어린 양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방주에 오른 짐승들을 짐승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역, 수많은 계층, 수많은 인종을 대표하는 인류들이다.
사자에게 풀을 먹으라는 건 죽으라는 얘기일지 모른다. 다만 한시적으로 풀을 먹고 견디는 일은 가능할지 모른다. 단군신화에서도 범은 곰과 함께 쑥과 마늘로 연명하며 수십 일을 견디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자의 인내심만 믿고 이런 육식동물을 방주에 동승시킨다는 건 너무도 위험한 도박이 아닐까? 문득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떠오른다. 방주 안에는 극저온 냉동보존장치가 설치되어있다. 사자는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이 장치에 들어가 길고 긴 수면을 취한다. 방주 맨 아래 칸에는 수천 개의 캡슐상자가 마련되어있다. 어쩌면 지상에 살았던 각종 생물들은 그들의 종 보존을 위해 이 냉동캡슐에서 수십년을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3. ‘백만 척의 방주’가 도착한 곳, 바로 ‘지역’이다!

냉정히 성찰해보니 백신만이 희망이었을 때 그 당시 희망은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애석한 일이다. 백신을 맞고도, 방주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과거의 생활로 회귀하기를 꿈꾸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게 아닐까? 몇몇 국가는 여전히 힘센 자의 본성을 내려놓지 못하고 백신을 선점하려 든다. 얼마 전 이스라엘은 집단면역을 선언하고 그동안 내려진 모든 방역조치를 해제했다. 이제 일상으로의 복귀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상이란 다시 팔레스타인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일이다. 과거의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방주에 승선하려는 자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승선권은 미켈란젤로 시대에도 남발된 로마교회의 면죄부(Indulgentia), 돈으로 맞바꾼 은사증명서에 불과하다. 만일 이런 자들이 승선권을 소지하고 방주에 오르려 한다면 노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려놓으라. 지금 필요한 것은 눈앞의 구차한 목숨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다. 내가 맞을 백신 접종권을 미래의 희망을 위해 포기하는 일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Michelangelo, The Delug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fresco, 1508-1512 (Vatican, Rome) 방주에서 나와 새땅에 퍼지는 동물들 (Noahs Ark on Mount Ararat by_Simon de Myle. 1570)

노아의 홍수 네러티브는 지구적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어온 인류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세계고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제 그 반복을 멈출 때가 되지 않았을까? 홍수는 인간의 정체성을 무화시킨다. 대지 위에 새겨진 인간의 거처를 모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렸던 온갖 특혜와 기득권도 사라지고 없다. 이제 홍수가 끝나면 신인류는 그의 새로운 거처를 정해야 하리라. 새로운 인류는 과거의 정체성에 연연하지 않는다. 방주는 새로운 정체성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새로운 삶의 양식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색하고 그에 맞는 몸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나는 이 처음 공간을 ‘씨앗’으로 설명하고 싶다. 씨앗은 단단한 껍질로 그 속을 보호한다. 그러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먼저 껍질이 터지고 찢겨야 한다. 이제 씨앗은 아무런 보호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환경과 만나야 한다. 한치의 머뭇거림도 있을 수 없다. 낮선 세상과 경계를 지어주며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껍질을 걷어내고 이제 맨 몸으로, 세상과 만나야 한다.
이제 껍질의 역할은 끝났다.(전통문화) 무방비로 세상과 만나는 힘, 스스로 처음이 되는 힘, 그것은 이전에 떠나온 곳에서 형성된 몸을 새로운 세상에 맞게 변화시키는 힘이다. 그것이 처음 문화(Culture)란 말이 ‘재배하다’란 뜻의 라틴어 콜레레’(colere)에서 온 연유일 것이다. 노아의 방주도 일종의 씨앗이다. 방주는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을 담고 보호하다가 홍수가 물러가면 아낌없이 그 생명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홍수는 그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도시 문명과 네트워크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킬지도 모른다. 그동안 저마다의 계좌에 고이 쌓아둔 금융자산, 온갖 지식과 정보, 기억들도 어느 날 사라져버릴 것이다. 홍수는 끝났지만 모든 기록이 사라지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무화되고 말 것이다. 나와 타자와의 경계도 모호해질 것이다. 정체성과 소유의 개념도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정초해왔던 모든 지식과 사회적 원리도 의심되고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시도 역시 끊이지 않겠지만 얼마 후엔 모든 것이 멈추게 될 것이다. 이젠 금융도, 소유도, 지식도, 자본도, 이전에 힘을 발휘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이제 소용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상실되고 전통적인 것의 가치가 뒤집힐 때 그때야말로 새로운 가치가 창조될 수 있는 순간이다. 팩데믹 노아는 바로 그런 순간을 지난 백년 동안 준비해왔으리라. 이제 新 노아의 시대가 열렸다. 방주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방주의 문이 열리고 새로운 생명의 類와 種이 밖으로 나오는 곳은 어디인가? 지역이다. 새로운 출발점이다. 새로운 인류가 도착한 백만 개의 지역이다. 백만 명의 노아, 백만 척의 방주.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맞게 자신을 고칠 것이다. 그들의 몸을 고치고 그들의 삶의 양식을 고치면서 진화할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의 문화를 바꿀 것이다. 바로 지역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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