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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
이용원 월간토마토 발행·편집인

모든 기록은 공유와 확산을 전제로 한다. 범위와 시간에 제한이 있고 의도한 만큼 공유와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기록의 본래 의도이다. 물론, 대표적 기록물인 ‘일기’는 사적이어서 공유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나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처럼 일기 역시 언제든 공유 가능하다. 그 가치 또한 높다. 편지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다양한 기록을 공유하며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한다. 그 힘으로 미래를 상상한다. ‘기록’은 그런 점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고리다.
안타까운 건, 지금껏 우리 사회 기록이 편중되었다는 점이다. 지역은 ‘서울’에 집중했고 인물은 권력과 재력 등 무엇이든 ‘가진 자’ 중심이었다. 이런 기록의 편중은 단순히 공정성 측면에서 안타까움을 주는 건 아니다.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데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해와 요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록은 민주주의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는 이유다.
지금껏 우리 사회에서 서울을 제외한 공간은 뭉뚱그려 지방이었을 뿐이다. 각 지역이 지닌 고유한 문화는 그 ‘가치’에 정당한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고유성을 드러내며 우리 역사 중심에 선 적도 없다. 지역이 역사에 등장하는 건, 중심에 저항할 때뿐이었다.
그랬던 지역은 이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콘텐츠이다. 마치 그동안 없었던 존재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듯 공공이든 민간이든 관심이 뜨겁다. 민망할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범한 우리네 이웃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반길 만한 변화임에도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지역과 사람을 기록하는 일은 대상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지역을 자본주의 시장에서 소비할 또 다른 ‘상품’으로 인식하는 건, 곤란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서

image대전여지도

대전광역시에서 월간 『토마토』를 발행한 지 이제 15년이다. 2007년 창간할 당시 ‘공간, 사람, 그리고 기록’이라는 테마를 콘셉트로 설정했다. 지금처럼 지역과 그 안에 켜켜이 쌓이는 평범한 삶에 관심이 높지 않을 때다.
월간 『토마토』는 지역에서 다양한 공간과 평범한 사람 이야기를 차곡차곡 지면에 담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지금껏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우리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고 공유하며 우리 미래는 우리 힘으로 상상하기를 희망했다.
이런 생각으로 창간 때부터 제법 긴 시간 이어온 꼭지가 바로 ‘대전여지도’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때론 개발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마을을 기록하고 싶었다. 마을을 찾아가 주민을 만나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충실하게 기록하려 했다. 대부분 주민 증언에 의존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때로는 골짜기 지명까지 꼼꼼하게 챙겨 기록하고 때로는 오래전 마을에 시집온 할머니 개인사에 집중했다. 여의치 않으면 마을을 둘러싼 생태와 풍광을 기록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선 기록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 구석구석에 쌓여가던 이야기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가치를 두지 않는 이야기는 그렇게 대(代)를 건너며 이어갈 힘을 잃고 있었다.
매월 잡지 콘텐츠로 갈무리해둔 마을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엮었다. 『대전여지도』 1, 2, 3, 4. 지금까지 모두 네 종을 발간했다. 중구와 동구, 유성구, 서구다. 구별로 시리즈를 나누었다. 내년이나 후년에 다섯 번째 책, 대덕구편을 내면 일단락이다. 시리즈 첫 작업이었던 『대전여지도1_중구편』을 만들 때 함께 한 편집자가 내게 물었다. “의미 있는 책일지는 몰라도 절대로 팔리지 않을 책인데, 왜 이런 책을 굳이 출판하려 하세요?” 그때까지도 진지하게 해본 고민은 아니었다. 때가 되어 밥을 챙겨 먹듯 매월 마을을 취재해 『토마토』에 싣고, 그 원고를 추려 단행본으로 발간할 때까지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큰 고민 없이 진행한 일이었다. 편집자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머릿속에 뒤죽박죽 들어앉은 이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직후 극심하게 힘들었던 시절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행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계획 실행 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을 규정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정부 주도로 펼친 성장 위주 경제 정책, 수출 중심 정책이 핵심이었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짧은 시간에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찬란한 성장만큼 사회 곳곳에 그늘도 드리웠다. 급하게 앞만 보고 달리느라 못 보거나 놓친 것이 숱했다. 성장은 많은 문제를 양산했다. 문제를 해결하려 제도를 정비하고 예산을 투여했다.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가 얽히며 더욱 복잡해지는 문제를 중앙정부 차원에서 법과 제도에 기대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마을을 기록하며 문제의 시작 지점이자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았다. 『대전여지도』에 담은 마을은 주로 우리나라 경제 성장 과정에서 마치 없었던 것처럼 소외되거나 뒤안길에 머물렀던 공간이다. 쇠락하고 낙후한 곳이라고만 여겼던 그 공간에는 우리가 잊거나 놓치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가 여전히 남아 숨 쉬고 있었다. 마을에서 발견한 가치 중 가장 도드라진 건, 역시 ‘사람’이었다. 마을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며 배운 건,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마을 고샅으로 들어서, 문이 활짝 열린 집에 들어서면 툇마루에 앉았던 할머니가 힘겹게 무릎을 짚고 일어나 방문객을 맞이한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짓무른 눈빛에 경계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어지간하면 묻지 않는다. 그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토방이나 툇마루에 엉덩이 걸칠 자리를 만들어 줄 뿐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밥은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고향 어머니처럼 묻는다. 나무 등걸과도 같은 거친 손을 뻗어 차갑게 언 손을 꼭 잡아주거나 등을 쓸어내리며 토닥인다. 예고도 없이 집에 찾아든 이방인은 할머니에게 낯선 방문객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었다. 마을을 기록한 『대전여지도』를 통해 독자와 공유하고 싶은 핵심 정서다. 경계를 긋고 사람을 경계한 건, 나였을 뿐이다. 오랫동안 도시에서 살며 길든 습성이다.
독자가 우리가 기록한 마을 이야기를 공유하며 지난 60여 년 동안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잃어버린 정서를 다시 기억하고 끄집어내기를 바랐다. 이 정서는 지금 겪는 수많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가치다. 『대전여지도』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기록하고 공유하기를 희망한 이유였다.

일상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세상

image대전여지도 출간 기념 북 콘서트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매월 잡지를 발행하고 지역 콘텐츠를 가공해 단행본을 출판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에너지를 교환하며 무엇인가를 도모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공간을 찾아 기록한다. 구두를 만들고 씨앗을 판매하고 쇠를 깎아 필요한 기구를 만들며 땀을 흘리는 이웃의 삶을 기록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지닌 가치를 드러내 의미를 부여하고 기록하는 일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다. 지금껏 살아냈던 역사와는 다른 더 나은 역사를 써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무엇보다 지역 공간과 사람을 기록하는 일은 지역 역량으로 수행해야 한다. 전문가 혹은 전문 영역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공공 예산을 편성하고 지역 밖 외부 인력에 이를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 산업화 이후 수많은 영역에서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대행이나 위탁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기록조차 산업군에 편입해 시장 논리가 작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은 기록해야 할 존재를 대상화하고 소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역을 ‘로컬’이라 표현하며 비즈니스 모델 안에 유용한 상품으로 편입하는 세태가 영 불편한 이유다.
공공은 기록 결과물이라는 성과에 집중할 일이 아니다. 지역 안에서 다양한 측면의 기록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생태계를 갖추도록 지원해야 한다. 거칠더라도 자기 역사를 자기가 기록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결과물에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그걸 모아 의미 있는 자료로 가공하는 건, 아키비스트가 해야 할 영역이다. 민간영역에서는 각각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다양한 기록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족하다.
월간 『토마토』가 ‘기록’이라는 영역에서 기획하는 ‘생애주기별 출판운동’도 이런 측면에서다. 아직 기획 단계지만 기회를 만들어 중요하게 진행할 일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졸업할 때, 스무 살이 되었을 때나 환갑이 되었을 때 자기 역사를 자기가 기록해 책자로 엮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 이를 마을이나 지역 단위 도서관에서 수서해 함께 사는 시민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 콘텐츠가 풍성한 지역 도서관’은 절대로 어색하지 않다. 지역 곳곳에서 일상을 기록하고 이웃과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image대전여지도 취재사진(마을)

image덕골아랫말 골목길

image우리단행본 사진1

image우리단행본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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