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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 개인 아카이브의 인문적 가치에 대하여단편적인 일상, 주름진 이야기들
소종민 문학평론가

저 치욕과의 대면이 이제 일상이 되리
그것이 우리의 즐거움도 되리
역사도 정치도 세계도 저항도 허공도 그 무엇도
일상 아닌 것 없는, 거대한 일상이1)
_ 백무산 시 「치욕」 중에서

보물창고

국가 아카이브와 마을ㆍ공동체 아카이브가 집단적 이해관계와 보편성을 담는다면, 개인 아카이브는 사적 이해와 개별성을 지닌다. 물론 그 구분이 고정적이지 않다. 집단 아카이브에서도 사적 이해관계가 자주 확인되며, 역으로 개인 아카이브에서 공공성이 발현되는 사례가 자주 보인다. 아카이브는 구성할 당시의 시간적ㆍ공간적 한계가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므로 아카이브에 담긴 기록물만으로 국가ㆍ마을ㆍ개인의 성격을 일반화할 수 없다. 단기 프로젝트로 구축된 아카이브의 한계는 더욱 명백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축적될 때에만 그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아카이브가 일회적 이벤트나 단기 프로젝트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아카이브’는 기록물을 보관한다. 보관 기록물은 문서, 책, 음향, 음성, 그림, 사진, 도면, 영상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매체는 달라도 예외 없이 모두 ‘이야기’가 내장되어 있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아카이브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마치 퇴적물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보물창고다. 그 창고에서 아카이빙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구술취재 즉 인터뷰와 같이 대화로 구성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누구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드러나고, 질문을 어떤 형식으로 던지고, 어떻게 대답하는지도 드러난다. 대화로 구성된 구술기록이 충실하게 되어 있다면, 구술할 당시의 분위기도 알 수 있다. 만약 기록물로 파악이 어렵다면, 녹취 파일이나 영상 파일로 당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두 대화 상대자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감응(affect)이나 상대방에 대한 태도도 읽을 수 있다.

구불구불 가기

수많은 크고 작은 이야기가 겹겹이 축장(蓄藏)되어 있는 아카이브는 특별한 매력을 지닌다. 개인의 아주 사사로운 일상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례로 일상사(日常史)를 개척한 알프 뤼트케(1943~2019)는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다층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언행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무엇보다 일상은 매우 복합적인 시점과 태도가 무수히 교차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행위자 개인이 무심하게 특별한 의도 없이 반복적으로 습관처럼 타인에게 행하는 몸짓이나 농담에서도 뤼트케는 특정 시대의 단면을 간파해냈다.
특히 그는 독일 노동자의 일상 기록을 분석하면서 노동자들의 뺀질거림, 애매한 행동, 두루뭉술 넘어가기, 명확한 입장이 없는 행동에서 노동자 특유의 ‘아집(eigensinn)’을 발견했다.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남기 위하여 벌이는 저항과 타협, 비(非)직선적인 실천이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파악한 뤼트케는 부정적 뉘앙스로 가득했던 ‘아집’이라는 단어를 열린 개념으로 재설정하였다.
뤼트케의 탐색처럼 우리의 일상은 절대 일직선으로 운행되지 않는다. 매일매일 모순적이고 다층적인 행위로 가득 차 있으며, 구불구불 지나간다. 뤼트케를 초청하여 수년간 연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 역사학자 임지현의 표현에 따르면, “뤼트케의 일상사는…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굴곡진 삶의 주름들 사이에 빼곡히 숨어 있는 기억, 감정, 고자질, 아집, 전쟁하기, 휴식, 권위, 충성 등등의 모순을 부조리하게 드러낸다.”2)고 언급한다.

상투적인 건 없다

image거리의 인생

가끔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는 아카이브를 만날 때가 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더 깊이 살피지 못한 채 서둘러 인터뷰가 마무리되었거나, 꼭 포함되었어야 할 기록을 실수로 누락시켰거나, 자료 자체를 재생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투적인 일상을 담은 상투적인 아카이브는 매력 없다. 일상이란 찬찬히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궁과도 같다. 시간을 들여 정성을 다해 다가갈 때 일상은 비밀의 문을 연다. 여전히 일상에서 무언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결국 속도(速度) 문제다. 우린 너무 빨리 살아간다. 시계가 지시하는 대로 몸과 마음이 정향(定向)되어 있다. 돈의 회전 속도를 중단시키거나 지연시킬 수 없다면, 일상의 이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본은 매끄러운 평면의 삶을 지향하고 생산한다. 정신 차리고 매우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인생 자체가 수렁에 빠질 거라는, 확인되지 않은 주문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岸政彦]의 작업은 난공불락의 일상에 매몰되지 않을 지혜를 제시한다. 그의 작업은 낱낱의 단편(斷片)으로 조각난 일상이 천천히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하나둘 모여 어렴풋하게나마 그 윤곽을 드러내고, 마침내 작은 시냇물이 되어 묵묵히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소위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될 외국인 게이, 트랜스젠더, 섭식 장애인, 마사지 걸 싱글맘, 노숙자 등 다섯 명의 인터뷰집인 「거리의 인생」에는 ‘짧은 질문과 두서없이 이어지는 대답, 말줄임표와 멋쩍은 웃음’과 함께 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주인공이 된다. 추천사를 쓴 노명우의 말처럼, 그들은 “버림받은 사람, 내쳐진 사람, 감추어진 사람, 숨어 있어야 하는 사람, 발언해서는 안 되는 사람,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에서 “인생이 담긴 로드무비의 주인공”이 된다.3) 그렇듯 이 책은 일상의 이면에 방치된 채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당당한 지구시민권을 부여한다.

image일본 도시 뒷골목의 밤 풍경. 기시 마사히코의 「거리의 인생」에는 바에서 쇼를 하는 트랜스젠더나 성매매를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여성, 노숙인 등 뒷골목 인생과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겼다. 저자는 이들에게 다가가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 위즈덤하우스 제공

노하우(know-how)

image단편적인것의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의 인터뷰 노하우는 첫째, 연구ㆍ교육ㆍ발표와 상관없이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그냥 ‘이 사람 재미있네’, ‘이 사람 느낌 좋네’ 싶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둘째, 이야기를 끊지 않는다.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4)
셋째, 자신의 견해로 상대방을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람이 자유다. (중략)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베이면 피가 나온다.”5)
넷째, (아마 따라 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겠지만) 잠자코 곁에 있는 것이다. “감정이입도 없고, 의인화도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리고 ‘모든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그 단순한 엉뚱함. 그 속에서 개별이라는 것이 지니는 무의미함.”6) 여기서 ‘무의미’는 ‘의미가 없이 허망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말의 맥락을 따르면, 존재를 감정이입이나 의인화와 같은 의미의 틀로 가두지 않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관계’라는 사건

image알프 뤼트케

피 끓는 고통으로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타인의 곁에서, 죽음이 임박한 개의 곁에서, 두서없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노숙자 곁에서, 길가 자그마한 돌멩이 곁에서 잠자코 가만히 있으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쌓여야 가능하다. 나 자신의 경험과 판단과 견해와 일정을 내려놓고, 함께 처한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상대에 충실한 존재자가 되려면, 오랜 숙련(熟練)이 필요하다.
기시 마사히코는 “상이한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며, “동시에 우리는 ‘타자라는 것’을 구둣발로 밟고 다니는 일 없이, 한 걸음 바로 앞에 무르춤하게 멈추어서는 감수성도 반드시 필요하다.”7)고 말한다. ‘나’라는 타자를 옆에 둔 타인은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서로 작용하고, 서로 되기를 실행하는 것이다.

‘타자’라는 존재의 출현은 ‘나’에게 최대의 사건이다. ‘나’의 다가섬 역시 ‘타인’에게 최대의 사건이 된다. ‘프랑스의 소크라테스’ 알베르 자카르(1925~2013)는 ‘나’라는 사람의 근본적인 실재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것, 즉 ‘나’는 내가 타인들과 엮어나가는 관계망 자체라고 말했다.8) 서로에게 출현한 나와 타인, 그 사이에는 더 이상 단절이란 없다.
아카이브는 이야기 조각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기억의 조각으로 만들고, 기억은 관계라는 사건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건은 시간을 만든다. 아카이빙은 나와 너 그리고 그와 그것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오래된 아카이브에는 기억과 망각으로 얼룩진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야기 조각들이 맥락이 지워진 채 나뒹굴기도 한다.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이야기는 보고하는 사람의 삶 속에 일단 사물을 침잠시키고 나중에 다시 그 사람에게서 건져 올린다. 그래서 이야기에는 옹기그릇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 있듯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9)고 말했다. 그렇게 주름지고 패이고 구불구불하고 모순투성이처럼 보여도 허투루 된 건 없다. 싫든 좋든 모두 다 우리 인간의 소행일 뿐, 헛된 건 없다.

1) 백무산, 「거대한 일상」(창비, 2008) 157~158쪽.
2) 알프 뤼트케(송충기 옮김), 「알프 뤼트케의 일상사 연구와 ‘아집’-직선을 벗어나 구불구불 가기」(역사비평사, 2020)
3) 기시 마사히코(김경원 옮김), 「거리의 인생」(위즈덤하우스, 2018)
4) 기시 마사히코(김경원 옮김),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마, 2016) 60쪽.
5)위의 책, 98쪽.
6)위의 책, 16쪽. 기시 마사히코도 알프 뤼트케처럼 일상의 복합성과 다층적 모순을 잘 인지하는 연구자로서, 특히 그는 개인 아카이브에 내장된 이야기의 결들이 갖는 연원이나 심연에 감추어진 고통 등을 직관적으로 감지,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깊게 통찰하는 능력이 두드러져 보인다.
7)위의 책, 180~181쪽.
8)알베르 자카르(장혜영 옮김),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실」(동문선, 1999) 18쪽.
9)발터 벤야민(최성만 옮김), 「이야기꾼」, 「서사ㆍ기억ㆍ비평의 자리」(길, 2012) 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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