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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공동체 아카이브의 거버넌스와 기록 주권
이경래 한신대학교 기록관리대학원 교수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기록학 전공자인 필자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 박물관 등 주요 문화기관을 비롯해서 지자체 수준에서도 다양한 지역 아카이빙을 추진하고 있다. ‘아카이브(archives)’라 하면 전통적으로 정부에서 생산하는 공문서 또는 공문서를 보관하는 장소로 이해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 민간영역에서 다양한 정체성과 관심을 표방하는 공동체 아카이브가 구축되어 그 개념적 정의를 확장하고 있다.

과정으로서의 아카이브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주민 자치 시대의 도래는 도시 정책 전반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더 이상 재개발이나 토건 사업적 흐름이 아니라 상호 호혜적 관계망의 복원과 ‘돌봄’을 그 중심에 두는 도시재생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전 기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시 이야기를 담는 ‘소프트웨어’적인 도시재생사업은 우리 사회에서 그 주요 작동 기제로 마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마을 아카이브의 구축을 지원했고, 그렇게 전국적 차원에서 구축되기 시작한 마을 아카이브는 풀뿌리 주거 운동을 대변해 나갔다. 물론 마을 아카이브의 발전이 시행착오 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 도시정책 패러다임이 그러하듯, 마을 아카이브 역시 초기에는 중앙 정부와 지자체 주도적으로 진행되었고 기관의 ‘보여주기 식’ 콜렉션 구축에 크게 집중됐다. 허나 ‘주민 없는’ 마을 아카이브 사업의 부작용은 명백했다. 결국,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주민들 주도의 호혜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아카이브(Archives as a process)’에 주안점을 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마을 아카이브의 양적 증가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의 전환은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지금껏 정부 기록을 그 수집 대상으로 한정하던 국가기록원은 최근에 공동체 아카이브를 국가기록관리의 거버넌스체제 안으로 끌어와 포용하는 것을 목표로, 구체적인 민관 협의체 구성을 국가기록원의 비전에 포함했다(국가기록원, 「국가기록관리중장기발전계획」, 2020-2024). 이제는 더 이상 공동체 아카이브가 국가기록 관리에서 소외된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영역으로 자리잡았고, 그 첫 조치로 민관 협의체의 구성이 제안된 것이다.

국가기록의 공적 관리체계 속에 민간 공동체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사례는 이미 외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영국 정부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동체 아카이브가 공공 기록만큼 한 사회에서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이의 포용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국가기록원은 2003년 소외된 공동체 아카이브들과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해 이른바 ‘팔짱끼기(Linking Arms)’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호주의 경우에도 최근 국가적으로 가치 있는 기록물의 수집과 관련해서 ‘공동체와 사회의 기대’를 반영할 것을 강조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공동체 아카이브의 수집과 관리를 천명했다. 이들 모두는 공적 기록만큼이나 공동체 기록의 중요성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사례들이라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전 세계적인 추세로 볼 수 있는 공동체 아카이브의 민관 협치, 즉 ‘거버넌스’는 상대적으로 불안전하고 주류로부터 소외된 공동체 아카이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중앙 정부뿐만이 아니라 지자체, 지역 문화기관과 공동체 간 상호 중층의 민관 협치 구조는 이들 기록들의 보다 안정적인 구축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고민될 필요가 있다. 민관 각 주체들의 바람직한 역할 정립은 효과적인 거버넌스 구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중앙 정부-지자제-지역 문화기관이 할 일

먼저 중앙 정부 차원에서는 국가기록원을 그 행위 주체로 보고 지역 마을 단위 수준에서, 좀 더 넓게는 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마을 아카이브운동을 중앙 차원에서 고무하고 지원할 제도적 방안을 정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을 아카이브를 국가 기록관리 영역으로 끌어들여 공공영역에서 서비스할 수 있는 중앙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일회적이고 단발성 프로젝트 성격을 띠는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기획 및 접근을 벗어나 적어도 기관의 중장기 프로그램 차원에서 공동체 아카이브를 지원할 수 있는 체계적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들 지원체계는 적어도 공동체 아카이브와의 공적 ‘파트너십’ 구축이라는 중장기적 비전 아래 단계별 목표를 설정하고 세부전략을 추진해 나가는 일과 연계된다. 더불어, 국가기록원은 지금까지 민간기록에 대한 접근방식, 즉 물리적 수집과 보관, 그리고 주로 통제에 치중한 접근방식을 벗어나 ‘탈보관주의’에 입각하여 분산 보존과 지원, 그리고 지속적인 파트너십 구축을 통한 통합서비스 체계 정비에 중점을 두는 접근을 도모해야 한다.
다음으로 지자체 수준에서 보자면, 지역 내 공동체 아카이브 운동들을 상호 네트워킹해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통해 안정적으로 관리, 서비스할 필요가 있다. 즉 지방 정부의 차원에서 지역 내 다양한 공동체 아카이브를 네트워킹하고 기술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서 소규모 공동체 아카이브의 지속성을 일정 부분 체계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들 상호 간 접속을 제공하며 집단적 목소리를 내도록 독려하며, 공동체들의 네트워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지속성을 담보해 나가는 방식이다.

지역 문화기관 수준에서 보면, 마을공동체 안팎의 다양한 공동체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공공 기록관, 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역사협회와 같은 지역 내의 주요 문화기관들이 지역의 공동체 아카이브들과 연결을 맺는 것은 지역 공동체 아카이브의 안정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른바 구체적인 전략과 실무 집단인 주요 문화기관들은 지역 공동체 아카이브에 적절한 공간과 컨설팅을 제공함으로써 지역 공동체 아카이브의 지속성을 확보하도록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또한 지역 문화기관 입장에서도 지역의 다양한 공동체 기록에 대한 접근 장벽을 낮출 수 있어 아카이브 수집 및 서비스 범위를 수월하게 확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아카이브 수준에서 보자면, 그들 스스로 다양한 비주류의 소규모 공동체 아카이브들과의 상호 네트워킹을 통해 아카이브의 지속성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지역의 마을도서관, 마을신문, 그 외 독립 공동체 아카이브들, 예를 들면 최근 한국에서 부상하는 공동체예술 아카이브, 소수자 커뮤니티 아카이브 등과 인적·시스템적 네트워크를 통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일은 중요하다. 공동체 아카이브는 사회적 타자와 약자의 논리를 담지하고 있기에 상호 연대와 결속을 통해 그 기록 효과를 배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동체 아카이브가 고립되지 않고 상호연대를 통해 지속성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다.

기록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적 협약’

이제까지 살펴본 공동체 아카이브 거버넌스 체계의 중층적 구조는 이중적인데, 한편으로 공동체 입장에서 보면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중앙 정부나 지자체가 재정 및 인적자원을 지원해준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들 자신 공동체의 ‘기록 주권’과 관련해서 보자면 그 자체가 상당히 억압 조건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관의 제도와 지원에 의한 간섭은 종종 공동체 단위와 갈등 상황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자율성, 즉 기록 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통상 주요 문화기관들은 사업의 주체로서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배타적으로 가져갈 것을 주장하면서, 결과적으로 공동체들이 출처인 그들의 컬렉션에 대한 자율적인 통제권을 박탈당하거나 소외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물론 문화기관들의 입장에선 공공 기금을 사용하여 공동체 컬렉션을 구축·관리했기에 공동체가 기록물을 일방적으로 회수하려는 위험을 막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기록 주권을 박탈한 채 공적 기관의 독점적 소유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공동체 기록의 생성을 막는 악재가 될 수도 있다. 즉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민관 파트너십을 통해 민주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공동체 아카이브를 이전의 관행에 따라 공공기관이 소유권을 독점하거나 기록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보단, 양자의 입장을 절충한 ‘민주적 협약’이 필요해 보인다.
예서 ‘민주적 협약’이란, 주요 문화기관이 보관 공간을 제공하고 기록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공동체 생산 기록 컬렉션의 소유권과 통제권을 넘겨받는 관례적인 보관 협약을 포기하고 공동체 컬렉션에 대한 공동체의 기록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협약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공동체 아카이브의 컬렉션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공동체가 지니고, 이와 동시에 최소 10여 년 정도 컬렉션이 공적 영역에서 충분히 활용되고 서비스될 수 있도록 공동체와 공공기관이 함께 협약을 맺는 것도 그 방법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양자가 함께 소유권을 보유하는 ‘공동 소유권(Co-ownership)’ 제도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공동 소유권 제도는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처분 등 중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느 일방에 의한 독단적 의사결정을 막아주는 기제로, 공동체가 적어도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 기제로 볼 수 있다.

기록 주권에 대한 논의는 이미 2000년대 초반에 호주 원주민(aboriginal)의 공동체 아카이브가 본격화되면서 시작되었다. 가령, 2004년에 시작된 빅토리아 주의 주립 아카이브와 쿠리(Koorie) 원주민 공동체, 그리고 모나쉬 대학의 학제 간 프로젝트인 ‘신뢰와 기술 프로제트(Trust and Technology project)’는 기존의 백인 중심이 아닌 쿠리 원주민 공동체의 요구에 기반한 원주민 공동체 아카이브의 구축을 표방했다. 이 프로젝트는 원주민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분류 및 기술영역에 대한 논의를 넘어 원주민들 스스로가 생산한 기록의 소유권 체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낳았다. 원주민 아카이브에서 원주민들이 권리를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는 기록의 주체인 원주민들이 기록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백인 관료 중심 소유권 체제로부터의 소외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더불어 관료 조직이나 저작자가 단독으로 가지는 기록의 소유권이 원주민들을 기록에 대한 접근권이나 평가에 있어서도 소외시킨다고 봤다. 결국, 이로부터 원주민의 기록 소유권 회복 그리고 백인 관료나 저작자뿐만 아니라 호주 원주민을 원주민 관련 기록의 소유권자로 인정하는 기록의 ‘공동 소유권’ 체계가 그 대안으로 제시됐다.
호주 원주민 공동체 아카이브에서 원주민의 기록 주권이 동등하게 인정된 것처럼, 이제 우리도 국내 공동체 아카이브의 위상과 이에 대한 평가에서 좀 더 진취적인 기록 주권의 개념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궁극의 ‘기록 민주주의’와 지역 공동체의 기록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정부와 지자체, 관련 기관들의 상호 호혜적 관계 구축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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