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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안전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확장하자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새소리가 들려오는 숲속을 걷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왜 동물들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 않을까? 사실은 그들도 감염이 되지만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집단들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유지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개체수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가깝다고 하는 침팬지들도 100마리를 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인간은 문명과 도시가 발생한 이후 수십만 명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 서식해왔고, 이제는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 속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 결과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곳에 곧바로 영향을 준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조건 속에서 일어났다. 효율적 생산과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구축된 거대한 상호연결망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인류는 여러 가지 재난을 경험해왔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헌신과 돌봄, 자발적인 상호부조, 영웅적인 희생정신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레베카 솔닛은 그것을 가리켜 ‘재난 유토피아’라고 했다. 그런데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그런 위대함이 발현되는 데 너무 제약이 많다.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기가 어렵다. 치료가 최우선인 상황에서 의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면서 기피와 격리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스스로 위축되고 숨어들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강조되는 생활 수칙은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문명사적 대재앙을 맞은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全)사회적인 협력을 절박하게 요구받고 있는데, 협력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접촉을 피하고 서로를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다. 그 결과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경제적인 차원에서 중소상공인 및 자영업과 항공, 숙박, 여행 등의 분야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제조업도 한국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치명타를 입는다. 다른 한편 심리적인 차원에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차단되면서 일상이 극심하게 침체되고, 집에서 가사와 돌봄 노동에 시달리는 주부들의 곤경은 엄청나다.

머물 장소, 할 일, 사람

비대면의 세계가 확대되는 가운데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만일 인터넷이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팬데믹이 왔다면 교육에서 산업 그리고 우리의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타격은 훨씬 컸을 것이다. 사이버 세계가 활짝 열려 있고, 그곳에는 바이러스가 절대로 침투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물리적으로 격리되고 고립된 가운데 영상을 소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음울해지기 쉽다. 타인과의 인격적인 교류가 끊긴 채 욕망을 부추기는 이미지들만 하염없이 서핑하고 있다 보면 불행 감각이 날카로워지기 때문이다. 돈벌이든 인기든 ‘잘 나가는’ 몇몇 사람들에 눈길이 쏠리면서, 이 세상에 나만 뒤처져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그 광활하고 현란한 공간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는 너무 어렵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는 건강한 일상을 꾸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갈 곳 또는 마음 편하게 머물 장소가 있어야 한다. 둘째, 돈벌이든 가사 노동이나 돌봄이든 취미 활동이든 공부든 적절한 수준에서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셋째,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적절한 균형으로 배합되어 영위될 때 삶이 온전해질 수 있다.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하거나 문제가 되는지는 사람 또는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타인과의 관계는 행복의 결정적인 변수가 되고, 특히 비대면 사회에서 이 부분에서 어려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일과 공부에 매진하느라 소통하는 기술이나 능력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그 약한 고리가 재난으로 일상에 제동이 걸리면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고립감과 우울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식구들과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면서 갈등이 깊어진 가정이 적지 않다.

오래 이어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동안 우리가 맺어온 사회적 관계들을 돌아보는 쉼표가 될 수 있다. 학연이나 지연을 따라 모임을 만들고,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카톡방을 만들어 교류하고…, 그러한 행위들 속에 깃든 마음의 풍경은 무엇이었는가. 오가는 대화들은 삶의 생생한 표현이었는가, 아니면 소란한 세상사의 증폭 또는 누군가에 대한 뒷담화가 주를 이루었는가. 서로를 이어주는 고리는 관계 자체에 대한 소망인가, 아니면 이해관계나 권력관계인가.
관계 속에서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언어를 통해 존재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통해 일깨워주었듯이,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신호의 교환이나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리얼리티 자체를 생성해가는 행위다. 내가 너를 어떻게 불러주는가. 그것은 곧 나 자신을 어떻게 호명하는가와 맞물려 있다. 바로 거기에서 이야기가 빚어진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은 경험을 의미화하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핵심인데, 그 속성은 유전자 시스템과 달리 다양하고 가변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똑같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전혀 다른 스토리를 지어낼 수 있다. 또한 시간이 경과하면서 과거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풀어낼 수 있다.

고독의 시간에 배우는 ‘독립’ 훈련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의 정체성은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타인과 나눌 수 있을 때 관계는 깊고 넓어진다. 서로의 이야기가 들려질 수 있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삶을 펼쳐낼 수 있고, 이야기가 확장되는 가운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조 모임에서는 멤버들이 자신이 어떻게 굴레에서 벗어났는지를 증언하면서 서로의 용기를 북돋는다.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공간에서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자각하면서 변화의 출구를 탐색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안전함이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자신의 지질하고 못난 모습을 애써 감출 필요가 없고, 학력이나 수입, 아파트 평수나 자녀의 성적 등으로 우쭐대거나 주눅들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면 된다. 삶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달으면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상처를 받고 이런저런 고통에 시달리며 마음이 부서진다. 그런데 마음이 깨지는 모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뉘는데, 파커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이렇게 설파한다.

“마음이 부서져 흩어질 때(broken apart), 그것은 폭력의 씨앗을 뿌린다. 수천 개의 사금파리로 폭발하면서 그 파편이 적에게 날아간다. 그렇게 부서진 마음은 해결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자신과 타인을 계속 괴롭힌다. 마음이 부드러울 때,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는 더 커다란 능력으로 부서져 열릴 수(broken open) 있다. 그것은 치유의 근원이 되어 타자와의 공감을 심화하고 그들에게 이르는 능력을 확장시킨다.”

인간이 폭력으로 치닫는 것은 고통을 다루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파머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책에서 말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렌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사소한 것에 화를 내고 공격적인 언사를 퍼붓는 사람들은 삶에서 겪어온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타인에 대한 증오로 투사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고통을 고통으로 전가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연민의 마음이 열려야 한다. 고통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절실하다.

방역을 위한 멈춤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고립되고 분절되어간다. 마음을 추스르고 사회를 복원하는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파편화된 ‘점’들을 ‘선’으로 잇고, 그것을 다시 ‘면’으로 조립하는 도전이 다양하게 이뤄져야 한다. 비대면 상황에서 널리 보급된 줌(zoom) 같은 미디어도 활용하기에 따라 참신한 실험의 공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려면 무엇이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잘 분별해야 한다. 인맥의 범위나 소통의 빈도에 집착하지 않고 관계의 밀도를 충실하게 다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리모델링을 위해서 점검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이다. 내면의 중심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기 중심성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고립’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을 훈련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도 한결 충실해진다. 자족의 넉넉함과 환대의 너그러움으로 상대방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잠시 멈춰선 지금, 우리 안에서 고요함을 되찾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보자. 스리랑카의 철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말을 되새겨본다.

“존재를 멈추지 않고서는 어떤 생명도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승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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