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별보기

<칼럼/서평> <정책/이슈>
삶의 회복을 위한 정책은 가능한가
‘분절화된 정책’에서 ‘절합하는 정책’으로
고길섶 문화비평가
1

8월의 어느날, 지역의 미술계 원로 한 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문화관광재단에서 공공미술 사업을 공모한다고 며칠 전 전화가 왔다며 여러 명이 팀을 이뤄 수행하는 사업으로 3-4일 내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되는 상황인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사업계획서 작성 등 행정업무를 담당해주되 인건비는 작가와 동일하게 배분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미술인들 먹여 살리는 일자리 창출사업임을 강조했다. 나는 다른 일 핑계로 거절했다. 적당한 장소에 작품 설치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원로작가는 공공미술 개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고, 심지어 공공미술을 이해하려는 태도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문화관광재단에서 제안했다는 공공미술 사업 자체에 대해서 선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도시재생사업 자기네 마을 위원장도 맡고 있다.

이 사례는 단순화하자면 단지 원로작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원로작가 개인의 인식틀은 다른 한편으로 ‘분절화된 정책’ 혹은 ‘정책의 분절화’라는 키워드로 들여보자면 일정 정도 지역 사회의 보편적 인식틀과 무관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질문을 던져본다.

image지방의 한 도로가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

2

분절화된 정책들은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나는 이 글에서 논의의 필요상 정부의 정책을 ‘분절의 정책’(정책의 분절화)과 ‘절합의 정책’(정책의 절합)으로 나누어 짚어보려 한다. 분절(分節)이란 사물을 마디마디로 나눔을 뜻하고, 절합(節合)이란 나눔과 동시에 이음을 뜻한다. 따라서 분절의 정책이란 영역별로 분할하는 정책이며, 절합의 정책이란 분할된 영역들을 접합시키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사실 절합이라는 말 속에 분절의 의미가 있으므로 분절의 대립어로는 절합이 아니라 접합(接合)이라는 말이 타당하다. 분절과 접합이라는 대립된 개념이 있고 그 동시성의 개념으로 절합이라는 말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합이라는 개념적 사유가 필요한 것은 분절의 정책의 대안으로 접합의 정책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절합의 정책을 사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접합은 여러 개가 기계적 기능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나, 절합은 분절과 접합의 동시성을 사유하며 그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앞의 원로작가 사례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원로작가에게는 분절의 정책 효과가 하나의 ‘집합인격’으로 녹아 있다. (집합인격? 이 글을 쓰다보니 필요상 만들어진 신조어다. 여러 가지 특성들이 한 주체에 포진되어 나타나는 인격적 성향 정도로 이해하자). 이는 오늘 현재의 상태인 공시태적 측면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는 생애사적·현대사적 경험의 통시태적 측면 모두를 포함해서다. 분절이란 영역 간 격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역사적 맥락과의 단절까지를 포함하며 시간적, 역사적 관여의 제거라는 전체 흐름을 읽어야 할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로작가에게 나타나는 분절의 정책 효과는 첫째, 문화나 예술의 개념을 장르적 역할로 한정하고 매우 좁은 의미의 낡은 방식으로 사용하며, 또한 더 이상 개념의 진화가 작동하지 않은 채 멈춰버린 고정틀에 갇혀 있고 그것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2년 전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몇 시간 동안의 언쟁 과정에서 확인된 바다. 삶의 문제로서의 문화는 보이지 않으며 예술이란 것도 오로지 일정한 자격을 획득한 예술가들이 하는 작품으로만 이해한다. 확장된 개념을 배제하는 순혈주의적 개념의 고집으로, 말하자면 개념의 분절이다. 이는 그가 경험해온 제도적, 정책적 사회효과의 현대사와 마주쳐 온 생애사의 한 인식 풍경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예술사회에서의 인식이나 예술정책은 장르세계에 갇힌, 대단히 분절적이었다. 그 사회효과는 예술활동이란 예술가들만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고급진’ 활동으로 인식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문화담론이 부각되면서 문화의 개념이나 예술활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더 탈장르화하는 절합적인 시선으로 확장되고 정책적으로 반영된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퇴행하여 과거의 습성이 괴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련하여 둘째, 경험 공간의 분절 문제가 이어진다. 원로작가가 사는 세계는 지역 사회이며 시골이다. 그는 토박이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경험 공간은 지역 사회에 한정되어 있다. 우물 안 개구리로 갇힌 자기 고집의 세계를 예술가로서의 미덕이자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공간을 넘어서며 탈영토화하고 공간들을 횡단하는 사유의 예술적 자유로움을 느끼기 어렵고, 한국 사회의 보편적 시대정신이나 사회성을 갖는 작가정신이라곤 거의 제로다. 굳이 그런 화두를 던지지 않더라도, 원로작가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 사회의 서예계에서 일어났다는 한 사례가 떠오른다. 서예계의 대표급 인물을 능가하는 서예가가 지역 사회에 이주해 들어 왔으나 냉대받다 결국 다시 지역을 떠나고 말았다. 경험 공간의 분절 효과는 토박이 기득권이랄까, 철저하게 왜곡된 영토성의 주체로 등장하며, 크든 작든 지역 사회에 지배적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셋째, 시간의 분절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시간의 문제는 통시태성 즉 역사성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역사적 맥락이나 배경, 특이성, 시대정신, 진정성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분절한다는 것이다. 혹은 역사적 기의(記意)는 사라지고 현상적 기표(記標)만 남는다. 이를테면 틀에 박힌 생가(生家) 류의 ‘전봉준 생가’는 존재할지언정 ‘전봉준’도 없고 ‘동학혁명’도 없다. ‘동학혁명’이라는 기표는 존재할지언정 기의 즉 오늘의 역사적 의미는 없다. 친일 작가이자 친독재작가인 서정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없고 서정주의 시, 미당문학관만 존재한다. 원로작가는 최근 몇 년 동안 마을벽화 작업을 많이 해왔다. 벽화 작업에서 공공미술에 대한 개념이나 마을의 공간적 장소성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역사성 따위들도 모두 분절되어 사라지게 했다. 오로지 남은 것은 마을의 삶과는 맥락이 없는, 멀건 건더기 같은 사생화 그림들뿐이었다.

중요하게는 그의 구도 속에는 장소성과 관련된 마을의 주민들 즉 마을에서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벽화 작업에 대한 주체적 참여나 의사표현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을 단지 ‘구경꾼’들로 만들었다. 마을벽화를 작가들만의 작품세계여야 하는 것으로 각인시켜주었다. 여기서 넷째, 주체의 분절 문제가 나온다. 지역 사회 구성원들, 보통의 주민들은 문화예술 활동의 세계-내-주체로 배치되지 못한다. 그저 대상화되는 감상자일 뿐이다. 게다가 원로작가는 토박이이다. 심지어는 귀농귀촌자 즉 외부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에게 주는 혜택이 크다며 본토박이들이 역차별당한다고 생각한다. 복지회관에서 운영하는 한글교실 프로그램과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는 한글교실 프로그램의 방법론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문해력이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한다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전자는 한글 문맹의 타파가 목표지만, 후자는 삶의 과정 속에서 생애사의 단락과 연결하여 한글 학습을 매개로 잊혀진 자기표현이나 감수성의 회복 및 공감 문제로 접근한다. 주체가 분절되어 사라지게 하는 효과는 크게는 문화예술영역이 삶의 과정으로 절합되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예술가와 비예술가인 보통 사람들의 이분법적 격리가 위계화되며 지역 문화예술판의 생태계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공공미술 사업을 대하는 원로작가의 태도는 개념의 분절, 경험 공간의 분절, 역사성의 분절, 주체의 분절 등이 상호작용으로 얽혀진 집합분절적 인식틀의 효과라 할 수 있다. 공공미술에 대한 개념의 부재, 우물 안 개구리마냥 닫힌 영토성의 기득권화 혹은 장소성 인식의 부재, 삶의 역사성 의식의 부재, 행위자 주체 구성에서의 비예술가 배제, 이들 모두는 얽혀져 있다. 절합되지 않는 분절화는 제거, 배제, 망각, 부인, 소외, 침묵, 부재, 비현실 따위들로 거듭되고 습성화되며 의사소통과 결정구조에 있어 의식적, 무의식적 언명의 체계로 작동한다. 요컨대 생애사를 통해 집합분절적 인식틀에 갇혀온 원로작가인 화자는 타자들과의 담화구조 관계에서 자신의 입장 중심으로 강경하거나 완곡하거나 분노하거나 유연하거나 하는 인간적 성향이 표출되는 집합인격으로 나타난다.

3

세상의 사물과 사회의 구성물들은 무수하고 다양하게 분절되어 있고 동시에 끊임없이 분절된다. 그러나 분절된 채 존재하지는 않는다. 분절됨과 동시에 절합되어 있거나 절합한다.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도 전기 에너지와 인간의 손이 연결되어야만 의미 있는 기계로 작동하기 시작하며 그 숱한 신호체계를 거쳐 온라인 세계로 이어진다. 컴퓨터라는 기계 그 몸체만으로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다. 분절이라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컴퓨터 제조업체는 이미 분절되어 하나의 완성품을 생산한다. 컴퓨터 기계 그 자체도 수많은 부품들로 분절되어 있으며 완성품은 그 접합체이다. 인간의 삶의 관계 혹은 정부 정책의 지평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분절된 영역을 고립시켜 그 영역만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폐쇄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분절의 정책은 칸막이라는 폐쇄성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분절화된 정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기원과 함께 한다. 예컨대 언어의 획일화를 초래한 표준어정책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규정한 표준말의 정의로부터 지방어를 분절하고 무시-배제한 결과다. 언중(言衆)은 자신의 삶과 성장환경이 어우러지는 토속어 혹은 지방어들을 버림으로써 규범화된 시민권을 얻어야 했다. 교육정책은 가령 개개인 고유의 음악적 리토르넬로를 파탄시키고 서양 기보법의 원리로 훈육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 정책이 부과한 사고 및 사상의 분절-적대화라는 극단의 질서 즉 흑백논리와 이분법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의 장기지속이다.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적대적 대립은 오늘에 있어 더욱 악랄하게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한국 사회의 근대적 기획의 전략적 사회정책 혹은 국가정책으로부터 비롯되어 왔다. 이 또한 전 세계가 서구화되는 근대의 문을 연 데카르트의 철학적 분절성(몸과 정신의 분리라는 이분법)에 기원한다. 이러한 언급들은 분절의 정책 몇몇 사례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수하게 증폭되면서 씨줄 없는 날줄이거나 날줄 없는 씨줄로 삶의 시간들에 그물을 쳐왔다. 그 결과는 분절된 주체의 근대적 탄생이며 지배이고 집합인격으로 자기증폭하는 욕망이자 세계관이 되어 왔다. 원로작가는 이러한 그물망의 한 그물코일 뿐이다.

하향식으로 내려오는 분절의 정책들은 현대사를 관통해온 국가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초에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와 교육법에 명시된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은 절합된 주체를 지향했음에도 제각각 영역에서의 정책의 설계와 집행은 그와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명분과 실체가 극도로 모순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하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도하는 농촌의 마을사업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마을기본법을 입법하려 해도 국토교통부가 부처이기주의에 따라 그것을 방해한다고 하니 분절의 정책은 관료주의의 폐해이기도 함을 보여주고 있다. 일정한 공간에서는 절합되어야 할 마을만들기와 도시재생은 따로국밥으로 땅따먹기하고 있다.
원로작가가 나에게 참여를 제안했던 공공미술 사업이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동네 미술] 공모사업이다. 이 사업은 원로작가에게 상징적으로 집합인격화된 측면과는 다른 결로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분절의 정책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성 싶다.
이 사업은 코로나19에 대응하여 한국판 뉴딜사업의 일종으로, 전국의 지자체들이 매칭하여 시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예산 규모로 보면 1,000억원 가량되는 전례 없는 대규모 사업이다. 1지자체에 4억원 규모이다. 8월 중순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서울, 부산, 광주 등 3개권역 순회를 하며 공공미술의 개론, 장소성 및 공동체성 주제로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공공미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 했다. 게다가 심사기준을 보면 작품성과 장소와의 적합성 등 공공미술 개념에 걸맞는 절합적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지자체 4억원 규모로 37명의 참여 작가를 원하면서도 참여 작가들은 ‘미술인’ 중심이다. 문화예술인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미술인 일자리 창출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분절-배제를 전제로 하는 사업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보다도 1-2주만에 공모사업에 응해야 하고, 5개월 정도의 기간에 사업을 종료해야 하는 졸속행정의 전범사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기간 준비-시행이라는 절차 속에서 시간의 분절-시간 쫓김-배제-졸속을 불가피하게 강제하는 것이고, 따라서 충분하게 녹여내야 할 장소성에 있어서 분절-부재로 인한 몰장소성의 작동 역시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중앙 발주처에서 말단 현장으로 사업이 왔을 때는, 원로작가가 나에게 제안하며 던진 담화구조에서 드러난 것처럼, 공공미술의 개념은 이미 분절-실종되고 만다. 내년 1월 공공미술 작품들은 주인 잃은 형해화된 모습으로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image삶의 회복을 위한 정책의 전환은 가능할까

4

정책은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공감과 진화를 위해 소통 과정으로서 정책들이 결정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구성과 주체 구성의 전략적 맥락에서 크고 작은 그림들 속에서 정책이 입안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정신과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은 순전히 전시용이고 부처이기주의, 관료주의, 처세술과 출세욕, 칸막이, 권력의 욕망, 수직 위계적 질서, 이분법적 흑백논리, 순수주의, 엘리트주의, 선민의식, 전문가주의, 인맥, 지역주의, 배제와 차별, 규범주의 및 표준화, 법과 규정 등 온갖 것들로 표현되는 분절의 분절들의 중층적이고 집합화된 정책으로 현시된다. 역사적이고 누적적으로 현시되는 분절화 정책의 효과는 주권재민의 민본사상을 언급하기조차 민망하게 인간의 자유로운 삶의 가치와 영혼을 망가뜨린다. 사회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고 사회 구성원들을 위협하고 처세에 능한 주체로 변질시킨다. 그것은 자명한 진리가 되고 상식이 되며 도리와 예의가 된다. 인간의 오래된 역사로 볼 때 아주 짧은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예외적인 것에 불과함에도.

위로부터의 정책의 분절화는 이미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습성으로 작동한다. 설령 의기투합하여 선구적으로 정책의 절합화를 시도한다 해도 최말단 행정에 내려오면 지자체 규정 혹은 자기 검열하는 실무자의 규범화된 분절화 논리에 의해 정책 집행은 때로는 더 경직되고 더 강화되기 일쑤다.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위탁사업이든 단순사업이든 그 사업의 센터장이나 책임자조차도 말단 공무원에 순종하는 마름이 되다시피 한다. 규정 혹은 지침이라는 미명 하에 참으로 친절하게도 예산 집행의 하나하나를 검열하거나 통제한다. 그 규정이나 지침은 분절화되는 정책의 미시적 경로일 뿐이다. 말이 협력이지 센터는 말단 공무원의 하부조직이다. 분절의 미시적 경로들은 주종의 형태 하에서 인간성 없는 인격적 관계로 포장되며, 시행자의 입장에서는 더러워도 받아들여야 하는 참담한 신세로 전락하고, 최종적으로는 무감각해야 생존적으로 버틸 수 있다.

분절의 정책 자체에 대한 비판적 화두보다도 우회하여 분절의 정책이 초래해 온 사회 및 대중 효과를 화두로 던지기 위해 원로작가의 사례를 길게 할애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위로부터의 정책의 분절화는 얼키설키되는 그 반복의 역사 속에서 지역 사회 기층의 구성원들 스스로의 욕망체계로 무의식화되어 자리잡아왔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분절적 지향은 기층민들 스스로 욕망하고 자기 자존심의 영역이자 권력화의 기제이며 처세술 호은 생존론적 상식이 되어버렸으며, 그것은 때로는 ‘뇌피셜’의 비만증으로 타자들과 대면한다. 그렇기에 사실 순응주의자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분절화된 구도 속에서 인정투쟁하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자기 목소리의 실체다. 원로작가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지역민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지역 사회의 적폐, 문화예술판의 낡은 습성, 원로들과 같은 기성세대에 이어 청년세대들도 닮아가는 데칼코마니, 이와 같은 악순환 구조에서 탈분절화되는 문화예술 정책의 ‘현타’(현실자각타임)는 결코 오지 않을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희망을 건다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전향적 정책들이 절합적 시도를 할 경우 그 성공을 위해 중간단계 지자체를 거치지 않고 수행단체와 직접 교통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분절화된 욕망체계로 길들여진 지역 주체들의 재교육 시스템은 필수다. 삶의 가치와 그 회복을 위한 인간 존재의 핵심은 국가도 지자체도 시장도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실제로 관계를 맺는 사회에 있고 그 사회의 절합적 구성에 있다. 정책은 이슈에 따른 절합적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이냐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image정책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