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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영남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조교수

저는 몇 해 전부터 ‘역사쓰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 둘러 모여 앉아 6개월 내외의 시간 동안 자기가 살아온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며 [나의 역사]를 쓰는 것입니다. 같이 썼던 동무들은 10대 고등학생들, 20대 대학생들, 할머니들, 농부들, 자살 유족들, 탈시설장애인들(장애시설에서 나와 지역에서 거주하는 장애인들), 미주 한인동포들,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쓴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로 삶의 전환기에서 쓰는 동무들은 직장을 옮기기도 하였지만, 멀리서보면 동무의 일상은 아무 일 없던 듯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는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나가 되었으며, 지금의 나로 산다는 게 왜 이리도 간단치 않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쓰는 시간 동안, 동무들은 의외로 쓰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누구인지 새로운 관점을 하나 얻게 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는 효과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에서 오는 특별함 때문일 겁니다.
인간에게 이야기는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자기 삶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연결성에서 유대감, 연대감, 지지가 나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은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자신과 관계 맺는 상대를 말합니다. 타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존재이기에 도덕의 원천이 됩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자기 이야기는 상담실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같이 되짚어 가면서,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자각을 하는 것은 낯선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내 삶의 현미경이 되어줍니다.

코로나가 닥쳐와 새로운 삶을 요구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타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설적으로 들릴 줄 압니다. 비현실적일 수도 있을 겁니다. 모여 앉는다는 것은 감염의 위험이 있을 뿐더러, 이번이 기폭제가 되어 비대면 문화가 더 확산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향후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는 이런 추세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우리에게 온 것은 적자생존의 극심한 경쟁문화를 타고 온 것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타인은 괜찮은 관계를 맺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무시해야 하거나, 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은 50%를 넘어섰고, 아웃소싱 사업문화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타인을 편의적으로 사용하여 일을 처리하는 식입니다. 인구의 상당수는 아파트나 빌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나와 만나는 상대는 내 삶으로 받아들여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기보다는 이용과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이 경우,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 많은 힘을 가진 쪽의 일방적 지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누구라도 밀폐된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기침이라도 하게 되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때 옆에 있는 사람은 전염병 감염원이 되고 공공의 적이 됩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일시적인 상황이라는 것보다는 조금 극단적인 것일 뿐, 패턴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배제하고 적대시하는 패턴이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서글퍼집니다.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는 우리와 만나는 누군가에게 그 존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며 그 사람을 한 사람의 인격으로 존중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직장에서, 거리에서,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심지어 여행지에서조차 옆에 있는 사람은 불신의 대상, 통제의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에게 눈길을 주기보다는, 눈길을 의식적으로 피함으로써 “너하고 상대하고 싶지 않아, 너하고 상대할 일은 없어” 하는 메시지를 발신합니다. 양보와 배려는 바보의 행동이 된 것 같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극단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비판 대신 극단적인 공격이 먼저인 것이 사회적 현실입니다.
UN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취약한 분야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첫째, 사회적 관계(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의 취약성. 둘째,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선택의 빈곤. 개개인이 고유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점, 그것이 존중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합니다. 눈길을 피한 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많은 것이 일방적으로 흘러갑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한 원인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구태여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감’하는 문화의 부재입니다. 상대방을 그 존재로서 궁금해하고,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왜 그런 것인지 물어보는 것,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들어보는 것, 이런 공감의 문화가 빈약한 데서 문제는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역사쓰기 모임은 자기역사를 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역사를 듣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만약 6명이 참여한다면 그 시간 동안 자기 외의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6개월 동안 찬찬히, 깊숙하게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자기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역사를 들어야 합니다. 어떤 존재에 대한 존중감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에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쓰기 모임은 더 큰 흐름인 이야기 작업에 속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여러 명이 모여 앉아 개인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제법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이야기모임을 소개해본다면, [홍동 허스토리], [마이데이 맘풀이, [비폭력대화 모임] 등 입니다. 홍동 허스토리는 농촌 여성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마이데이 맘풀이는 국가폭력에 의해 부당하게 고문을 당한 고문 피해자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비폭력대화 모임은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말에 들어 있는 폭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평화로 전환하기 위한 대화 모임입니다.

각각의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여러 명이 모여 둘러앉는다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국가폭력에 의해 고문을 당하면서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수록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만큼 연대하고 지지하는 힘이 생깁니다. 비폭력대화의 경우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에 스며 있는 폭력에 대한 성찰과 이를 개선해나가기 위한 실천적인 운동입니다. 비폭력대화 모임을 통해 자기 안의 욕구를 파악해서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상대방의 욕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타인을 비판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논쟁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논쟁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쟁은 이야기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주목하며 귀 기울이는 대화에서 비로소 이야기는 나옵니다. 대화와 논쟁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논쟁 대화
자기 관점을 부각시키고 상대 관점을 폄하한다.
*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자신의 관점은 유보한다.
* 상대를 배우는 것이 목적
상대의 주장에서 결함을 찾기 위해 듣는다. 경험이 그 사람 신념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듣는다.
상대 경험이 왜곡/타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상대 경험이 진실하며 타당한 것으로 수용한다.
자기 의견을 고수하려는 강한 의지 자신의 이해를 넓히려는 태도
상대의 동기와 입장에 대한 추측을 바탕으로 말한다. 자신이 이해한 것과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다.
참여자들은 서로 반대 입장을 취한다.
상대가 옳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참여자들은 공통의 이해를 위해 협력한다.
상대방이 겁을 먹게끔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을 사용한다. 경험이나 믿음의 강렬함을 전달하기 위해 분노와 슬픔과 같은 격한 감정을 사용한다.
* 출처: 리샤 셔크, 『공동체를 세우는 대화 기술』, 2014.

 

대화와 논쟁은 정서가 다릅니다. 첫째, 논쟁의 정서는 효율인데 반해 대화의 정서는 사랑입니다. 둘째, 출현하는 말이 다릅니다. 논쟁에서 상대의 언어는 반박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기 언어를 강화하는 식으로 상대를 공략합니다.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할 때는 각자 자기 세계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강화하게 됩니다. 반면, 대화는 상대의 언어를 수용해서 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수용하려면 상대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화는 천천히 상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분을 쌓는 시간입니다. 셋째, 양자는 목적하는 바도 다르고 효과도 다릅니다. 논쟁의 목적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승자가 되는 것이 논쟁의 목표입니다. 반면, 대화의 목적은 상대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회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갈등을 관리하는 건강한 논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에 필요한 논쟁문화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화의 문을 여는 것은 윤리적 충동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이런 윤리적 질문이 있어야 배움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를 가르치려 할 뿐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대는 무가치하고 한심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거나 상대가 나를 공격하는 태도를 보이면 논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배움은 윤리적 상황에 직면하는 것, 모르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삶을 탐구하는 것, 그 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가치에 의심을 품고 타인의 삶으로 걸어가는 것, 혼자서 사색하기보다는 타인의 삶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배움은 상대가 누구이든 그 사람을 동무(대등한 관계)로 삼을 때 가능할 것 같습니다.
대화는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화하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은 유보한 후, 그 사람이 말하는 경험이 그 사람의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듣게 됩니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존중하고 습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상보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문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상의 곳곳에서 다양한 대화가 있다면,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겁니다. 대화의 시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굵직한 담론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굵직한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며 이럴 때일수록 시대를 전환하는 거시담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인격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듣는 사람이 있어야 말하는 사람이 가능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전에 먼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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