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별보기

<칼럼/서평> <정책/이슈>
코뮌으로 만나자
황민호 옥천신문 상임이사

없다. 존재하지만 없다. 농촌 지역이 그러하다. 지역도 나름 은연중에 ‘등급’이 나눠지는데 군(郡)단위 농촌 지역이 가장 관심이 덜하고 그만큼 드러나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언론과 교육이다. 언론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가를 현현하게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교육은 어떤 사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준다. 국가적 이슈를 논하는 서울 언론과 국정교과서에는 지역 농촌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아예 무관심이다.

교육과 언론은 이 나라의 권력-자본과 함께 시대의 동질성과 획일화를 유지시켜주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화(和)’와 ‘불화(不和)’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사고를 유지시켜준다. 힘 있는 자들이 ‘희구’하는 안정을 꾀하도록 도움을 준다. 다수의 삶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쉽게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힘들다. 무지와 왜곡 속에 한참 경쟁력을 잃고 비껴나 있는 것들은 존재감을 잃어간다. 점차 사장되어가고 있고, 그 흐름에 맞게 지워져가고 있다. 희소성으로 잠깐잠깐 곁다리로 다뤄지고, 대상화되어 다수를 위해 이용 소비하는 것으로 전락된 지 오래다.
방송 뉴스에서 다룰 시간을 점유하지 못했고, 신문 지면에서 머물만한 공간을 찾지 못했다. 광활한 인터넷의 공간에서조차 특별한 검색어를 입력하는 수고로움을 보태지 않는다면 노출될 기회가 거의 없다. 간혹 ‘힙’하게 농촌 관광, 미모의 청년농부, 특별한 마을, 대농-부농, 농촌 체험, 농특산물로 언급만 될 뿐 그들은 지워지고 있다. 

도시에서 농촌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생산기지에 불과하고, 홈플러스나 이마트, 코스트코 등에 진열되는 농산물 원산지 표기일 뿐이다. 단양 마늘, 무안 양파, 청양 고추, 옥천 포도, 공주 밤 등 각 지역의 농특산물과 연계되어 지역을 기억할 뿐 지역 농촌은 철저히 지워져 있다. 외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뜸하지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해외 사진을 포스팅하는 것만큼도 등장하지 않는다. 쪽수로 움직이는 거창한 ‘선거 민주주의’에서도 불과 기백만 명 되는 농민의 목소리가 담겨질 개연성은 적다.
언론, 자본, 권력이 서울 도심 한가운데 또아리 틀고 있고 그 장벽을 수도권 도시들이 꽁꽁 에워싸고 있는데 농촌과 농업, 농민의 이야기가 전달될 틈이 없을 것이다. 그들 필요에 맞게 가공되고 취사선택하여 틈새뉴스로 간혹 소개되어질 뿐, 그들에게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과 대형마트의 농산물 진열장이 아마도 농촌의 전부일지 모른다. 그리고 대부분은 관광과 경관(景觀)으로 소비된다. 드라이브 코스로 논과 밭이 보일 뿐이다. 특이한 계단논이 있으면 사진 한번 찍고, 커다란 저수지가 있으면 한 바퀴 휘 돌아볼 뿐이다. 

그것은 미디어에 의해 재생되고 굳어진다. 교육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 도시에서 출퇴근 하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은 농촌을 잘 모른다. 교과 부문도 그렇게 짜여진다. 입시 위주로 짜여 있는 교육과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농업, 농촌, 농민, 그리고 지역이 들어갈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나마 있는 지역 교과도 틀린 정보 일색이다. 정규 교과과정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하는 친구들이 농업, 농촌, 농민에 대해 무지하고, 지역을 떠나려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부모들은 어렵고 힘든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마음이 작동하고, 자식들도 어떻게 살아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체득한다. 

지역 농촌을 고사시키는 음모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국가와 자본은 공모하고 있다. 지역 농촌을 어떻게 고사시킬 것인가에 대해…. 그런 음험한 음모는 정교하게 진행 중이다. 굳이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어떤 흐름이 되어버렸으니까 티나지 않게 망가트리도록 연약한 부분을 툭툭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정부와 대기업, 언론들은 ‘스마트농업’을 ‘긍정적인’ 가치로 위장하며 미래 농업의 방향이라고 툭툭 간을 본다. 스마트 농업에 묘하게 청년을 배치시키며 과학기술과 친환경을 접목한 미래농업이라는 이미지를 곳곳에 심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신도시의 학교설립 개연성을 농촌의 작은 학교와 연계시켜 광역 지자체별로 ‘딜’하라고 은근한 압박을 한다. 하나 폐교 시켜야 하나 설립시켜준다는 것으로 말이다. 통합하면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주고, 중학교의 경우 통합 기숙형 중학교로 만들어준다는 당근을 하나씩 밀어 넣는다. 

아직 일말이나마 남아 있는 농업, 농촌, 농민에 대한 어떤 정서적 연민(그것은 아직도 시골 출신 위정자와 자본가들을 비롯해 많은 도시민들이 아직 향유하고 있는 어떤 희미한 향수)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버티고 있을 뿐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이마저도 없어질 것이다. 급격하게. 
농촌 폐교는 아마 그런 급발진의 전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야 1면(面) 1교(校)를 유지하고 있지만, 학생수가 10명 미만이 되면 분교가 되고, 분교가 되면 더 이상 예산투자가 안 되고 폐교를 하는 수순에 들어서게 된다. 사실 분교 각하는 정서적 완충지대에 불과하다. 폐교가 되면 그 곳에 더 이상 학교가 세워지기 힘들고 가뜩이나 고령화 비율이 높은 농촌 면 지역은 아이를 볼 수 없게 된다. 단지 아이만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젊은 세대들도 동시에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

농촌의 기본 단위인 면(面)부터 붕괴되고 있다

농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면이다. 면은 지리적, 정서적 일체감이 그나마 남아 있는 공간이다. 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농협, 파출소, 소방대, 우체국, 면사무소, 학교 등을 공유하면서 관계가 만들어지고,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오일장이 열렸던 공간으로 서로 물물교환이나 거래가 이뤄지면서 지역 공동체의 축적된 역사가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작금의 면 단위는 통합되고 없어지면서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행정구역이 생활권을 일치시키지 않으면서 생활권과 행정구역이 이원화된 면 지역일수록, 그리고 인구가 적은 과소 지역일 수록 기관이 통폐합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만큼 비일비재하다. 소방서는 아예 면 지역에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의용소방대가 배치된 곳이 적지 않으며, 농협도 통합되고, 파출소도 통합된 곳이 많다. 통폐합에 가장 민감한 정서의 촉을 갖고 있는 곳은 학교이다. 학교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고 학교를 만들 당시부터 주민들이 땅을 희사했거나 대부분 졸업생이 주민이기 때문에 학생 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학교가 갖고 있는 상징성은 참 크다. 학교의 폐교 결정은 재생산과 지속 가능성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째깍째깍 점점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무뎌진 감수성, 농촌의 피폐에 일조한다

이제 원산지는 무색해졌다. 수입이건 로컬이건 마트에 농산물이 저렴한 가격에 제대로 진열만 되어 있다면 농업, 농촌, 농민이 어찌됐건 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이래저래 지출하는 비용들이 많은데 농산물 가격조차 오른다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사실 이 나라의 기층 민중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십 년째 오르지 않는 쌀값과 농산물 가격이다. 정부는 주민들의 삶을 볼모로 잡고 대기업 식품가공업의 배를 불려주면서 사실상 농민들의 삶을 착취하고 있다. 농산물만 보고 농민들의 삶을 보지 않는다면, 농산물 값만 보고 농산물의 가치를 보지 못한다면, 이 나라 식량자급체계는 금방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운 농민, 농업, 농촌을 살려보자는 타자화된 문제가 아니라 당장 우리의 식량 자급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리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고리를 언론과 교육이 다 끊어 놓았기 때문에 마트에서 식탁의 거리, 온라인 쇼핑을 하는 배달체계와 밥상과의 거리는 무지하게 가까워졌지만, 농촌·농업에서의 거리는 아예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고 있다.

멀어지다보니 인지하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지역 농촌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면서 마치 딴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하다. 농업, 농촌이 식량은 물론, 환경과 관련해서도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데 완충역할을 하고 있지만, 완충지대의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부분 돈 되는 땅을 일구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규제를 풀고 개발을 하여 땅값을 뻥튀기는 부동산 열풍에 휩싸이는 순간 잃어버리는 것은 농지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전 지구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농촌도 조금씩 도시화되어가고 있다. 면은 더 쪼그라들고, 읍으로 나오는 인구가 늘었으며, 읍에는 도시의 웬만한 프랜차이즈가 다 있을 정도로 도시 작은 변두리처럼 서서히 변해간다. 아파트가 생기고 프랜차이즈가 곳곳에 만들어지는 이런 도시화가 개발과 발전의 표상처럼 인식되면 다른 삶은 불가하다. 다른 삶,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고찰 없이는 공멸하고 말 것이다. 

정치는 이미 실패했다

정치는 이미 실패했다. 땅값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이미 정치의 실패다. 그것은 공직자들이 다주택을 팔고 1주택만 유지한다고 해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중심과 주변부가 존재하는 이상 땅값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땅값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땅 값 자체가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르게 살기 좋은 곳을 만들면 된다. 왜 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한 듯 모든 편의를 누리고, 변방에 사는 사람들은 늘 시간과 비용을 감수하며 그것을 누려야 하는가. 그것은 저열한 쪽수의 정치이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굳어졌다. 사람이 많으니까 각종 편의시설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없으니까 등한시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문화는 표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값은 가깝고 가치는 멀다. 도시에 아등바등 모여 사는 사람들은 당장의 땅값에만 관심이 있을 뿐, 멀리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찌되건 별로 관심이 없다. 중심부에 진입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능력이 없어서라고 평가한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보다 차이와 차별을 벌리면서 특권을 누리려는 것에 대해 권력과 자본이 조장한다. 

도시-농촌 이분법적 도식 철폐, 이제 자립의 관점으로

에너지, 물, 식량 등 모든 부문에서 자립의 관점이 필요하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지만, 자립의 가장 큰 부문인 ‘자급’과 관련해서는 요원하다. 아직까지도 중앙 집중의 방식, 대량의 방식에 익숙하다. 이는 효율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근대의 기업 방식을 답습화한 결과인데 집중보다 분산이 필요하다. ‘효율’과 ‘전문성’을 강조하며 ‘더 크게’를 강조한 결과 가장 중요한 ‘감수성’과 ‘자기제어’를 잃어버렸다. 국가의 식량자급이 실현되려면 각 지역의 식량자급이 되어야 한다. 식량뿐 아니라 에너지, 수자원에도 이를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자급하지 않고 얻어 쓰기만 하면서도 너무도 당당했던 이 나라의 시스템은 혐오시설을 변두리로 내몰았다. 변방에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송전탑이 만들어진 것도 댐과 저수지가 만들어진 것도 변방의 소외된 곳이다. 도시에서 전기도 많이 쓰고 물도 많이 쓰며 식량도 많이 먹는데 이것을 다 농촌에서 조달해서 쓰고 있다.
작금의 도시는 농촌을 희생시키면서 만든 산물이다. 댐을 만들어 마을을 수몰시키고, 모여진 수자원으로 식수와 공업용수를 해결하면서 도시는 성장했다. 인근 농촌의 인력마저 다 앗아가며 기형적인 괴물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의 이분법적인 구조를 탈피하여야 한다. 응당 도시는 이래야 하고, 농촌은 저래야 한다는 정형화된 인식들이 그 차이를 더 가중시켰다. 농촌, 농업, 농민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 느껴야 한다. 존중과 배려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지근거리에서 알아야 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정책적으로 각 지역별 에너지, 식량, 물 자급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지역자결주의’를 주창하고자 한다. 여기서 지역은 자동차로 30분 이내의 구간으로 쉽게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생활권을 말한다. 생활권과 행정구역을 일치시키고 이를 자치와 자급의 공간으로 일궈야 한다. 도시에 논과 밭을 만들어 그들의 식량은 그들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시에 그들이 쓰는 전기에 맞춰 발전소를 설립하여 그들의 전기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洑)가 수생태에 악영향을 준다면 댐도 마찬가지다. 물은 흐를 수 있게 해야 한다. 각자의 물은 각자의 지역에서 고민해야 한다. 도시와 농촌의 이분법을 과감히 버리고 자립이 가능한 지역으로 우리는 뜨겁게 만나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착취하지 않을 수 있다. 대상화하는 것을 버리고, 주체적으로 사유할 때 삶은 진일보한다. 자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협동과 연대란 가치가 움직거려야 한다. 어려운 지역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보충성의 원리로 지원해줘야 한다. 자립한 지역이 공통의 가치로 연결되며 공동행동에 나설 때 사회는 변화할 것이다. 

국가와 자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사회를 찾자

‘사회’는 없어졌다. 사실상 소멸된 거나 진배없다. 국가와 개인, 자본과 개인이 있을 뿐이다. 사회의 공간과 자리는 협소해져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만나는 관계들이 중첩되고 모여져서 우리가 그리는 사회를 결성해야 한다. 관계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체계를 부리고 자본을 제어할 때 사람다운, 생명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텐데 작금엔 요원하다.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언론 등에 한 개인으로 적절하게 호명될 뿐이다. 소비자와 유권자로 전락하여 물건을 사고 투표를 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비자와 유권자를 넘어서서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우리는 뜨겁게 만나서 사회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모이고 모여 우리의 의제를 만들어야 한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지역을 봐야 한다. 자주 만날 수 있는 공간, 공통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공동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우리는 재구축해야 한다.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가 구체적인 코뮌이 될 수 있다. 일상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구현이 되어야 한다. 그런 지역사회가 구축되고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지역사회가 만날 때 많은 창의적인 힘들이 샘솟을 것이다. 선거 민주주의에만 매몰되지 말고, 체계 정치에만 온 신경을 쏟지 말고, 부동산 투기나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에만 고민하지 말고,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구체적인 우리 공간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할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옥천의 대안운동

옥천은 금강 상류지역 농촌으로 지역 주민들이 원하지 않던 댐으로 인해 많은 마을이 수몰되고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으며, 매년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옥천운동의 특이점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해왔다는 것이다. 특출 난 사람이 부각되기보다 유유히 심해에서 흐르는 물결처럼 주민들의 생활운동으로 흘러왔다. 자치의 관점에서 볼 때, 1989년 주민들이 돈과 마음을 모아 [옥천신문]을 만들었고, 자급의 관점에서 볼 때 1990년 옥천군 농민회가 만들어지면서 분화되어 다른 결로 옥천살림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각각 자치와 자급의 부문에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흘러 단단하게 땅을 다져왔으며 지역의 방향과 비전에 대해 고민해왔다. 환경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는데 도시의 환경운동연합이나 녹색연합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과 생태가 같이 살 수 있는 대청호주민연대를 만들어 공존공생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던졌다. 대청환경농민연대와 금강유역환경회의가까지 같이 만들어 참여하면서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 행정구역을 넘어서서 같이 연대하는 지역의 모델을 만들었다. 충청남북도와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금강 유역 공동체의 씨앗을 일궈낸 것이다.

옥천운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선거에 참여해 권력을 쟁취하며 만들어내는 운동 방식이 아닌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요구하며 만들어낸 주체적인 방식은 기존의 운동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집권하지 않고 권력을 깨뜨리고 눕히면서 민(民)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진행했다. 옥천의 작지만 단단한 운동방식이 이 글을 풀어내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고, 실제 실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다양한 지역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길 희망한다. 지역의 이름으로 뜨겁게 만났으면 좋겠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