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별보기

<칼럼/서평> <사업>
지역, 지역문화 그리고 지방문화원이담골을 아십니까?
박용철(동두천문화원 사무국장)


 이담골은 동두천시의 옛 이름이다. 해방이후 양주군 이담면이었다가 1963년 읍으로 승격되면서 동두천읍으로 행정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1981년 시로 승격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동두천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지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박이 어르신들을 제외한 많은 이들에게 이담골이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할 뿐이다. 다만 동두천에는 이담풍물놀이가 전승되고 있고 신시가지에 들어선 이담초등학교와 동두천문화원이 운영하는 청소년 지역문화 창조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향토사 바로알기 사업명인 ‘이담골 역사 문화교실’에서만 그 존재가 남아있을 뿐이다. 경기 북부의 조그마한 시골동네 이담골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53년 7월 휴전이후 소요산 자락, 지금의 동두천동과 보산동 일대에 한국전쟁에 참여하였던 미7사단병력이 주둔하면서부터다. 물론 명칭이야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그 당시 미군의 동두천 주둔은 이 지역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버팀목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국민소득 몇백 달러밖에 되지 않고 모든 것을 대외 원조에 의존하며 살았던 시절, 미군들이 지역에 소비하는 달러는 동두천 발전은 물론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초석이 되었고 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 물건들은 최고의 상품이 되어 양키시장이라는 독특한 시장문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이 동두천에 주둔하면서 생성되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한류문화의 중심인 K-pop이라는 대중음악의 탄생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미8군 산하 미군부대내 클럽공연이 유일하였으며 전국에 약 200곳의 미군클럽이 있었고 그중 최고의 클럽은 동두천에 제일 많았다. 바로 이 미군클럽의 공연 문화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예로 우리나라 록의 대부인 신중현이 만든 ‘에드포’라는 록밴드의 공연을 보기위하여 당시 지방에 거주하는 미군들이 동두천 미군클럽을 찾아오는 등 그 열풍은 대단하였는데 이봉조, 길옥윤, 김희갑, 윤항기, 차중악, 이금희, 패티 김 등이 미군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증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고도 경제 성장시대를 맞이하지만 동두천의 지역경제는 주한미군의 감소와 맞물려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동두천의 전체면적의 42%를 차지하는 미군부대는 오히려 지역 개발의 장애물이 되었으며, 미군부대 주둔에 따른 각종 규제는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아왔다. 
  
 그러던중 2004년 12월 국회에서 전략적 미래 한·미동맹이라는 명분하에 미군기지 평택이전협정비준안이 가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주한미군의 평택이전이 추진되었고 동두천시는 제2의 도약 원동력이 될 반환공여지 개발에 대한 핑크빛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4년 11월 정부의 미2사단 병력 잔류 발표는 10만 동두천시민의 부푼 꿈을 조각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되는 평택시 팽성읍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평택지원특별법을 만들어 1조원 이상의 정부예산을 지원하고 있는 반면 자그만치 60년이란 긴 시간동안 희생을 감내해온 동두천시민을 위한 특별법은 10년이 지나도록 제정되지 않고 있으니 동두천시민들의 허탈감은 어떠하겠는가? 충분히 억울하고 맥이 빠지는 일임은 분명하다. 2015년 현재 동두천시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한수이북의 조그마한 조그마한 이담골 마을은 어둡고 힘든 시기를 이겨낸 저력을 바탕으로 10만 시민이 함께 역동하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양키시장, 미군클럽문화와 같이 부끄러울 수 있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동두천 락페스티발을 발전시켜 나가고 국제 MTB경기의 대외 위상제고와 전통시장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는 등 동두천만의 文化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한다. 50여년간 이 지역 이담골에 살아온 시민의 한 사람이자 문화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머지 않아 Do Dream 동두천의 희망의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