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始興)’과 시흥시(始興市)
이병권(시흥문화원 사무국장)
“시흥을 가려고 내비게이션을 보고 왔더니 서울 금천구였다.”, “도대체 여기 시흥은 뭐고 시흥시는 뭐냐?”라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리고 금천구에 산다는 주민은 자신이 토박이인데 어째서 시흥시가 ‘시흥’을 사용하냐고 따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경우 거기도 ‘시흥’이고 여기도 ‘시흥’이라고 하는데, 무슨 말장난이냐며 성을 내 말이 중단되기 일쑤다. 정말 서울 금천구도 ‘시흥’이고 여기 시흥시도 ‘시흥’인데 말이다.
‘시흥(始興)’은 지명(地名)이다. 현재 이 ‘시흥’은 시흥시를 이르는 말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가도 ‘시흥동’과 ‘시흥사거리’ 등의 ‘시흥’이 들어간 지명을 사용한다. 그러한 이유는 바로 이곳 금천구 역시 ‘시흥’이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르면 고려 때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기록에서 “강감찬의 옛 이름은 은천(殷川)인데 금주(衿州) 사람이다. 그의 5대조 강여청(姜餘請)이 신라조(新羅朝)부터 시흥군(始興郡)으로 옮겨와 사니 시흥(始興)은 즉 금주이다”(『고려사(高麗史)』 권94 「강감찬전」)
‘시흥’이 금주의 별호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강감찬이 983년(성종 3)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것으로 볼 때, 늦어도 고려 성종 때부터는 ‘시흥’이 금주와 함께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등 각종 지리지에도 ‘시흥’을 금주라고 한다. 이 금주는 금천의 고려 초 지명이다. 그리고 1795년(정조 19) 2월 정조(正祖)가 친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 행행(行幸)을 위해 ‘수원별로’를 새로 내면서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금주의 별호인 ‘시흥’을 취해 시흥현(始興縣)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시흥’은 금천지역을 이르는 읍치의 명칭이 되었다.
그렇다면 시흥시가 금천의 옛 지명인 ‘시흥’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시흥현(1895년 시흥군으로 승격)의 금천지역을 중심으로 1914년 4월 1일 군현 통폐합 때, 안산군을 합쳐 거대 시흥군이 만들어 지면서이다. 이후 시흥군은 1936년 영등포읍과 북면(北面)이 서울로 편입되는 것을 시작으로 1963년에는 동면(東面)의 금천구 일원(시흥리 등)까지 서울로 편입되었다. 이어서 안양, 광명, 과천, 반월(안산), 군포, 의왕이 각기 시로 승격되면서 남은 시흥군(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1989년 1월, 시흥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시흥시는 ‘시흥’의 옛 지역인 금천을 계승한 곳은 아니다. 전통시대 시흥시의 북부지역은 대체로 인천, 남부는 안산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러다 1721년(경종 1)에 인천과 안산사이의 바다에 호조방죽을 쌓아 너른 농경지인 호조벌이 되었다. 오늘날 시흥시는 이 호조벌의 간척으로 두 지역이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의 지역으로서 역사와 문화, 경제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바람 깃발 휘날리며 해문을 돌아오니 소래산 좋은 경치에 눈이 번쩍 뜨이네 높다란 군자봉을 서로 가리켜 보이어라 혹 그 안에 숨은 인재가 있지 않을는지”
(風?獵獵海門廻, 秀色蘇來眼忽開, 君子峰高入指點, ?非中有隱淪才” 『홍재전서』 권7 시3)
위 시는 정조가 1797년 김포 장릉을 들려 현륭원을 간 원행에서 8월 16일 인천, 즉 현재의 시흥시를 지나는 길에 읊은 것이다. 시에 나오는 경치 좋은 소래산은 시흥시 북부의 명소이고 높다란 군자봉은 시흥시 남부의 명산이다. 현재의 시흥시 전체를 아우르며 그 경치를 노래하고 숨은 인재를 갈구하였던 정조의 시는 시흥시의 현재이고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