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열(부천문화원 사무국장)
복사꽃이 만발했던 경인 국도변 전원마을 송내에는 건물 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부천문화원의 50년 숙원사업인 신규 원사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거 부천의 문화진흥을 위한 향토사 수집, 연구 및 지역 문화사업 수행 및 부천시와 연계한 사업 외에도 각종 공모사업을 통해 지역의 전통문화 창달과 다양한 문화사업 육성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부천문화원의 원사가 완성되어 간다. 경기도 문화특별시 부천은 문화예술 지원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타 도시 어느 지자체보다 많은 노력으로 핵심 문화 사업을 하고 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부천애니메이션페스티발(BIAF), 부천필하모니 등을 살펴보면 문화 사업에 대한 투자와 열정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되며, 핵심문화 사업 속에서도 문화원의 역할은 따로 있다. 부천에 대한 향토 역사와 근대사를 찾고 정리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사골 부천의 역사는 삼국시대의 주부토에서부터 조선시대에는 행정구역상 부평군과 함께 되어 있었으나 오정구 고강동에서 청동기시대 선사유적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이 증명됐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조선시대에 오정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한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중심으로 부천의 지형도가 바뀌게 됨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노량진(옛 이름: 노들역)에서 인천 제물포(옛 이름: 우각현)로 이어진 철도의 중심적 위치에 부천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카야마현 출신의 역장이 인천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그곳(오카야마현)의 지형, 기후가 우리지역과 비슷한 여건을 감안하여 오카야마 특산물인 복숭아를 부천(소사)에 심게 되었고 전국적 지명도를 알리는 계기가 되고 소사의 특산물로 소개되었다. 물론 좋지 않은 기억이라면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중요한 간식거리로 이용되기도 했다.
흰 모래라는 뜻을 가진 소사는 부천이라는 이름 이전의 대명사로 불렸으나 1973년 부천군의 시 승격과 함께 소사구로 행정구역이 설정되고, 근현대사의 숨 가쁜 변혁의 과정 속에서 신도시 개발과 함께 인구 100만을 내다보는 대도시로 전환되어 활발한 문화 사업을 전개하는 활력 있는 도시로 바뀌게 된다. 이제 우리는 부천이 전원도시였던 또 다른 이름 ‘복사골’이라고 불리게 된 내력과 이 고장의 시인들이 시 속에서 즐겨 사용했던 이유를 찾아 그것이 가진 상징성을 미래로 연결하는 당위성을 과제로 삼고 정리하여 시민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일과 지금 생각하면 작지만 그 의미가 클 수 있는 경인철도의 상징적 흔적들, 불과 2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있었던 부천역, 송내역 땡땡이 골목의 추억을 되살리며, 도당동의 아기장수 바위, 대장동 말 무덤 같은 설화와 더불어 변종인신도비, 한언, 한준신도비, 이한규묘역, 석천농기고두마리, 장말도당굿, 먼마루대동우물제 등 지역 향토문화재의 역사적 맥락을 잡아주는 일 등은 부천의 뿌리를 찾는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의 위성공업도시 시절 우리지역을 돌아보면 세계적 Brand로 각인 되어진 반도체 시작이 부천이었다는 점(삼성 반도체), 대한민국의 최초의 영화 촬영소가 있었던 대장동(구: 오쇠리의 우진필림-정진우 감독), 영화사(동아수출), 한국 근대 도자의 대표 Brand인 세라트(회사명) 등의 자취를 밝혀내고, 우리지역과 인연을 맺은 활 명인 김정환·김박영씨, 그리고 삼변으로 대표되는 변영만·변영태·변영로의 생애와 업적을 기념하고 대지의 작가이며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 여사의 일대기 중 부천에서의 삶(심곡본동의 소사희망원)속에서 보여준 봉사정신과 문학, 특히 구한말 한국을 소재로 쓴 소설(살아있는 갈대)에서 표현한 애정(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다) 등, 수많은 흔적들을 정리하고 보존한다면 ‘복사골’은 자긍심과 애향심이 살아있는 자랑스러운 곳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