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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사업>
지역, 지역문화 그리고 지방문화원고전문학을 통해서 보는 고양이야기
류연일(고양문화원 사무국장)


 고구려 장수왕 시절 고양 땅에는 ‘한주’라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장수왕의 손자인 흥안태자(후일 안장왕)는 이 땅을 정탐하러 왔다가 한주낭자와 정을 나누게 되었죠.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게 된 태자와 낭자는 손가락 걸어 장래를 약속했고. 백제 태수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당했지만 낭자는 태자에 대한 사랑과 지조를 굳게 지켰습니다. 드디어 태수의 생일! 최후통첩을 거절하며 한주낭자는 다음과 같이 시조를 읊었다고 합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던 이 시조는 정몽주에 의해 〈단심가〉로 살아납니다(단재 신채호 고증).

 하여튼… “네 이녀-언! 저년을 당장 쳐 죽여라!”고 외치는 백제 태수의 호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흥안태자의 심복 을밀장군이 백제 태수를 사로잡아 한주낭자를 구출했고, 이 기쁜 소식을 낭군에게 전하기 위해 한주낭자는 고봉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춘향전〉의 원전이라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지켜 온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 장군의 무덤은 고양시 대자동 산자락에 있습니다. 600여년 동안 장군의 유언대로 풀 한포기 나지 않던 붉은 무덤에는 1976년부터 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최영 장군의 한이 이제는 풀어진 것일까요? 

 권력을 멀리하고 시서화를 벗 삼아 한평생을 지냈던 성종의 형님인 월산대군은 어느 가을 다음과 같이 시조 한편을 읊었습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의 사당이 고양시 신원동에 있고 이곳에 별장을 두고 자연을 벗하며 살았는데 이 시조의 추강은 어디였을까요?

송강 정철은 노후에 10여 년간 고양 땅에서 살면서 훈민가 등을 지어 백성들을 교화 했습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에다 갚사오리”

 이웃마을 파주 땅에 사는 친구 성혼대감을 찾아가던 송강은 이렇게 시조 한수를 읊었습니다.

“재너머(파주) 성권롱(성혼)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희야 네 권롱(성혼) 계시냐 정좌수(정철)왔다 하여라”

 고양시에는 송강문학관, 송강마을, 송강고개 등 송강 정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70~80년대 중고등학생들의 봄가을 단골 소풍지였던 서오릉… 조선의 세 임금이 떠오릅니다. 세조는 서오릉을 조성했고 꽃다운 20세의 두 아들을 묻었습니다(덕종-추존, 예종). 숙종은 세 왕비(인경·인현·인원왕후)와 빈(장희빈)과 함께 본인도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영조… 그 분은 사랑하는 정성왕후를 이곳에 묻고 본인도 그 옆에 묻히려고 자리를 마련해 놓고 간곡히 유언까지 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정조임금은 물이 나와서 이장할 수 밖에 없었던 ‘나쁜’터에 영조를 모셨답니다(동구릉의 원릉). 그래서 그가 묻히고 싶어 했던 자리는 오른쪽이 비어 있는 ‘우허재(右虛齋)’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말기의 효자 박태성은 〈박태성과 호랑이〉라는 전설로 어린이들을 찾아갑니다. 아버님 산소를 돌보던 그를 매일 등에 업고 바래다주던 호랑이는 박태성이 죽자 그 옆에서 같이 죽었고, ‘효자동’이라는 마을 이름과 ‘효자비’와 ‘호랑이 묘’와 ‘호랑이 비’로 남아 오늘도 우리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고양문화원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향토문화유적답사를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인형극단과 동화구연단은 고양의 역사와 설화를 가지고 매월 도서관과 어린이집, 복지관 등을 찾아가며, 각 기관이나 각급 학교 등에서 문화원의 〈고양 오천년 역사 특강〉은 인기 강좌입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내 고장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 문화원의 각종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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