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 | 문학평론가
“연기자에게 잘못된 콘셉트를 빨리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긴 설득이 아니라
박수 하나 없는 관객의 침묵이다.”
독일 시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1. 공위기(空位期) : ‘모순은 희망이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Z. 바우만은 오늘날 문화의 기능은 이미 존재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를 창조하는 동시에 기존의 욕구들이 영원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도록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한다. 세계화와 대규모 이주와 인구의 혼합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힘의 등장에 따라 문화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Z.바우만이 이와 같이 진단하는 이유는 지금의 시대가 또 하나의 ‘공위기(空位期, interregnum)’라는 시대 인식과 관련이 있다. 공위기라는 용어는 한 국왕이 사망하고 나서 후계자가 즉위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적인 간격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 노트들 중 한 곳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공위기에는 매우 다양한 병적인 징후들이 출현한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용한 이 개념을 빌려 바우만은 오늘날을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공위기’라고 진단한다.1)
다시 말해 ‘국가 없는 국가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는 최근의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국가의 기능들이 ‘정치에서 자유로운’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는 시장으로 이전(즉 ‘아웃소싱’ 그리고/혹은 ‘외주 하청’)되거나 개인들의 어깨 위로 떨어져야만 했고 그렇게 될 예정인 상황으로 급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 시대의 정언명령은 신자유주의적 ‘탈규제’ ‘민영화’ ‘보조화’가 유일한 덕목으로 권장되고 재촉되고 있다. 문화예술 영역에 국한하자면, 최근 문예진흥기금을 비롯한 문화창조 후원의 경우 ‘보충성 원리(subsidiarity)’를 실현하려는 차원에서 지역적인 ‘풀뿌리’ 예술과 공연 계획 등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대신에, 문예진흥기금이 고갈될 상황에 처하자 지역협력형 사업의 지역발전특별회계로의 전환 편성을 하려고 하는 정부의 처사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물론 문예진흥기금의 지역발전특별회계로의 전환은 2016년에는 현행대로 ‘유보’될 전망이지만, 이 사안은 국가의 책임의식의 침몰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기조가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의 경우 창작 프로그램 지원 중심에서 문화예술인과 문화예술단체의 역량 강화 차원으로 지원체계가 개편되는가 하면, 문화예술교육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시민 중심의 문화예술(동아리) 활동지원이 중심축으로 부상한 것은 이러한 정책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술가(단체)와 ‘대중’이 만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서비스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정책사업의 추진이 요구되고 있다. 지역의 문화자원 및 자연자원을 활용한 예술창작(교육) 집중지원을 고려해야 함은 물론이다. 공모사업 단계에서부터 현장 문화예술인(단체)와 ‘협력기획’을 모색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술단체(예술가)의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기 위한 단계적이고 연속적인 지원을 강화해야 하며, 장르 중심의 지원 시스템에서 탈피하여 지역 내 다양한 분야의 장르 간, 단체 간 협력사업을 강화하고 우선지원하는 것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독일 시인 겸 극작가 브레히트는 ‘모순은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은 긴급 상황이 닥쳐야만 새로운 것에 몸을 던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어느 글에서 “네 생각엔 뭐가 쉽게 바뀔 것 같니? 바위일까? 아니면 그에 대한 너의 생각일까?”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분명히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지금의 문화예술(교육) 지원제도의 변화에 대해 예의 주시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옛것과 새것의 싸움을 서술하지만 말고 새것을 위해 싸워라”2)라고 주문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싸움’이라는 의미를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기존의 사업에 대한 재검토와 성찰을 통해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채울 수 있는 갖은 노력들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노력 속에서 문예진흥기금을 비롯한 정부 및 지자체의 문화창조 후원의 경우 ‘보충성 원리(subsidiarity)’를 실현하려는 차원에서 지역적인 ‘풀뿌리’ 예술과 공연 계획 등을 장려하고 지원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토대에서 예술 중의 가장 위대한 예술인 ‘삶의 예술’에 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위기(空位期) 시대의 지방문화원의 새로운 ‘변신’과 ‘변화’가 요청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1) 지그문트 바우만․카를로 보르도니, 『위기의 국가』, 동녘, 2014, pp.29~32.
2)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실천문학사, 2013, p.313. 위 진술은 브레히트의 다른 아포리즘인 “우리가 인간성을 원한다면 인간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진술과도 상통하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하다.
2. 우리 안의 ‘마음의 관료주의’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 「담장을 허물다」 전문
지방문화원(이하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중추기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지역의 문화기반시설로서 ‘문화살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자체 단위로 설립된 문화원은 1947년 강화문화원이 개원한 이래 1962년 지방문화원 관련 첫 법령이 만들어진 이후 정부 지원을 받아 2014년 현재 229개의 지방문화원이 설립되었으며, 『지방문화진흥법』에 의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방문화원을 지원·육성하여야 한다. 2014년 6월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의뢰하고 조사/연구기관 코뮤니타스가 진단한 『지방문화원 실태조사』3) 연구는 지방문화원의 인프라, 지방문화원을 둘러싼 네트워크 등 정책 여건까지 종합적인 지형도를 전수조사에 기반하여 파악한 보고서로서 문화원의 실태와 생태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종합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원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은 연간 8,908개(문화원 당 평균 38.9개)이며, 수혜자 수는 연간 직접 수혜자 수만 하더라도 778만 2천여명이다. 프로그램 중 ‘교육 프로그램’이 총 4,593개(51.6%)로서 절반을 차지하는데, 인건비를 지급받는 인력은 평균 3.0명으로서 열악한 상태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문화원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은 대체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연례사업>, <지역 특성 반영사업>, <어르신, 다문화, 향토사 등 각종 기금사업>, 이외 <기타 문화원을 대표하는 우수 사례 사업>으로 나눌 수 있다. 전국에 지방문화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동아리 회원 수는 전체 22,44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문화원 별로는 평균 132.8명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원이 처한 상황은 결코 녹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지역의 기초문화재단과의 네트워크 및 교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좀 더 세세히 보고서를 검토해보자. 먼저 ▲사업 영역 측면의 경우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이 대체로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운영제도 개선 및 경영혁신 노력 및 전문 인력 양성 방안 측면에서도 보완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주민강사 활용 등을 통해 동아리 활동 활성화를 위한 생활 밀착형 지역 문화거점 공간으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하는 과제 또한 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지방문화원에 대한 전반적인 홍보 사업의 중요성도 숙제이다. ▲인프라 영역의 경우 일부 문화원의 경우 문화사업에 필요한 기반시설 확보가 필요하며, 인건비 지원 및 외부 인력 수급 등 지속적인 운영을 위한 대책 마련도 시급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지자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특성상 재정 자립도 및 재원 개발을 위한 자체 수입 마련 및 후원실적 개발도 요구된다. ▲환경 영역에서는 문화원 정책 여건 개선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지자체와 지역 문화예술단체(인)와 문화 거버넌스 구축과 네트워킹이 요구되고 있다. ▲자치단체 현황 영역에서는 지방문화원 간 격차 해소와 균형 발전을 위한 방안 마련이 언급되고 있다.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진단한 『2014 지방문화원 실태조사』는 그동안 지방문화원을 둘러싼 안팎의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 실태조사를 수행한 결과로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문제점들은 지방문화원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들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문제들이 지방문화원 현장에서 쉽게 바뀌지 않는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와 관련해 브레히트가 어느 글에서 한 말을 이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연기자에게 잘못된 콘셉트를 빨리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긴 설득이 아니라 박수 하나 없는 관객의 침묵이다.”4) 그렇다, 지금 지방문화원을 비롯한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2006년에 작성된 보고서 『지방문화원 발전방안 연구』에서도 언급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브레히트가 말하듯이, ‘긴 설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박수 하나 없는 관객의 침묵’을 걱정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지금까지의 사업과 인프라와 정책 환경과 자치단체(지역 문화예술단체) 등과의 관계에 대해 재검토와 새로운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장 약한 가닥이 끊어지면 밧줄도 끊어진다는 것을.
이것은 지방문화원 종사자들을 비롯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자율사회’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한 현상과 관련이 있다. 자율사회는 문화권리를 한껏 향유하면서 자신의 근원적인 자유, 욕망, 꿈이 실현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율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중독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문화적․예술적 실천이 지속될 때 실현 가능할 것이다. ‘노는 꼴’을 누려보지 못한 이 땅의 어린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 제대로 된 놀자판을 만들 수 있을까. 문화와 예술이 재미의 의미를 일상적으로 추구하면서 나와 우리들의 일상과 내면과 시스템의 변화를 제기할 필요성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율사회를 향한 우리의 희망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의 실현과 이음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점에서 지방문화원을 둘러싼 이른바 ‘마음의 관료주의’ 현상에 대해 성찰하고 극복해야 할 대안을 찾아야 함은 물론이다.
공적 행복의 실현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시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갖고 있는 공감(共感)과 소통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공감과 소통의 언어! 이 말은 오로지 먹고 사는 것이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독단적 윤리학이 된 시대에, 어쩌면 한없이 연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말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사회적 실패자(loser)들의 패배주의적 변명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사람들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서시」)라는 표현을 더 이상 자기 삶의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가치란, 궁극적으로 G.루카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언급했듯이,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 자신의 본질일 터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래도!’의 가치를 여전히 신뢰하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여전히 신뢰하는 존재, 즉 철학자-시민으로서의 삶과 이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다른 삶과 다른 사회를 꿈꾸려는 근원적인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인문학적 가치의 발견을 통해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우리들 삶의 형식이 더 이상 피동형(被動形) 동사들의 목록에 갇히는 신세에서 벗어나, 우리들 ‘스스로 창조해낸다’는 의미의 주체적․능동적 동사형을 새롭게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기존의 권위와 복종에 관한 무수한 관념들에 도전할 때, 다른 나와 다른 사회의 미래가 열린다는 점은 누구도 쉽게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 사회가 추구하는 번영이란 결국 모욕사회의 형성과 강화에 기여할 터이다. 이러한 모욕사회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현저히 둔감한 사회를 말한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자신의 책 『무통문명(無痛文明)』에서 “고통 없는 인생은 우리의 미래에 놓인 달콤한 덫”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점에서 마음의 관료주의 현상의 극복은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담장들’을 허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공광규 시인의 시 「담장을 허물다」가 의미하는 바는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의 ‘분단’ 현상을 극복한다는 것은 힘이 세다!
3) 신동호 외, 『2014 지방문화원 실태조사』, 한국문화원연합회, 2013.6. 이 보고서는 전국 229개 지방문화원을 대상으로 사업/인프라/환경/자치단체 현황 영역 등 4개 부문에 걸쳐 지방문화원의 실태를 전수조사한 결과 보고서이다. 지역문화진흥법 제6조에 따라 ‘지역문화진흥 기본계획’ 수립 시 지역 문화지료를 반영한 지역문화 특성화 대책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시하려는 목적에 따라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
4) 앞의 책
3. 지방문화원의 변신을 위하여 : ‘협력기획 과정’을 제안하며
지난 8월 18일, 문체부는 <국정 2기 문화융성의 방향과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문체부는 국정 2기 문화융성의 방향을 ▲문화를 통한 ‘코리아 프리미엄’ 창출 및 문화영토 확장, ▲전통문화의 재발견과 새로운 가치 창출, ▲문화창조융합벨트를 문화융성과 창조경제의 핵심동력으로 구축, ▲국민 생활 속 문화 확산에 두고 있다. 여기서 지방문화원이 주목해야 하는 정책의 기조와 방향은 ‘국민들의 문화향유 확대’와 관련되어 있다. 문체부는 이와 관련해 △문화가 있는 날, 더 풍부해진다, △세대별 문화향유 프로그램 확대, △문화가 있어 행복한 실버세대, △문화융성 추진체계 강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문체부의 위 구상에서 지방문화원이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문화예술교육의 전면 확대와 실버(어르신) 세대 ‘1인 2기’(문화예술 1개, 스포츠 1개) 문화 캠페인이다. 이에 따라 2016년 문화정책에서 문화예술교육과 실버(어르신) 문화예술 관련 정책사업이 양적으로 더 확산되고 강화되리라는 전망이다. 지방문화원은 이러한 정책환경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며 기존의 ‘상투적인’ 사업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신과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올해 처음 추진되는 <인생나눔교실> 같은 정책사업이 더 확신일로에 있으리라는 예측을 하고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책사업들이 ‘추구’는 없고, ‘추진’만 있는 점에 대해서는 일선 현장에서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지방문화원이 10년째 사업을 수행하며 일종의 대표 브랜드로서 사업을 수행해오고 있는 <어르신 문화프로그램>을 비롯한 기존 사업들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뿌리 깊은 지역문화, 피어나는 문화융성’은 문화비전 같은 것을 제정하고 낭독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지역문화센터>(가칭) 건립처럼 관련 법과 제도를 완비하는 것만으로 완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원을 거점으로 하여 ‘사람’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기존의 사업 작풍을 일신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어르신 문화프로그램> 같은 사업에서 ‘협력기획’ 형식을 적극 도입해 공모지원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제도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어르신 문화프로그램>은 문화 소외계층의 문화향유 권리 보장과 지역 문화격차 해소라는 국정과제의 일부로 추진되는 사업이며, 사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사업의 경우 어르신을 능동적 문화활동의 주체이고 나눔의 주체로서 인식하고, 한 사람의 주체로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여러 여건 등으로 인해 그렇게 운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어르신 문화학교 | 어르신 대상 악기, 노래, 연극, 무용, 사진 등의 다양한 예술장르 맞춤형 교육 |
찾아가는 문화학교
(전문강사파견) |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지역, 시설 등에 전문강사가 직접 찾아가는 어르신 대상 예술장르 맞춤형 교육 |
찾아가는 문화학교
(이수자강사 파견) | 어르신문화학교를 수료한 이수자강사가 유치원, 학교, 마을회관, 요양원 등의 다양한 세대를 대상으로 예술장르 교육 |
문화나눔봉사단 | 어르신문화학교 수료생들로 구성된 어르신들이 지역축제, 복지시설 등을 찾아가 배움을 나누는 재능기부 봉사활동 실천 |
어르신동아리활성화 | 어르신들의 지속적, 자생적 문화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문화동아리 활동 지원 |
생활문화전승 | 어르신들이 간직해 온 생활문화(지식과 경험, 풍습, 공동체 문화 등)가 세대·지역 간에 교류, 전승될 수 있도록 지원 |
이 점에서 2013년부터 공모지원 사업의 틀을 혁신하기 위해 한국문화의집협회가 추진해오고 있는 ‘협력기획 과정’은 적극적으로 검토해 도입할 만하다고 판단된다. 올해로 3년차 진행하고 있는 한국문화의집협회의 협력기획 과정은 이른바 ‘프로그램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지역과 문화의집 그리고 지역 주민이 밀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하였다. 지원사업의 취지도 중요하지만, 문화의집의 운영 방향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어야 한다는 고민을 담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의 문화의집이 제일 잘 하고 있고, 혹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 하게 하자는 것이 협력기획 과정을 도입한 취지인 셈이다.
협력기획 과정의 심의는 서류심사에서 탈피해, 서류 심사/인터뷰 심사 병행을 거쳐, 현재는 기획 워크숍, 인터뷰 심사, 최종 기획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우지연 한국문화의집 사무처장은 협력기획 과정의 좋은 점은 “문화의집 운영자들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할 수 있는 든든한 협력자가 있다는 것, 언제든지 응원해주는 응원군이 있다는 것, 그리고 협력기획 과정에서 나름의 동지애(peer effect)가 형성된다”는 점 등을 꼽았다.5) 물론 협력기획 과정이라 하더라도 외형적으로 컨설팅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업 담담자와 전문가 간에, 그리고 각 문화의집 간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은 결코 작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사업에 대한 고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집 운영 전반에 대한 고민을 비롯해 운영자가 갖는 어려움이나 고민 등 다양한 부분들에 대해 고민들을 함께 나누는 데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협력기획 과정을 통해 공모지원사업이 ‘과정’ 중심의 정책사업으로 정착되어가는 것은 퍽 의미가 있으리라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물론 여전히 어려움은 없지 않다. 전문가 평가/환류를 통한 협력기획 과정에 대한 이해 정도가 문화의집의 상황(지역, 운영주체)에 따라 편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의 사례공유 및 상호학습이 이루어지는 현상은 매우 긍정적인 청신호라고 말할 수 있다.
협력기획 과정의 추진체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문화기획의 흐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를 거친다.
①필요성 또는 요구 파악 → ②사례조사 및 아이디어 개발→ ③아이디어 구체화 → ④기획서 작성→ ⑤컨디션 확인(일정, 장소, 재원, 단위주체, 협력 단위) → ⑥컨디션 확보 → ⑦실행계획 수립 → ⑧실행 → ⑨과정 모니터링 → ⑩평가 환류
물론 각 단계마다 평가와 환류가 수시로 진행된다. 이 점에서 문화의집협회가 추진하는 협력기획 과정은 ①-④까지는 협회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협회가 위촉한 전문가들이 현장의 기획자(사업 담당자)들과 협력해 ①-④의 과정을 평가·환류하며 ⑤단계로 이월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월 25일 경기도문화원연합회가 주관한 <2015 어르신문화프로그램 기획자교류지원사업> 제1차 워크숍에서 확인된 것처럼, 현장 사업 담당자들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 만큼 사업 담당자들의 역량 강화는 물론이요, 각 문화원 간의 격차 해소를 위해서도 협력기획 과정의 도입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고 확언할 수 있으리라. 협력기획 과정은 대강의 목적과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5) ‘협력기획 과정’의 경과에 효과에 대해 자세히 도움말을 주신 우지연 한국문화의집 사무처장에 감사드린다.
□ 목적 및 필요성
● 사업취지에 부합하고 문화의집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문화의집별 맞춤형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한 과정
● 각 문화의집에서 제안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문화의집 마다 고유의 특징과 장점을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과정
● 문화의집 운영자와 협력기획자 간 논의와 피드백을 통해 프로그램 기획
□ 운영 내용
● 두 번의 협력기획 워크숍과 온라인 및 유선상의 피드백 과정으로 구성
● 1차 협력기획 워크숍에서 제출된 문화의집의 사업제안서를 토대로 협력기획 과정을 거친 후 2차 협력기획 워크숍에서 최종 사업계획서 완성
● 생활문화디자이너 양성 및 대표 프로그램 개발은 협력기획 과정에서 논의된 프로그램에 한해 운영지원
□ 추진절차
1차 협력기획 워크숍
(5월 초) | - 사업 설명 및 취지 공유
- 문화의집별 사업 제안 및 기본방향 논의 |
온오프라인 협력기획 과정 운영
(5월 6일 ~ 12일) | - 문화의집에서 제안한 사업내용을 토대로 협력기획 진행
- 각 협력기획자 별로 온오프라인을 통한 논의 진행 |
2차 협력기획 워크숍
(5월 12일) | - 협력기획 과정을 통해 논의된 사업계획 제출 및 최종 논의 |
4. “좋은 세상을 남기도록 하라”
결과 없는 선의! 남들은 모를 자기만의 신념!
내가 바꾸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 두려움 없이 재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착하게 살았다는 말뿐 아니라
좋은 세상을 남기도록 하라!
- 브레히트 연극 『도살장의 성 요한나』 중에서 (밑줄 인용자)
지방문화원은 지역문화의 자생력 배양을 통한 특색 있고 활력 넘치는 지역공동체 구현이라는 이 시대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회의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여러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지방문화원이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유연성이 부족한 데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장기적인 미래 비전 설정의 부족과 지역의 다양한 문화활동 주체의 통합 및 연결 부재에도 기인하는 것 같다. 지방문화원의 중장기 발전을 위한 방향으로서 ▲자생력 강화, ▲개방성과 투명성에 입각한 운영, ▲ 방문화원의 정체성 확립, ▲전문성 강화와 문화활동 영역의 다양화 등이 요구되는 것이다. 참고로 지역문화시설 및 기관의 기능 및 특성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주요기능 및 특성 | 부수적 기능 및 활동 |
문예회관 | 예술물 위주의 공연전시
고급예술 창조 및 향수증진 | 예술 중심의 사회교육기능 |
문화의 집 | 생활문화진흥, 주민의사소통증진, 주민 문화복지증진 | 시민문화형성에 기여 |
주민자치센터 | 주민자치능력증진, 문화복지 및 주민 의사소통증진 | 생활문화 및 학습기회 제공 |
도서관 | 도서 대출 및 독서증진 | 평생학습 및 일부 문화예술교육 |
청소년회관 | 청소년복지 및 문화 증진 | 청소년문화형성 위한 문화활동증진 |
여성회관 | 여성복지 및 취업능력 및 기회 증진 | 생활문화 중심의 문화활동기회제공 |
사회복지관 | 지역민 사회복지 증진 | 취약계층 및 시민대상 무화활동기회 제공 |
문화원 | 향토사 및 향토문화진흥
지역고유문화개발 및 구심역할
생활문화증진, 문화행사 및 교류증진 | 문화예술 및 지역, 환경 등 관련 사회교육기능 |
이와 같은 연구결과들을 검토해 볼 때, 지방문화원은 지역의 문화시설 및 기관의 구심점으로서 네트워크 형성을 주도하는 한편, 지역 문화단체 종사자 및 활동가들과 연결하고 조직하며, 양질의 프로그램 확보와 보급 및 지역문화 활동을 위한 전문성을 강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조직 안과 밖의 측면에서 유연한 자기 쇄신과 민주주의적 혁신이 동시에 요구되는 셈이다. 이러한 쇄신과 혁신은 결국 ‘사람’을 키우고 연결하는 문화원의 자기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끼라(1910-1998)의 걸작영화 <이끼루(生きる)>(1952)에 나오는 1920년 유행가 <삶은 찰나의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청 시민과에 30년째 근무하는 50대 공무원이다. 그는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자신의 공직 인생에 회의하며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동네 놀이터를 지어달라는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뒤 죽음을 맞게 된다. 죽음 앞의 인간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이 퍽 여운이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은유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노래의 원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쓴 시로 알려져 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고, 사회를 위한 인문학과 문화예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이 시는 브레히트가 어느 희곡에서
“너희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착하게 살았다는 말뿐 아니라
좋은 세상을 남기도록 하라!”
라고 한 진술과도 통하는 시적 언술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우리는 그런 실천을 일러 ‘사랑’의 위대한 힘이라고 감히 말해도 좋으리라.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