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체계 개편이 또다시 국가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메가시티, 광역연합, 특별지자체가 언급되며 각종 보고서마다 규모의 경제가 등장하고, 행정 효율과 투자 유치가 만능처럼 제시된다. 합치면 중복 조직을 줄이고, 더 큰 파이로 투자 유치가 쉬워진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계산이 삶의 총체성을 놓친다는 데 있다.
삶은 이동시간의 평균값이 아니며, 공동체는 가구당 지출액의 합이 아니다. 통합의 환상은 도시를 초대형 거점과 상징 시설의 경쟁장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런 거점 중심의 개발 담론은 생활권 단위의 관계망을 무너뜨리고, 주변 지역의 자기결정권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 결과 거점은 더 큰 거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도시는 비어간다.
통합 창원시의 경험은 이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창원, 마산, 진해 통합은 주민투표도 거치지 않고 정치인과 단체장 주도로 결정하여 논의를 시작한 지 2년도 안 돼 세 도시가 통합됐다. 통합은 곧바로 청사 입지 논쟁으로 이어졌고, 어느 곳을 중심지로 둘 것인지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 행정 현안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통합의 후유증은 남아 있다. 청사를 비롯한 도시 인프라는 한쪽(옛 창원)에 쏠렸고, 옛 마산과 진해는 자치구가 아닌 행정구로 남아 독립적 의사결정 권한이 약화되었다. 그로 인해 지역 정체성 상실과 대표성 위축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다. 마산과 진해의 주민들은 통합 이후 자신들의 지역이 ‘규모가 큰 동사무소’가 됐다고 자조하며, ‘다 빼앗기고 이름까지 먹혔다’*1)고 말한다. 게다가 통합 당시 108만 명이던 인구는 2024년 12월 주민등록 기준 99만 명으로 100만 선이 무너졌다. 인구가 줄어들며 특례시 지위 유지 논쟁이 지역 정치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통합의 유인 논리는 규모의 경제였지만, 단일한 규모 확대가 오히려 규모의 불경제와 행정 비효율을 낳을 수 있다는 비판은 ‘통합=효율’ 프레임에 가려져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통합 과정에서 공론장의 부재가 지속적 갈등의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이처럼 공론 절차가 생략되고 의제 설정과 예산권, 거부권이 거주자에게 주어지지 않을 때, 통합은 사람을 비우는 행정으로 변한다. 사람 없는 지역의 기반은 빠르게 무너진다. 청년은 떠나고, 골목의 상권은 줄어들고, 네트워크는 끊어진다. 인구감소와 재정위기가 고착화되는 지금, 해법은 덩치를 키우는 행정의 확장이 아니라 더 가까운 결정을 보장하는 분권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시적 정책의 실패를 생활권 단위에서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지리산포럼2025 포스터(지리산이음)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뿌리를 둔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은 행정 경계 대신 마을 네트워크와 주민 자치를 중심으로 지역을 다시 설계하려는 흐름에서 출발했다. 지리산이음은 스스로를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마을, 마을과 세계를 잇는 지원조직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마을과 지역의 문제를 국가와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협동과 자치가 일상화되는 ‘지리산 공화국’을 상상하며 새로운 실험들을 이어가고 있다. 만남과 일의 연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산문화공간 토닥’과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은 마을의 공유공간이다.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은 책을 매개로 한 지식 나눔과 대화의 장으로,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은 회의와 워크숍이 이루어지는 네트워크 허브로 기능한다. 두 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마을 전체가 학습 공동체이자 실천 공동체가 되어, 머물고 배우며 협력하는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지리산권*2) 주민 활동가의 발굴과 역량 강화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3)’가 맡아 각 마을의 생활 의제에 밀착한 실험을 지원해 왔다. 낮은 문턱과 실행 중심의 지원 방식 덕분에 실제로 157개의 공익 프로젝트와 네트워크가 발화했다.
지리산포럼2025 행사장 지도(지리산이음)
이러한 활동은 매년 가을 ‘지리산포럼’으로 확장된다. 2025년 포럼의 주제는 ‘민주주의, 함께 키우는 숲’으로,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가꾸는 실천을 사례 교환과 교차 학습의 형식으로 다뤘다. 참가자들이 직접 신청하고, 각자 10분씩 자신의 주제와 경험을 발표하는 릴레이형 포럼 구조를 통해 특정 전문가가 독점하던 마이크를 다수의 주체가 공유하도록 했다. 또한 발표와 대화가 한 건물에 갇히지 않도록 산내면 전역을 무대로 삼아 생활공간 전체를 공론의 장으로 확장했다. 마을의 여러 공간을 함께 쓰며 서로를 만나고 지역과 얽히는 과정 자체를 프로그램으로 편성하여, 자연스러운 교류와 자발적인 발표가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특히 주민들은 공간별 역할과 이동 동선, 숙박과 식당 연계 방안 등을 함께 정하고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공간의 이용자가 아니라 권리와 책임을 함께 지는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소비되는 이벤트가 아닌, 지역이 스스로 열고 관리하는 생활권 공론장으로서, 행정이 정한 구획을 넘어 주민 스스로가 공간의 사용 방식과 의미를 재구성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도시공간*4)을 사회적 관계가 생산하는 산물로 규정한다. 그가 말한 ‘공간의 전유’란 거주하는 사람이 공간을 단순히 ‘이용’하는 수준을 넘어 삶의 의미를 다시 부여하여 재창조하는 행위를 뜻한다. 다만 이러한 전유의 과정은 항상 ‘추상공간’ 즉, 국가 행정, 자본, 정책 언어가 지배하는 공간과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도와 예산, 그리고 수치가 만들어내는 추상공간은 차이를 표준화해 관리하기 쉬운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주민이 스스로 공간을 재정의하고 전유할 때 기억과 감각이 살아있는 ‘차이의 공간’이 탄생한다. 여기서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는 주민이 도시의 공간을 직접 사용하거나 재배치할 권리,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할 권리, 나아가 공간 운영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제도화할 권리를 말한다. 이 권리는 거대한 행정단위가 아닌 더 작은 단위의 자치에서 실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결국 살기 좋은 도시는 관광객의 체류 시간을 늘리는 이벤트에서 오지 않는다. 가까운 결정, 전유 가능한 공간, 가볍고 촘촘한 생활 인프라, 주민이 주도하는 다층적 거버넌스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의제 결정권과 거부권, 예산 동의권이 생활권 단위로 내려와야 하는 이유다. 관광도 그때 건강해진다. 다른 이의 도시를 방문한 사람이 누군가의 ‘살고 싶은 일상’이 존중받는 장면을 목격할 때, 그 방문은 체험을 넘어 학습과 공감으로 확장된다.
지리산이음의 활동은 ‘생활권 민주주의’의 구체적 모델로서 공간의 전유가 가능한 구조를 설계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유공간과 네트워크가 확대될수록, 참여 역량이 있는 주민과 그렇지 못한 주민 사이의 간극이 커질 위험도 있다. 따라서 ‘더 잘게 쪼개고, 더 가깝게 참여’하는 것은 공간의 민주화를 향한 중요한 시도이지만, 그 민주화가 모두의 전유로 이어지려면 규칙에 대한 합의 과정의 투명성과 상호 간의 신뢰의 정치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행복한 도시는 축제와 메가 이벤트로 완성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경제지표는 오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주거비 상승과 공간의 상업화, 지역 상점의 쇠퇴와 이웃 관계의 약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오버투어리즘이 만든 피로는 주민의 삶을 밀어내고, 메가 이벤트가 지나간 자리는 부채와 공실, 관리의 부담만이 남는다. 행복은 잔치가 아니라 일상에서 온다. 안전한 길, 머물 수 있는 길목의 벤치, 이야기를 나눌 작은 공간이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 ‘살 만한 도시’는 숫자가 아니라 관계망의 튼튼함, 접근이 쉬운 생활 인프라, 공유공간의 지속성 그리고 가까운 의사결정 구조로 결정된다.
여기서 지역 자원을 공유하고 역할을 재배치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새 건물을 짓기보다 마을의 빈 교실, 작은 도서관, 유휴공간을 시간대와 용도에 따라 함께 쓰는 생활 거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때 공유의 공간은 소유가 아니라 ‘규칙’과 ‘리듬’으로 유지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활주기와 사용 시간이 공존하도록 조율하고, 합의된 규칙을 만들면 생활권의 공간을 재배치할 수 있다. 이 재배치의 핵심은 ‘시설’이 아니라 ‘리듬’이다. 더 높이, 더 많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어떤 시간대가 우선되는지, 서로의 리듬이 겹치거나 분리되는 타이밍을 어떻게 설계할지가 중요하다. 주민은 공간의 의미와 사용 방식을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며, 공유공간이 늘어날수록 권리와 책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공유공간이 구성된 뒤에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리듬으로 공간을 쓰고 고치고 돌보는 행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작은 실험들을 지원해야 한다. 큰 프로젝트 하나보다 작은 실험 서른 개를 지원하고 그 실패와 성공을 기록, 축적할 때 지역은 결정권을 갖게 된다. 관광 수요를 위해 통합하고 자본을 붓는 방식이 지역을 거칠게 만든다면, 생활권 단위의 다발적 실험은 지역을 촘촘하게 하고 회복력을 키운다. 이러한 과정은 지역을 구경의 대상에서 삶의 기반으로 바꾸는 일이다. 생활권 민주주의는 커다란 브리핑보다 작은 자리의 설계에서 살아난다.
결국 통합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끌어 내겠다는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지역은 더 잘게 쪼개져 스스로의 결정 권한이 높아질 때 단단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결정권을 갖는가다. 통합과 자본의 스케일을 줄이고 거주자의 권리와 실험의 비중을 늘릴 때 삶은 깊어지고 다양해진다. 결국 지역은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르페브르의 말을 다시 가져오면, 지역은 투쟁의 장이자 새로운 삶의 양식이 실험되는 공간이다.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더 큰 행정이 아니라, 더 가까운 권리다. 그 권리는 더 작은 단위의 자치에서 시작되며, 이는 소멸의 시간을 늦추고 내부의 힘으로부터 ‘피어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1) 신다은·김양진, “다 빼앗기고 이름까지 먹혔다”…통합 15년, 골병 든 마창진, 한겨레21, 2025. 8. 11.,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14
*2) 지리산은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등 3개도 5개 시군, 1,400여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3)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아름다운재단과 지리산이음이 공동 운영했으며, 2024년부터는 지리산이음이 이어받아 권역 간 네트워크, 아카이브, 포럼 협력 등 자체 사업으로 전환해 지속하고 있다.
*4) 이 글에서는 르페브르의 ‘도시공간’을 도시화된 사회관계가 작동하는 생활권 단위로 한정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이에 ‘도시’와 ‘지역(생활권)’을 문맥에 맞게 구분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