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적인 계엄 사태를 일으켰다가 탄핵되어 조기퇴장한 윤석열 정권의 문화정책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아직 좀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역문화정책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각종 지역문화정책 예산이나 사업이 사라진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겠지만 그뿐만 아니다. 일단 일각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듯 「지역문화진흥법」 제6조에 따라 문체부가 5년마다 수립하는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을 미수립했다. 제2차 기본계획이 2020년부터 2024년까지이니 그것이 종료된 지 반년이 넘었음에도, 제3차 기본계획(2025~2029)은 아직 수립되지 않고 있다. 법률에서 ‘할 수 있다’가 아닌 ‘하여야 한다’로 규정한 강행 규정임에도 문체부는 2024년을 넘길 때까지 이 의무를 외면했고, 2025년 상반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공청회, 전문가 협의, 실행 로드맵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의 기간 동안 관련 간담회, 정책토론회, 자문회의 운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하게 책임을 방기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문체부가 아무런 법적 근거조차 없는 『지방시대 지역문화정책 추진전략』을 2023년 3월 발표했다. 계획기간과도 전혀 안 맞고 법적근거도 없음에도 문체부는 이 문건을 제3차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처럼 간주하며, 광역지방자치단체에 이 전략을 바탕으로 시행계획을 수립·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윤석열 정부의 지역문화정책 난맥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사태라 할 수 있다.
방식에서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전에도 지적했듯 2000년대 이후 “지역”이란 단어로 대체되어왔던 “지방”이란 표현을 다시 꺼내들었다. 지역과 중앙의 관계를 다시 수직적 위계로 보며 지역을 단절적 조각으로 보는,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중앙의 식민적 영토로 보는 시각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윤석열 시대 등장했던 지역문화 관련 계획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무엇보다 자율적이고 개방적인 거버넌스를 통해 지역문화의 기본 체력을 키우는 것을 유도한다는 관점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계획들은 특성화라는 얄팍한 명분에 얹혀져서 지역문화 정책이 오로지 콘텐츠와 관광산업 같은 경제적 수익성을 올리는 도구로 인식하는 사업에 치중되었다. 물론 지역 고유의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고 거기에서 서사를 만들어 명소를 만들어서 관광산업을 키우는 것도 때때로 필요할 수 있다.(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제로 지역문화의 특성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것이 실종되어 버렸다. 바로 지역이 갖고 있는 생태계적 복합성, 문화적 소통의 구조를 전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은 한두가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특성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복잡성이 존재하는데 지역문화를 단지 수단이나 기능으로 산업편향적 시각은 지역문화생태계의 다양성을 지워버리며 단지 몇 개의 값 싼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최근 전주에 방문했다가 한옥마을에서 그렇게 분열적으로 왜소화된 지역문화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았다. 문화적 요소들이 맥락과 자기 서사를 완전히 상실한 채 싸구려 구경거리로 전락한 모습을 말이다. 만일 윤석열 정부가 지속되었다면, 그리고 윤정부가 추진하고자 했던 지역을 중앙의 영화시키는 “지방시대” 지역문화정책이 지속되었다면 이런 현상은 매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방식의 정책사업들이 엄청나게 확산되는 추세이다.
다행스럽게도 일단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지역문화정책의 방향은 대폭 수정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자치 관점의 지역문화정책을 구현해내는 것이 좋은 조건이냐하면 그렇지 않다. 사실 윤석열 정부가 노골적으로 퇴행적 지역문화정책을 대놓고 표면화한 것이지 그 이전의 정부에서도 지역의 문화자치가 제대로 구현된 적도 없고 그런 방향의 정책이 힘있게 추진된 적도 없다.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윤석열 정부의 지역문화정책 방향은 21세기 이후 여러 정부 하에서 문체부가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지역문화의 영토화의 흐름의 거친 민낯이 잠시 들어났던 것이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았다고 본다. 지역문화자치의 구현을 위해서는 넘어가야할 걸림돌이 많이 있다.
우선 첫 번째, 현재 정책의 공론장에서 지역문화자치에 대한 시각이 좁고 편협하다. 지역을 하나의 조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생태계가 역동하는 자율적 문화공동체로 형성해나가자는 것이 지역문화자치의 본질이라고 본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지역문화자치는 그런 관점에서 접근되었다기보다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지방자치제도의 흐름에 따라 정치·행정 자치의 부속항으로 취급되어왔다. 쉽게 얘기하면 중앙(문체부)의 문화정책·행정 사무를 광역과 기초에 이양시키는 관점에서 주로 정책이 변화해왔다. 물론 이 역시도 당연히 필요한 작업이다. 행정사무의 지역이양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단계적으로 예정되어있는 것이고 매우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 시절에 문체부의 지역문화사업 등이 지자체에 이양되고 예산이 대부분 사라진 것(2023년 결산 기준으로 476억 원에 달했던 지역문화진흥 정책사업은 2024년에 22억 원으로 줄었다가 다시 16억 원으로 감소했다.)은 매우 일방적인 방식이어서 문제이긴 했지만 윤 정부는 이를 지역문화분권의 실현이라고 포장했다. 윤 정부는 예술지원 정책의 상당수를 소위 ‘문화분권 논리’에 의해 지방이양을 전제로 조정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즉 정부는 특정한 사업을 티 나게 폐지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지역문화분권이라는 논리를 악용해서 지자체의 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프라 건설은 중앙정부가, 인프라 운영은 지자체라는, 얼핏 보면 그럴 듯 해 보이는 역할 분담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행정사무의 역할 분담은 지역문화자치를 실현하는 그릇(형식)으로서 세심하게 설계될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문체부의 지역문화에 대한 무대책이나 방치가 지역문화분권인가?
두 번째, 지역소멸로 단순화시켜 설명해버리는 것 또한 문제이지만 여하간 서울-수도권과 일부 광역도시나 산업기반을 갖고 있는 곳을 제외한 전반적인 지역들이 동력을 상실하며 쇠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율성과 자치에 기반한 지역문화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당장 경제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아니 그럴 것이란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콘텐츠·관광 분야로 사업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종류의 사업들이 성과를 예측하기 대단히 어렵고 많은 기반 투자와 꾸준한 정책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현재의 맥락 없는 단기적 사업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그럼에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있는 많은 지역들은 이런 수익 지향 사업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기 매우 어렵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이어지고 있고 여기 연동되어 국내 경제 상황 역시도 저성장 구조로 고착되고 있다는 점, 공공재원 상황도 악화되고 있다는 점도 문화자치 지향 정책의 활성화에 있어서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여전히 지역문화자치를 위한 기반 형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기반이란 시설과 제도와 같이 가시적인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지역문화진흥법 이후 지역문화재단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고 문재인 정부의 생활형SOC 사업 등을 포함한 다양한 계기를 통해 지역에는 꽤 많은 시설인프라가 확충되었다. 오히려 가시적인 기반이나 형식은 어느 정도 갖춰진 경우가 많아졌다. 문제는 비가시적인 영역에서의 기반이 잘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람”과 “관계”라고 본다. 지역에 문화자치를 구현할 사람과 그들의 관계가 존재하는가? 인구소멸이라고 하지만 아직 분명 사람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관계 형성은 어떤 면에서 21세기 이전보다도 후퇴한 측면이 있다. 단편적인 사례일 수 있지만 지난 몇 해 동안 몇몇 지역에서 예술인 공론장을 진행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측면이 과거에 비해서도 지역문화예술의 씬(Scene)의 부재가 심각해졌다는 점이었다.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지역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소수에 의해 척박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문재인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문화도시 사업이 지역문화애 대한 생태계적 변화를 가져올 것을 기대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초창기에 관계형성 등 문화생태계의 자발성, 자율성을 촉진시키는 지향이 분명 어느 정도 존재했지만 뒤로 갈수록 역시 가시적 성과 위주 정책사업의 한계로 도돌이표를 찍었다. 각각의 사업을 돌아보면 꽤나 반짝거리는 흥미로운 시도들도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과 정책행위자들에게 도시와 지역에 대해, 특히 지역의 문화적 측면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측면도 있다. 하지만 관제 공공사업의 틀을 넘어서는 시민의 호응이나 폭넓은 콘센서스(consensus)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명백히 한계가 존재했다.
문화도시란 표현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문화를 통해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이 전통적 문화주의자들의 관점에서의 문화, 즉 중산계급의 문화적 ‘교양’에 부합하는 지역 꾸미기이건,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적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창의적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지역 브랜딩 차원의 접근이건, 지역이 갖고 있는 다양한 공공 자원들을 문화적 방식의 협업과 선순환을 통해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던 말이다. 문화를 통해 지역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사회변화와 혁신에서 문화가 중요하게 기능해야 한다는 명분은 모두 문화가 지역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거두절미하고, 문화는 지역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무엇을, 어떤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역민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지역에 대해 갖는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현실에선 지역이 성장한다는 것이 지역의 지가가 올라간다는 것과 손쉽게 등치 되는 상황을 현실로 겪고 있으며 문화를 통한 다양한 지역의 계획들도 막상 현실에서는 그런 욕망 구조와 분리되기 어려운 현실을 여러 차례 목도하게 된다. 문화정책이란 것도 결국 현실의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그냥 현실을 인정하며 지역문화정책의 목표를 그런 현실의 개발 욕망의 포장재 정도로 사용할 것인가? 현재 실제로 상당한 정도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역이 주민들의 일상적 삶의 장소란 원칙적인 시각으로 되돌아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곳들은 외부인들에 의해 구경되는, 마케팅되는 장소이기 이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들이며 단일한 목표로 그 지향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문화도시, 지역문화의 모습은 그런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결국 꾸며진 시설이나 이벤트로 제한된다. 역사 전통을 기반으로 한 지역들은 이미 일상에서 멀어진, 단절된 전통을 대리체험하게 하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으며 젊음과 창의성이란 것도 하나의 상업적 기호가 되어버렸다. 2010년대 후반 대다수 시민들은 이미 숱하게 많은 도시 재생을 둘러싼 이벤트들을 경험했거나 체험하며 너무 뻔한 답들을 체화하고 있다. 발전전략으로서의 지역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이렇게 돌아가건 저렇게 질러가건 결국 상업적 매력으로 귀결되고 지가 상승을 기준으로 결론 내려진다. 새로운 상상의 자리는 계속 비어있다.
지역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지역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지역문화를 과거 유산에 대한 천착으로 쉽게 결론내리는 경향이 있어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지역문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활성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지역문화자치의 출발은 지역문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내리기에서 시작될 필요가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지역이란, 멈춤 없는 재개발과 신도시가 당근처럼 주어지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개발”이라는 범국민적 신앙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개발주의에 대한 문화적 방법론이 다소 감속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시민들에게 문화적으로 지역을 인지하고 계획하는 것은, 빠르게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을 우회해서 가는 비효율적인 여정으로 보이거나 일상적 현실과는 별개의 시뮬라르크의 경관으로 보여질 수 있다. 기능적 방법론이 아닌 지향과 관점 그 자체에서 다른 해답을 향한 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문적 도시 읽기가 필요하다. 인문학에 대해 속류화된 이해가 워낙 편협하기 때문에 오해 소지가 있지만 인문학의 본령은 인간의 문제, 인간 사이의 문제, 인간이 만든 세상의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통섭이란 개념을 쓰기 이전부터 통섭의 접근법은 인문의 기본 전제였다. 지역을 살아가는 다양한 구성원의 삶에 대하여 분절적, 기능적 사고를 넘어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조감을 다시 재현해보는 것은 우리가 평면적 지도와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내는 단편적 사업 계획이 간과하거나 생략하는 다양한 삶의 지평을 볼 수 있게 만들며 새로운 상상과 입체적 서사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를 둘러싼 지엽적 욕망을 넘어서 새로운 일상의 가능성으로 기능할 수 있다. 지역문화자치 역시 이런 인문적 도시 읽기의 다양한 활성화와 연결을 통해 주민들에게 얼핏 현실적이지만 실은 달성될 수 없는 지역에 대한 기존의 상상을 균열시키는 새롭고 불온한 상상을 끄집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질러갈 수 있는 길도, 묘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