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는 ‘성장’에 매달려 왔다. 경제성장률, 산업화 지표, 도시 규모의 확장은 곧 잘사는 사회, 더 나은 삶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 기후위기, 지역소멸, 고립과 불안은 결국 무한한 경제성장은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문화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주의는 문화의 언어마저 효율과 생산성의 논리로 바꾸었다. 문화정책 역시 성장주의 세계관 속에서 국가·행정 권력 주도, 서울·수도권 중심, 양적 팽창과 경쟁 중심의 문화사업을 쏟아내 왔다. 최대한 빨리, 가장 많이,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한 성장주의, 성과주의, 결과주의 문화사업을 압축적으로 추진해 온 셈이다. 이에 예술은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 되었고, 문화정책은 창의적 표현의 보장보다 양적 성과와 경제적 파급효과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했다. 문화재단의 예산은 늘어났고, 사업의 개수는 증가했으나 그저 더 큰 사업, 더 화려한 결과를 추구하면서 문화가 지녀야 할 고유한 질문과 태도를 등한시해 왔다. 겉으로는 지역의 가치를 주장하지만, 배타적인 지역 성장주의와 지역 간 경쟁주의만이 지역문화 생태계에서 반복되고 말았다. 지역 간 경쟁은 지역공동체의 복원을 가로막고, 주민 스스로 지역문화를 일굴 기회조차 차단했다. 문화는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화정책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국민은 수혜자이거나 대상일 뿐, 창작의 주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성장하지 않는 도시’를 지향하며 문화정책의 재구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정책이 행정과 전문가만의 몫이 아닌, 시민 개개인의 일상 속에서 기획되고 실천될 수 있도록 삶·체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역주민이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성장하지 않는 도시, 성장 대신 ‘사람’과 ‘삶’을 중심에 두는 도시를 맞이할 때다.
평택시문화재단의 [한 사람이 온다[(2024) 프로젝트는 지역주민이 문화의 수혜자가 아닌 기획자이자 제안자로 등장한다. 거창한 선언도 복잡한 구조도 없이, 다만 지역의 한 사람 한 사람, 특히 ‘1인가구’의 삶을 어떻게 문화예술로 기획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 시도다.
지역 예술가와 30대부터 80대까지 생애주기별 1인가구를 모집하여 예술가-시민의 협력 구조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이들은 한 사람의 감정, 생활, 삶의 공간을 경청하며 1인가구를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개발하고 운영했다. 예술가나 전문가가 기획하고 참여자가 따라가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가와 1인가구인 당사자가 협력하여 콘텐츠를 설계하고 실험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이로써 ‘대상’이 아닌 ‘만드는 사람’이 되어 참여자가 곧 기획자이며, 예술가와 참여자의 구분을 사라지도록 하여 1인칭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특히 진행 과정에서 지역의 공방들과도 협력하여 지역의 공간이 단순한 시설을 넘어 ‘문화자치 실험소’로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공간이 열리고, 시민이 기획자로 등장하며, 예술이 삶에 스며드는 경험을 타인과 함께 만들어 내는 과정은 문화의 본질을 그대로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재단은 프로그램 설계부터 운영까지 많은 권한을 참여자들에게 위임하며 ‘관리자’가 아닌 ‘동행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문화자치는 ‘의지를 가진 개인’에서 비롯된다. 참여자는 예술 혹은 기획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지만, 삶의 필요로부터 콘텐츠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문화는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임을 체험했다. 나아가 이 프로젝트는 단지 콘텐츠 기획에서 멈추지 않고 참여자들과 함께 한 사람의 삶을 공유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하고 순회 상영을 통해 공적 환대의 장을 마련했다. 이는 행정의 요구인 ‘성과물’ 중심 접근과 결을 달리한다. 예산 효율성과 양적 지표를 중심으로 짜인 기존 문화사업 패러다임을 거스른 이 프로젝트는 ‘문화는 사람이 만든다’는 기본 원칙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평택 사람학교 ‘한 사람이 온다’ 추진절차(평택시문화재단)
평택 사람학교 ‘한 사람이 온다’ 다큐멘터리 영화 포스터(평택시문화재단)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이 지속 가능한 구조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프로젝트가 8월부터 12월까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기획자, 참여자, 장소 간 연결은 대부분 해체되었으며, 시민 주도의 네트워크가 공공의 집중적 지원 이후 유지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지 못했다. 참여자들은 ‘함께해서 좋았다’는 감상은 남겼지만, 자신이 ‘지역문화의 주체’로 자리한다는 자각이나 인식이 약했다. 이는 문화 실천이 시민의 정치성과 연결되지 못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이 고립된 기획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기획 주체로 재등장할 수 있는 후속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문화재단은 지역 내 소규모 공동체를 조성할 수 있도록 하여 이들이 자발적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매 회차마다 참여자의 경험을 기록·공유하는 오픈 플랫폼을 운영하여 시민기획자의 데이터베이스를 쌓고, 이후 다른 사업과 교차 참여, 연계를 유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 즐거운 체험 그 이상으로 인식하기 위해 왜 우리가 문화를 직접 만들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기획 과정부터 던지며 교육과 기록, 공유 방식의 내면화를 위한 시간이 프로젝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이 정성 어린 실험이 하나의 체계가 되어 지역 전체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성장하지 않는 도시’는 무능한 도시가 아니다. 성장하지 않는 도시는 곧 더 이상 효율성과 확장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 도시, 즉 ‘사람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도시’를 의미한다. 이런 도시는 느리게 움직이며, 관계의 밀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삶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한다. 문화는 이 도시에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전시’가 아니라 ‘기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원이 진행한 기록 작업들은 단순히 옛 문화를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지역민의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와 기록, 기억을 문화의 기초 자원으로 전환함으로써, 중앙이 아닌 지역 스스로 문화를 정의할 수 있게 한다.
평택문화원의 ‘팽성생활사박물관’은 행정이나 학계가 아닌 지역민의 시선으로 삶의 역사를 기록하며, 팽성이라는 지역에 축적된 미시사적 경험들을 문화 자산으로 바꿔내고 있다. 특히 미군기지 인근 지역이라는 팽성의 특수한 사회문화적 조건은 ‘누락된 역사’를 복원하고, 그 기억의 소유자를 시민으로 되돌리는 중요한 시도로 해석된다. 여기서 문화는 전시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 기능한다.
의정부문화원의 ‘의정부기억저장소’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간은 의정부 사람들의 삶을 모으고 기록하여 역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조각 조각 흩어진 개인의 삶을 찾아내고 개인의 생애사, 장소에 대한 기억, 일상의 단편들을 모으고 전시하여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 보인다. 이 과정에서 지역주민은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자로 재위치되며, 아카이빙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기억이 연대된 집단의 정체성을 창출하며,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닌 문화정체성의 구성 행위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문화는 공공성과 정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천문화원은 외부 전문가 주도 방식에서 벗어나, 주민 스스로 마을지의 기록 주체가 되는 모델을 정립했다. 시민기록자를 양성하고 시민기록자와 마을주민이 만나 삶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기록할지 주민 스스로 선택하며 마을의 역사를 당사자의 언어로 다시 쓰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2019년에 발간한 『왕골 자릿골 이야기』는 이천의 조읍리 주민들이 기획과 채록, 편집, 디자인 등 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례다. 이천문화원의 마을지는 과거 중심의 향토사 형식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누가 말하느냐’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문화자치는 중앙정부의 권한 일부를 이양받는 형식의 분권이 아니다. 지역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자원을 발굴하며,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자율적 역량과 구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현재 ‘분권’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틀 안에서 지역이 아주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지역의 문화정책은 여전히 중앙에서 주도하는 공모 중심, 평가 중심, 표준화 중심에 편입되며, 지역은 ‘성과를 생산하는 하위 기관’으로 고정되어 지역주민은 ‘대상화된 참여자’로 머물게 된다. 문화정책의 언어는 여전히 수직적이며, 문화자치란 말도 대부분 선언에 그칠 뿐 실질적 권한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위 사례들은 지역주민들이 예술가이자 기획자로 등장하고, 지역문화원은 기록의 관리자가 아닌 관계의 조율자로 역할한다. 이러한 문화자치의 실천은 중앙 중심 문화정책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문화의 해석권과 구성권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이다.
지역문화원은 단순히 전통문화 계승 기관이나 문화 행사 운영 기관이 아니다. 문화원은 문화자치 실천을 위한 전방의 현장이며, 시민 주체의 문화권을 발굴하고 기록하며 확산하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문화민주주의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전략과 행동이 요구된다. 기록 이후 그것이 지역 교육, 지역 축제, 정책 등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록의 확산 전략이 필요하며, 시민기록자의 역할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지역 기록공동체 거버넌스 구성 등 네트워크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또 기억을 수집한 이후 지역사회에 어떤 사회적 변화와 인식 전환을 가져왔는가에 대한 피드백 구조를 마련해야 하며, 수집의 주체가 일부 주민으로 한정되지 않도록 기억 수집자와 주체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사람이 더 이상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소모되지 않는 도시, 속도가 아니라 연결과 기억, 생활의 리듬이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는 문화가 다시금 생명력을 얻는다.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이야기와 감정, 몸의 감각과 관계망이 예술의 재료가 되고, 행정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시민이 문화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문화정책은 예술 작품이나 대형 프로젝트에만 집중하지 않아야 한다. 시민의 말과 기억, 관계와 감정이 정책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평택, 의정부, 이천의 사례는 모두 문화가 제도 이전의 ‘삶의 방식’임을 증명하는 실천들이다. 이는 도시의 미래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나누는 그 순간부터 문화는 제도나 시설이 아닌 ‘사람’에서 시작된다. 문화는 단지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나 창작하고 참여하며 결정하는 권리의 영역이어야 한다.
도시는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다. 대신 ‘살아갈 이유’를 회복해야 한다. 문화는 이 회복의 언어이며, 탈성장 시대의 윤리를 구성하는 실천이다.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정책, 서로를 기억하고 돌보는 공간, 각자의 속도로 살아도 되는 사회. 이 새로운 도시에서 문화는 단지 수단이나 목적이 아닌, 삶 자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