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지역/삶터(Habitation)는 고정된 것은 아니다. 지역 정체성이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예를 들어 신도시가 있다고 가정할 때, 과연 ‘신도시에 문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오히려 필요하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지역문화를 주목하며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적 자치’의 지역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발전과 진보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탈성장 시대를 맞았지만, 지역·지역문화·지역 정체성을 둘러싼 우리의 관념은 여전히 재래의 관념 및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며 상투적인 지역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일까. 서울 중심 지향적 논리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체제 전환의 실험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지역 내 작은 시도들을 주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지역과 지역문화에 관한 한, 역발상 내지는 역류(逆流)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일본 환경학자 후지하라 다쓰시가 『분해의 철학』(2022)에서 강조하듯이, 이제는 지역과 지역문화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덧셈’과 ‘곱셈’을 숭배하려는 근대의 신화에서 벗어나 ‘뺄셈’이며 ‘나눗셈’인 세계로 시선과 태도를 전면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역문화에 대한 역발상을 구상할 때 ‘과제 선진국’인 일본의 지역 소멸 대응 경험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일본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일종의 ‘후퇴학’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한 걸음의 뒤의 세상: ‘후퇴’에서 찾은 생존법』(이숲 2024)에서 이제는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제도적 후퇴’ 방안을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 정부와 자본은 인위적으로 과소(寡少) 지역을 만들어낸다면서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이 일본 전역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도시 일극화(一極化) 흐름에 맞서는 방식은 ‘집중’과 ‘분산’이라는 두 개의 시나리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서서히 후퇴하려면 야생 영역과 인간 영역 사이의 경계선을 지키는 파수꾼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나는 그가 강조한 ‘파수꾼’이라는 말을 ‘지역문화’로 번역해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믿는다.
01. 우치다 타쓰루 외, 『한 걸음 뒤의 세상』 표지. 우치다 타쓰루는 도시 일극화 흐름에 맞서 ‘후퇴학’을 제안하며 지역을 바라보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다.
우치다 타쓰루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직 낯설다. 하지만 음악의 새로움이란 ‘음계(音界)’ 바깥 세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지역과 지역문화에 대한 기존의 담론과 정책이 너무나 상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요청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온통 ‘활성화’ 위주의 정책사업에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지역과 지역문화를 말할 때 유통되는 사고방식과 언어 자체를 바꿀 때가 되었다.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일본 시코쿠[西國] 지역 도쿠시마현 가미야마 사례는 “1인칭으로 내가 하겠다 하는 사람이 없는 프로젝트는 전략으로 채택할 수 없다”고 한 문화자치와 민관 거버넌스 협력에서 가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1인칭의 마음’이 부재한 지역문화 정책사업은 절대 오래 갈 수 없다.
지역의 토양(soil)은 ‘지렁이’ 같은 생물들이 건강하게 바꾼다. 그처럼 지역의 새로운 주체들이 기존의 상투적인 이야기 대신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활동이 중요하다. 그래야 내가 사는 지역/삶터를 공동체, 돌봄, 자치, 여성주의 실천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하며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정책 당국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와 같은 시도는 너무나 느리고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변화들 속에서 우리 욕망의 배열이 바뀌고, 작은 것 속에서 큰 흐름이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시간이 축적되지 않는 지역문화는 지역 주민들의 것이 될 수 없다.
결국,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사람들이 쓴다. 하지만 지역과 지역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일국(一國)적 시각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 이주인권 활동가 겸 연구자인 우춘희 선생이 쓴 『깻잎 투쟁기』(2022)를 보면 농업 비자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루에 깻잎 1만 장을 따야만 우리가 밥상에서 깻잎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1만 장이라는 숫자가 상상되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지역 소멸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정책이나 시선은 여전히 자국민 위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이러한 견고한 틀을 깨고자 하는 시도들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지난 2020년 충북 옥천군 내 아홉 개 읍·면에서 결혼이주여성들이 스스로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를 결성한 사례는 매우 이채롭다. 옥천군 내 결혼이주여성 120여 명이 모여 결혼이주여성의 노동권과 사회적 성원권을 위해 맹렬히 활동한다.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옥천신문]을 비롯한 옥천군 시민사회가 결혼이주여성 지원을 위한 공론장을 만들었고, 옥천군 조례 제정을 주도하는 등 결혼이주여성의 권리를 위한 연대를 꾸준히 했기 때문이었다. 2022년 11월에는 이주여성들의 안정적인 당사자운동을 위해 작은 ‘공간’을 꾸렸다. 이주여성들이 위급할 때 자체 공간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 노릇을 한다.
02. 우춘희, 『깻잎투쟁기』 표지. 우리는 지역과 지역문화를 사유할 때 일국(一國)주의의 관점을 벗어날 수 있을까.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며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지역·지역문화 정책은 얼마나 달라질까. 이재명 정부의 지역 정책은 지역균형발전과 저출생·고령화 대응 기조 아래 앞으로 정책이 구체화될 것이다. 회복·성장·행복의 3대 비전과 15대 정책 과제 안에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5대 문화강국’이라는 정책 목표에서 보듯이, 이재명 정부 또한 ‘중앙’의 관점에서 지역과 지역문화 정책을 추진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새 정부 정책 기조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겠지만, 지난 6월 18일 문체부가 국정기획위원회 ‘사회2’ 분과에 제출한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 파동은 중앙정부가 지역을 바라보는 철학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여러 논자가 비판했듯이, 지역에 대한 정책 비전 없이 자체 사업을 나열하는 것으로 ‘땜질’하려는 문체부의 관료주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2024년 12월 18일에 문체부가 지역문화진흥법 개정을 시도하며 지역 현장의 목소리 대신에 관료들의 입김이 더 작용하는 방식으로 ‘개악’하려 했다는 점은 중앙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의 철회 현상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문체부의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지역문화자치와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지역 문화 접근성을 높이고, 지속적인 인력 유입과 정착을 도모하는 동시에, 생활 속 문화·여가 활동을 통해 국민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정책은 실상 하나마나한 주장에 불과하다. 특히 ‘향유권’ 기회 확대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지역과 지역문화를 바라보는 문체부의 시선은 아직도 공급자 중심적이고, 시혜자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문체부는 저 1970년대 국민총력(總力) 시대의 산물로서 지역과 지역문화를 인식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지역문화자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문화자치에 대한 비전과 기본 구상을 지역과 공유하려는 협력 체계 구축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지역 성장 담론과 온갖 활성화 정책을 나열하는 것이 지역문화 활성화 정책은 아니다. 저 국민총력 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 ‘촌력(村力)’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지역 생태계 기반을 조성하려는 ‘보충성의 원리’에 근거한 정책 비전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서울대 지리학과 신혜란 교수가 [두산인문극장 2025: 지역 LOCAL] 강연(2025.4.21.)에서 지역 내 ‘다양성의 장소 만들기’를 강조하며, “이주민들 사이의 관계가 단지 생존을 위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새로운 지역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발언은 중요한 참조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이주민이란 외국인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귀농귀촌자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한탄만 하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가장 먼저 내가 사는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을 중앙 내지는 서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눈’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한 일류 선진국이 되었다고 우쭐해할 게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는 출판사 하나, 잡지 하나, 서점 하나 없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서점 하나 없는 자치단체가 7곳이 되고, 서점 소멸 예정 지역이 29곳으로 추산되는 지역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 전문 극단(劇團) 한 곳 없는 지역을 꼽으라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초라한 경제동물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런데 지역 소멸을 운운하는 시대, 어떤 지역은 사라지는 도시가 아니라 ‘살아지는’ 도시가 되고 있다. 그 영업 비밀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고향사랑기부제 추진 첫해였던 2023년, 숫자이자 삶으로서 인구(人口)를 생각하며 일자리 이야기를 넘어 로컬이라서 꿈꿀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非凡)한 힘을 주목하고자 하는 지역/삶터는 조금씩 희망의 근거를 찾아가는 사례를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국민 총력(總力) 시대의 관점과 태도가 아니라 ‘시골력’을 의미하는 촌력(村力)을 존중하는 시대정신이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최근 충주시 홍보맨을 비롯해 충주시 행정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반값여행’으로 각광받는 전남 강진군 등의 사례는 그런 시선의 전환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지역에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vibe)를 형성하고 문화·예술을 통해 적절한 정책사업을 재미있게 추진해야 마땅하다.
03. 지역문화포럼 사진
결국, 문화는 사람이다. 이 명제를 적극 신뢰하며, ‘사람’을 키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 지금의 귀촌(歸村) 정책은 농업·농민·농촌을 귀하여 생각하는 귀촌(貴村)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며, 일본 가미야마 사례처럼 총력(總力)이 아니라 촌력(村力)을 기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지역 스스로 재미있게 추진해야 하며, 적재적소가 아니라 ‘적소적재’를 고민하려는 지역 인력양성 사업 또한 즐겁게 시행해야 한다. 최근 충북 충주시의 인력 양성 사업이 주목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지역을 존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젊은 사람(여성)을 환대하려는 정책사업을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인력(人力)이 지역에서 ‘자석 같은 향기’(이태석)를 내뿜는 ‘인력(引力)’의 힘으로 작동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사라지는 도시가 아니라 ‘살아지는’ 도시로 전환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어쩌면 그런 지역/삶터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나우토피아(nowtopia, 여기 천국)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런 나우토피아는 ‘뜨면 그만’인 관광객의 시선만을 의식해 추진되는 사업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지역과 지역문화에 대해 ‘후퇴학’의 관점을 탑재하자는 나의 제안이 결코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같이 걸어가면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