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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사람이 귀한 시대, 사람을 통한 성장과 확장을 꿈꾸며지역문화, 상처와 희망
강승진 | 전 춘천문화도시센터장
들어가며: 지역문화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

오랜만에 지역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동안에도 포럼이나 컨퍼런스는 많았지만, 지역문화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와 어려움, 사라진 담론과 현장성, 그럼에도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따뜻한 온기와 진심 등 진정성 있는 지역문화의 이야기와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드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안정감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 "지역문화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면 이렇게 바뀐다. 지역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는 정책과 사업, 예산, 기관과 시스템 등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스스로 서서 지금까지 살아온 실천과 실행의 방향들을 지속할 수 있는가? 지속할 수 있다면 그 힘은 무엇인가? 바로 그 힘을 찾는 것이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라고 본다.

그런데 나에게 지역문화의 "상처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 솔직히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였다. 지난 2월 퇴사 이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두 가지다. 하나는 "그렇게 일을 많이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라며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선이고, 또 하나는 "그래, 할 만큼 했지. 이제 좀 쉴 때가 됐어. 잘 퇴사했어"라는 시선이다. 하나의 시선은 일하는 과정과 결과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을 거라는 걱정이고 또 하나의 시선은 다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의 기대감과 응원이 담겨있었다. 그렇듯 오늘 발제는 지난 시기 내러티브를 통해 담론을 정리해 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최근 안타까움이 있다. 나에게 오는 전화 중 일부는 ‘사람 좀 찾아달라’다. 지역에서 무슨 일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 또는 우리 지역이 어떤 정책사업에 선정되어서 중간 조직을 만들게 되었는데 좋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내용들이다. 최근에도 강원도의 희망을 만들어 갈 친구들을 좀 모아서 그 친구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고 서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업을 해보고 싶다며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친구들까지 머리를 굴려도 막상 떠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전화를 2~3번 돌려서 나보다 그 지역과 사람에 더 많이 접속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눌 때 눈을 반짝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그런 인재를 찾기가 이제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분명 예전에는 꽤 많았는데,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역에는 문화를 매개로, 필요로 하는 공공사업과 정책들이 많아졌다. 10년, 15년 전과 비교하면 활동의 영역도, 예산의 규모도 분명 늘어났다. 그런데 왜 우리는 추천할 사람조차 찾기 힘든 현실에 부딪히게 된 것일까?

답은 어쩌면 명확하다. 깊은 상처를 안고 현장을 떠났거나, 헐값에 가까운 대우에 지쳐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했으며, 혹은 지역문화 언저리에서 각광받는 로컬 브랜딩이나 비즈니스 영역으로 흡수되었다. 그곳은 적어도 생계에 있어 우리보다 낫기 때문이다. 특히 활동력 있고 무언가를 도모할 줄 알았던 인재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3년, 지역문화에서 사라진 것들

새 정부가 출범했으니, 지난 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지난 3년간 우리 지역문화에서 사라진 것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물론 더 많겠지만, 세 가지로 압축해 보자.

첫째, '사람'을 키울 예산과 그 기반이 되는 법의 역할이 상실되었다. 2014년 제정된 지역문화진흥법은 생활문화, 지역문화, 문화도시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활동 영역을 넓혀준 중요한 토대였다. 하지만 2020년 이후 그 기능과 역할이 제대로 작동했다고 보기 어렵다. 본래라면 5년 단위의 지역문화진흥계획이 수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광역과 기초 단위의 시행계획이 마련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생략된 채 '지방 문화정책 추진전략'이라는 보고서가 그 자리를 갈음하라는 지시로 대체되었다. 심지어 법에 명시된 대표적인 지역문화 인력양성 사업은 3년 지원 약속을 스스로 저버린 채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둘째, 담론과 협의의 과정이 사라지고 중앙의 관료적 오만과 지역 행정의 그림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양한 문화적 생각과 의견을 나누고 전달하던 공론의 장이 막혔다.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통로가 관료의 지시와 결정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창구로 전락했다. 그러자 지역의 문화행정 역시 관료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빠르게 답습하기 시작했다. 문화재단을 포함한 현장 기관들이 모든 것을 행정 논리로 대체하려 들었고, 그 과정에서 지역의 활동가와 기획자들은 저임금·단기 노동력으로 활용되다 소진되면 외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셋째,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분 아래 작은 시도들의 기회가 사라지고, 경제 환원주의의 덫에 갇혔다. 현 정부 들어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들려온다. 소수의 단체에 거액을 지원하는 방식은, 그 이면에서 100개의 단체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천 개의 소중한 활동 기회를 빼앗는 것과 같았다. 모든 가치를 경제적 성과로 측정하고 문화를 숫자로만 평가하는 경제 환원주의가 지난 시간 더더욱 횡행했다. 이렇게 현장의 목소리가 뭉개진 자리마다 깊은 상처가 남았고, 수많은 이들이 그 현장을 등졌다.

개인적 상처: 문화와 예술의 혼재 속에서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더해, 우리 주변의 이해관계자들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들이 주는 상처도 깊었다. 내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아마 "이 사업은 그런 사업이 아닙니다!"였을 것이다. 아무리 설득하고 설명하며 이해를 구해도, 같은 오해를 반복하는 이들 앞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상처는 '문화'와 '예술'의 개념을 둘러싼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문화와 예술을 명확히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두 개념을 동일시하거나 재단해 버린다. 특히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하며 예술가들로부터는 '문화도시는 예술도시' 사업이라는 오해를 끊임없이 받았다. 왜 예술가 직접 지원, 창작지원금을 더 늘리지 않느냐며 "지역에 돈이 왔다는데"라는 식의 압박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사업 초기부터 "문화도시는 예술도시 사업이 아닙니다. 문화도시는 예술가를 직접 지원하는 사업이 아닙니다"라고 거듭 밝혔다. 그럼에도 기득권을 가진 일부 예술가들의 오해와 왜곡은 계속되었고, 다양한 공격은 문화도시를 통해 문화적 도시를 만들어가려는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편으로는 문화가 가진 폭넓은 함의와 개념을 이해관계자들에게 더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문화는 지식으로 습득되기보다 체험으로 이해되는 '경험재'이기에 그만큼 소통에 더 큰 노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복기의 시간: 문화이론을 통한 성찰

이 시점에서 부산대 신지은 교수의 논문이 들어왔다. 논문은 법정문화도시 사업을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을 통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짐멜은 문화를 ‘주관문화’와 ‘객관문화’로 구분한다. 축제, 공간, 콘텐츠 등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은 ‘객관문화’에 불과하며, 이것이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와 삶의 의미를 구성하고 인격을 고양하는 ‘주관문화’로 발전하지 못할 때 ‘문화의 비극’이 발생한다고 했다. 문화도시 사업이 추구했던 ‘문화시민’은 과연 문화적 인간이었을까? 오히려 창업과 활동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형 인간’에 가깝지 않았나 하고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 왔다.

진정한 문화적 인간은 "세상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고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고 짐멜은 이야기 하는데 그동은 우리는 과연 그러한 인간을 길러내는 데 기여했는지 깊은 생각이 들었다.

희망의 근거: 사람과 관계의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다행히 우리 곁에는 아직 '사람'이 남아있다. 묵묵히 현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힘'이야말로 희망의 가장 큰 근거이다. 사람이 사람을 치유하는 힘, 그것이 바로 문화의 본질적인 힘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분명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든 경험도 있었다. 코로나19와 같은 위기 속에서 지역의 문화적 관계망은 ‘문화안전망’으로서 기능했다. ‘문화슬세권’이라는 개념처럼, 가까운 이웃과 관계 맺고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다정함의 힘을 확인했던 시간이었다.

이제 지역은 보다 적극적으로 ‘사람경영’에 나서야 한다. 핵심은 지역 주민, 문화시민, 활동가들이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큰 경제적 보상 없이도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자기 효능감과 역할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다.

나아갈 방향: 사람 중심의 안녕공동체

이제 지역과 문화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을 시작으로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들리기나 하겠는가’ 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방관 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이야기 해야 할 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생태계의 공론장을 재건하는 것이다. 각 주체들이 참여하는 문화거버넌스와 다양한 대화모임을 통해 지역문화가 나아갈 방향을 함께 논의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발표될 국정과제 문화예술분야에 지역문화의 자리가 많지 않다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 보다는 지역 균형·분권·자치라는 담론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지역에서 문화의 역할과 쓰임이 다양해진 만큼.

문화는 태도를 결정하는 힘이자 지역과 삶의 시간을 복원하는 힘이다. 지역문화의 희망은 사람 중심의 안녕공동체로 향하는 길에 있다.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기쁨’을 경험한 자아가 ‘나라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타인의 고통까지 돌보는 힘을 기르고, ‘기댈 수 있는 사람,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 희망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역문화가 진정으로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를 치유하고 지지하는 문화의 힘에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꿈꾸고 만들어가야 할 지역문화의 진정한 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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