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해월 최시형이 이천 설성의 앵산동에 피신해 있을 때다. 우리는 제사상을 차릴 때 벽 쪽에 신위를 두고 음식을 차린다. 그쪽에 신이 내리기 때문이다. 벽을 향해 제사를 차리는 향벽설위다. 그런데 해월신사는 이 제사상을 거꾸로 돌려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절하라고 했다. ‘향아설위’(向我設位)다. 바로 ‘나’를 향해 절하라는 것이다. 조상님께 절하지 말고 내 안에 모신 한울님께 절하라는 것이다. 과거의 제사는 죽은 사람, 귀신이 중심이었다. 향아설위 제사는 살아있는 사람, 나와 후손을 중심에 둔다. 제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제사의 주체가 바뀌고 제사상의 방향이 바뀌었다. 천지가 개벽할 제사 예법의 ‘전환’이다. 이제는 나약하고 힘없는 백성이라고 깔보지 말아라. 다 한울님을 그 안에 모시고 계시다.
이동준 발제자
여기서 하나 더! 힘없는 백성이 여기서 우쭐대며 제사상을 받으려는 순간 그도 귀신이 그랬던 것처럼 내쫓김을 당할 처지가 되고 만다. 왜냐고? 제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것은 제 안에 음식물로 들어온 한울님을 모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자기 생명을 음식으로 내어놓은 그 생명의 희생을 통해 나의 생명을 이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밖에서 한울님을 찾았다. 그런데 한울님은 내 안에 계시다. 제사음식을 먹는 순간 나는 그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한다. 여기 지금 제사상에 희생제물로, 음식으로 올라온 뭇 생명들을 내 안에 모셔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껏 ‘소화작용’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일이다.
해월 최시형은 ‘삼경’(三敬)을 이야기했다. 하늘을 모시고, 사람을 모시며, 사물을 모시라는 말이다. 하늘을 모시기는 쉽다. 높기 때문이다. 나보다 높은 사람을 모시기도 쉽다. 하지만 나보다 낮은 사람을 모시기는 어렵다. 그럼 사물을 모시는 일은 어떤가? 어렵다.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왜 그런가? 내게 복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소유물,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나의 영토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한 말이다. 그런데 해월은 사물을 모시라고 한다. 참 이상도 하지. 사람들은 그것을 물건이 아니라 사물이라 부르면서 왜 ‘섬길’ 사(事)자를 붙이고 있는가? 물은 생명의 근원이요 포대이기 때문이다.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공동체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내 안에 모시는 일,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 우리는 이 사물을 ‘음식’이라고 부르고 이 일을 ‘요리’, ‘식사’ 또는 ‘소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사물이 음식으로 내 앞에 놓이기 전에는 하나의 ‘생명’이었다. 식사와 소화는 내 밖에 있는 생명을 내 안으로 모시는 일이다. 한마디로 ‘먹는 일’이다. ‘먹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먹기 전에 먹히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우리에게 자신을 음식으로, 식량으로 내어준 생명에 대한 ‘감사’와 그 생명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먹는 행위는 거룩하다. 희생이 치러지는 종교적 제의의 과정이 그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너를 내 안에, 나를 너에게 의탁하는 일 – 그것이 사물을 모시라는 말의 의미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은 밖의 생명을 내 안으로 ‘모셔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먹는 일’이다. 이천식천은 나를 밖의 생명에게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먹히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속죄와 용서, 애도와 감사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일방적인 폭력과 희생이 먼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먹는 자도 먹히는 자의 의사를 묻거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먹는 일을 저지른다. 그런 이유로 모든 생명의 먹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그의 ‘죄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먹고 먹히는 가혹한 세상에서 생명윤리는 어떻게 가능할까? 한울의 중재가 없으면 만물의 생명윤리는 세워질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일은 그것이 만물을 키우는 일이 되기에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넘어간다. 생명 유지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도 인간은 수많은 생명을 죽인다. 오늘 획득한 먹잇감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분의 식량을 저장하고 비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명을 죽음으로 동원하고 타자화시킨다. 제비의 알을 깨뜨리지 않아도, 초목의 싹을 뽑지 않아도, 꽃가지를 꺾지 않아도 우리의 생명 유지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명 유지 말고도 다른 생명을 해쳐야 할 이기적인 이유를 수없이 만들어왔다. 내일 나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오늘 생명을 식량으로 미리 확보해야 안심할 수 있다. 누군가 내가 획득한 먹잇감을 호시탐탐 노리며 빼앗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카인의 불안심리가 여기서 기원한다.
누구든지 너를 해치면 그는 그 벌을 일곱 배나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먼저 생명을 해쳐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끔찍한 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살려면 누군가의 생명을 먹잇감으로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한울님이 먼저 자기 자신을 먹잇감으로 내어놓아야 한다. 그 어떤 생명도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히는 일’의 진상은 바로 나를 ‘먹게 하는 일’임이 드러난다. 바로 한울의 ‘희생’이다. 다음에는 한울이 뭇 생명에게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먹여야 한다.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계속해서 먹잇감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바로 한울의 ‘돌봄’이다. 한울의 중재는 먹이고, 기르고, 돌보는 일이다. 이천식천은 그래서 한울이 한울을 ‘먹이는 일’로 귀결된다. 해월의 양천주(養天主)는 모든 종류의 죽임에 반대해서 만물을 먹이고 기르고 살리는 일이다.
모든 음식은 원래 ‘생명’이었다. 먹이가 되고 고기가 되기 전에 이들 생명은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친척이었다. 그래서 음식을 먹기 전에 우리는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어준 그 이름 없는 생명들을 애도해야 하며 이 생명을 먹음으로 나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천도교에서 ‘식고’(食告)를, 많은 종교들에서 ‘식사기도’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게 되는 현실은 끔찍스럽다. 우리는 미슐랭 가이드를 따라 파인 다이닝을 찾아다니며 후기와 평점을 달고 집요하게 맛을 탐닉하면서 몇 시간이고 긴 줄을 서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
‘요리’는 인류가 생명을 음식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먹방’은 오직 맛과 즐김이라는 목적을 위해 우리가 생명을 얼마나 물건으로 전락시켰는지 보여준다. 거기에는 생명도,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태도도 사라지고 오직 맛과 식욕을 대상으로 전락한 ‘식재료’가 놓여있을 뿐이다. 과거에 생명은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로,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생명은 이제 음식이 되기 위해 도마 위에 놓이고, 뜨거운 물, 육수, 갖은 양념과 향신료가 얹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온갖 레시피로 우리는 생명을 벗기며 토막내며 다지며 구우며 익히며 튀기며 쪄낸다. 생명은 대량생산 공정에 투입되는 식재료일뿐... 이것은 온 우주 생명의 법정에서 바라보면 공포스런 홀로코스트다.
성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다. 창조주인 신이 자신을 피조 세계에 던진 사건이며 신이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놓은 사건이다. 신이 인간에게 먹히셨다. 신은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놓으셨고 그럼으로써 인간에게 자신을 먹게 하셨다. 먹히는 일과 먹게 하는 일은 둘 다 자기희생을 그 본질로 한다, 자기희생이란 결국 먹이는 일로 귀착된다. 누군가를 ‘먹이는 일’, 다시 말해 ‘낳고 기르는 일’이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낳으셨고 세상을 먹이고 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빵으로 내놓으셨다. 삼경(三敬)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敬)이란 ‘모시는 일’이기도 하고 ‘존중히 여겨 섬긴다’는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없는, 지역소멸로 낙인찍힌 지역들이 있다. 그래도 드문드문 찾아오는 나그네와 손님들에게 격려를! 그리고 그 장소에 끝까지 남아있는 이름없는 주민들에게 박수를!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는 누가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지, 그 주인공들에 대한 천상의 환대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는 자에게 박수를!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참 이상한 일이다. 세상에서는 승리자에게 환호와 갈채를 보내고 면류관을 씌우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이 호명되고 그들에게 상을 주니 말이다. ‘환대’(hospitality)의 영성은 이렇게 전혀 다른 눈으로 역사의 이름 없던 주인공들을 바라본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누가 정말 천국을 차지하고 그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가이사가 움켜진 권력을 내려놓고 가장 약한 자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세상,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그곳에서는 일어난다. 사자가 어린아이에게 끌리는 새로운 세상이다. 환대는 이렇게 낯선 이방인을,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을 동학적으로 말하면 ‘모신다’, ‘모셔들인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내가 편히 안락을 누리는 내 처소를 비우고 기꺼이 그 처소를 나그네에게 내어주는 일이 말이다.
문화원은 그동안 황무지 같은 지역에 문화의 씨를 뿌려온 선구자였다. 어떻게 지켜온 지역이고 어떻게 가꿔온 지역문화인가? 그런데 지금 그 창고를 열라고 한다. 문화원은 창고를 지키는 사람이었을 뿐 창고의 주인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있다. 너무 아끼다 쓸모없게 된다는 뜻. 그러니 문화원들이여, 적절한 때 창고를 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아낌없이 내놓으시라. 군말이 필요없다. 그것도 친절하게 잘 애용할 수 있게 판을 차려놓고 제대로 초대하시라는 말씀이다. 누구를? 바로 지역의 주민이다. 우리가 죽쒀서 별수 없이 준다고 생각했던 그 이류 등급이시다. 누가 주인인지 알아보시겠는가?
문화원은 그동안 형식 없는 내용만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맹목적이었다. 공허하게 벽을 향해 절하고만 있었다. 시민이 없는 벽 쪽은 공허하기만 하다. 지금 문화원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가? 2023년 5월, 국가유산기본법이 제정되었다. ‘문화재’라는 용어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개념이 180도 달라졌다. 과거의 유물은 ‘문화재’(property)였다. 어디까지나 과거 중심이고 물건이 중심이다. 미래의 유물은 ‘유산’(heritage)이라 부르는 게 좋겠다. 이것도 커다란 개념 전환이다. 미래 중심이고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고 삶의 경험과 양식을 담아내는 것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