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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정책/이슈>
삶의 테두리로서의 ‘지역’
최실비 | 경기문화저널 편집위원

‘지방이양일괄법’이 시행되면서 지역분권화에 따른 지방이양으로 문체부에서 지원하던 많은 문화예술 분야 사업들이 지자체의 권한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지역개발’ 논리에서 벗어난 문화예술 사업은 큰 폭으로 예산이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정부는 지역 문화예술 계에서 터져 나오는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아주 다급하게 ‘지역다움’을 담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지역의 일은 지역이 가장 잘 알아야 한다는 논리로 ‘맞춤형’ 성과를 내지 못하는 지역을 탓하기 바빴다. 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몇 만 명, 몇 십만 명의 숫자, 즉 경제적 규모로서 존재하며, ‘생활인구’라는 이름을 붙여 몇 시간 머물다 간 사람까지 인구수에 덧셈하기 시작했다. 실체가 없는 채로 끝도 없이 부풀려지는 담론과 숫자 속에서 얼마나 더 가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예술을 제공했는가는 읍면동 단위에서 진행된 사업과 프로그램 숫자로 산출됐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역’ 그리고 ‘생활권’이라는 단어가 정책 용어로 유행처럼 떠돌았다. 문장으로 풀이하면, 지역 고유의 특성을 반영하여 생활권 단위에서 문화예술(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인데, 나는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정책에서 사용하는 지역과 생활권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반영한 구분區分일까, 아니면 토지의 구획區劃일까. 둘째, 모든 지역에는 반드시 타 지역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이 존재(해야) 할까. 셋째, 시민은 공공의 서비스를 제공 받는 수혜자여야만 하는 것일까.

최실비 발제자

지역은 행정적으로 구획된 범위가 아닌, 계속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렇기에 지역은 곧 생명체이며, 가장 중요한 자원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다행히도 이미 지역에서는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에 의한 섬세한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성공한 문화예술 축제는 곧 관객 수에서 비롯된다는 논리와 문화예술을 공공 서비스의 관점에서 일률적으로 제공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조금 다른 변화를 만들어 가고자 한 사례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태어난다

평택시문화재단에서는 생태적 사유로 노을의 ‘도착’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노올자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 중 ‘선셋이브’는 노을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시간을 시민들이 예술적 감각으로 느끼며, 자연 앞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겸허히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운영했다. 감상은 개인의 것이되, 순간은 함께 나누는 것임을 상호 간에 약속하는 ‘선셋이브 가이드’를 통해 작은 규칙도 두었다.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그러나 고요하게 노을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 내 주변의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담아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음식을 나누지 않는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조금 불편한 상황을 우리 함께 이해해보자고, 변함없이 찾아오지만 잊어버리고 있었던 노을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집중해 보자고 제안했다. 평택시문화재단은 노을을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맞닥뜨렸을 때의 그 ‘경이로움’, 기쁨과 두려움의 감정이 동시에 몰아치는 그 순간의 비현실적 감각, 즉 일상의 비일상화에 집중했다. 경이에서 비롯된 작은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자각을 통해 주변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예술의 가치가 변하며 예술작품으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 확대됐다. 이제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상의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된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는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그리고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 또한 예술가에 한정 짓지 않게 됨으로써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과 그것을 향유하는 자의 관계 방식 또한 다양해지기 시작*1)했다. 과거에 예술을 즐기는 방식이 주로 전시장, 공연장을 통한 소극적 형태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우리 삶의 모든 장면에 예술이 관계될 수 있는 적극적 형태로 변했다. 또, 예술을 둘러싼 사람들의 역할이 변화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예술을 창작하는 사람이 고도의 훈련을 통해 숙련된 예술가여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예술가들 또한 창작활동 이외에도 매개자나 촉진자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며 예술을 둘러싼 사람들의 역할이 뒤섞이게 되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나풀거리는 일상에서 찬란한 것들을 발견할 줄 아는 경이로움의 감각을 우리 모두 회복하자. 우리는 모두 시인(예술가)으로 태어난다”(경향신문)고 말한다. 평택시문화재단의 ‘선셋노을’은 기존의 ‘행사’와는 사뭇 다르다. 공급자 중심의 일방향적 예술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설명하지 않으며 참여자의 감각에 오롯이 집중한다. 이는 우리가 이미 예술가로 태어났음을 존중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곳의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김포문화재단에서는 중앙에서 만든 정책을 지역이 실행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고 정책화를 하자는 목적에서 [2024 김포 지역 중심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했다. 정책적 지시에 따르는 지역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좁혀진’ 영역 안에서 행정과 현장이 함께 의제를 찾고 정책을 만들어가는 이른바 상향식 정책 의사결정 과정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김포문화재단은 그러한 관점에서 우선 문화예술교육의 테두리를 우리가 직접 결정해 보자며 ‘김포 문화예술 흠뻑쇼’를 운영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위해 말과 글을 넘어서 몸과 행위의 시간을 통해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함께 탐색했다. 맨바닥에 날계란을 하염없이 세워보기도 하고, 연기처럼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기도 하며, 책의 한 구절을 들으며 목적 없이 나무를 깎아보기도 했다. 모르는 누군가와 실과 바늘을 주고받으며 단어를 완성해보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지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여러 행위로 문화예술교육을 경험해보았다. 이와 더불어 지역 생태계를 이루는 사람, 주체, 환경 등 여러 관계들을 존중하며 그 사이사이의 입장과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교육이 일어난다고 보고 ‘동료 찾기 캠프’를 운영했다. 캠프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동료는 정말 무엇인지 그 개념과 범위를 살펴보고 동료가 주는 의미, 필요성, 유익성을 살피며 ‘나는 정말 좋은 동료일까’를 고민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역이라는 생태계에서 나란히 걸어갈 동료를 발견하기 위한 프로젝트로서, 알맞음과 다름 사이에서 최적의 협력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한편, 공공*2)에서 시민들에게 프로그램을 ‘제공’할 때, 매우 시혜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참여자를 수혜의 대상으로 앉아서 경청하는 역할로 한정지은 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수요조사는 어떤 장르를 배우고 싶은지 묻는 정도로 진행된다. 동시에 시민 역시 공공성을 국가가 개인에게 주는 일방향적 혜택으로 이해한다. 이는 결국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들의 소유 주체가 국가라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도시*3)의 주인이 시민이라는 자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을 이루는 것들은 오롯이 (국가를 포함한)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 나와 당신은,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공에서부터 소유한 자원을 ‘배급’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공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며, 동시에 시민은 스스로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 가는 주체다. 김포문화재단은 길에서 만난 장소와 사람들에게 힌트를 얻어 ‘김포 다운’ 문화예술교육을 찾아나간다. ‘힘빼고-보태기+힘 나누고÷키우기×힘=관찰력, 협력, 통찰력, 체력, 예지력, 초능력…’이라는 사칙연산이 곧 ‘우리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정의한다. 지역 생태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동료가 될 때 튼튼해진다며 사람과 사람의 시선이 관계하고 교차하는 지점을 강조한다. 즉, 공공과 개인이, 나와 당신이 서로에게 ‘관계자’가 되어 보자는 것이다.

이처럼 지역에서는 이미 문화예술교육을 공공 서비스 관점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역은 통치의 수단, 돈을 벌어오는 수단,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말 뿐인 ‘지역 중심’이 아니라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일들이 잔뜩 일어나길 바란다.

*1) 박재홍‧권선영,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성장을 위한 지역문화정책의 방향성 및 과제」, 『한국무용과학회지』 제37권 제2호, 2020, p.52.
*2) 사전적 의미로는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글에서는 지엽적 관점에서 공공에서 제공하는 시설, 재원, 사업을 포괄하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3) 이 글에서 ‘도시’는 농촌과 대비되는 용어로서의 정의가 아닌,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한 현대사회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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