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티스트는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술보다 더 사회적이고, 더 협력적이며,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 댄 그레이엄(Dan Graham)
백용성 발제자
다시 오이코스가 오고 있다. 아직 분명한 형태를 갖추진 않았지만 분명 그것은 오고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오이코스는 그 터와 밀접한 사람들의 거주처이며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이 태동하여 자라나고 확산되며 이어지는 삶의 터이기도 하다. 이것을 우리는 지역이라고도 부르고, 동네라고도 부르지만 무엇보다 간혹 환하게 열리는 광장에 앞서 든든하게 있는 원초적인 삶의 바탕이다. 그러니 지역은 도래하는 공동체의 삶, 좋은 삶을 위한 기예(art)를 증진할 수 있는 삶터이자 예술의 터가 되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오이코스의 상상이 필요하다. 터무늬 이전에 ‘터’자체를 상상해야 한다. 이는 삶과 문화예술 사이에 그어진 빗금을 넘어야 하는 문제이다. 사실 이미 미적, 예술적인 경험은 오래전부터 삶의 기예로서 기저에 편재되어 있었다. 나아가 소위 현대예술조차도 ‘사회적 조각’으로서의 예술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위한 도(道)와 기예가 돌아온다. 삶의 예술이자 기술은 자연을 포함해 우리의 신체, 에로스, 타인과 연결하는 공동체, 동네 공간 등 모두와 연결된다. 거기에 자기배려, 자기생산. 타자배려와 협력의 연대가 자리잡는다.(최근 집회문화에서 보여준 자발적 참여, 협력, 연대, 선결제등과 같은 여러 배려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지역문화예술의 지원 사업은 이를 촉진시키고 증진하며, 함께 성장하는 영역을 발굴해야 한다. 하지만 막히고 있다. 상투화되어 가는 제도와 ‘문화예술’이라는 꼬리표가 발목을 잡는다. 이를 넘어서야 한다. 다 떼고 온전히 터와 터에서의 삶의 정착, 삶의 리듬을 지속가능성으로 만들어가는 도를 배워야 한다.
막히면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잠시 방향을 점검해보자. 먼저 문화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다음 매우 어려운 방향문제를 다시 더듬어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한국문화예술위의 출범 이후 다양한 목소리들과 주체들이 자신의 옷을 입고 문화예술의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해다. 정책방향과 관련해서만 말하자면 그것은 한편으로 문화민주화라는 날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민주주의라는 씨실을 엮어내 만들어내는 문화의 민주화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문화민주화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을 갖고 있고, 문화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을 갖고 있다. 고급문화의 장벽을 완화하고 향유의 기회를 확장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정책이며, 하위문화를 포함해 다양한 문화적 미적 가치관을 인정하며 그들 스스로의 문화적 참여을 촉진하는 과정이 ‘아래로부터’의 정책이다. 아직도 말이 많고, 여러 불만과 불평들이 상존하지만, 이제 큰 틀에서 문화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 문화예술 공간들이 자리를 잡고, 청년작가들부터 전문예술가들까지의 지원이나, 일반 대중의 문화 향유의 기회들도 양적으로 많아졌으며, 다양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잡음, 제도적 정착이라는 사실자체가 하나의 상투성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역에서도 말하듯이 어떤 것이 극에 이르면 그것이 다른 극으로 변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원형적인 것은 상투적인 것으로 되고, 또 때가 되면 상투적인 것이 놀라울 정도의 생기를 얻은 원형적인 것으로 된다. (그렇게 뽕짝은 케이-트롯으로 영웅처럼 귀환한다.) 이제 그 ‘때’가 왔다. ‘문화’의 민주화나 문화의 민주주의화 이전에 ‘민주주의’ 그 자체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는 때다. 패러다임의 전환점이다.
방향에 예민해질 때이다. 위-아래의 수직선만 보아선 안 된다. 바로 옆, 곁, 나란히 하기를 볼 때이다. 그레이엄이 말했듯 “모든 아티스트는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술보다 더 사회적이고, 더 협력적이며,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참여, 초대, 소통, 만남 등을 강조하는 ‘관계미학’이든, 작품과 독자 혹은 관객과의 연합체로서의 예술의 객체성에 주목하는 ‘객체지향존재론’의 미학이든, 듀이에 기반한 프라그마티즘 미학이든 최근의 미학은 “더 사회적이고, 더 협력적이며,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지치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여러 프로젝트들 또한 이러한 관계적이고, 공통체적이며, 협력적인 공동-실행과 향유의 과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억지로 쥐어짜는 ‘문화예술’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적’인 과정이요 성취들이다. 좋은 삶은 거기에서 싹튼다. 이를 우리는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생태적 전환’이라 부른다.
지역문화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지원사업은 지속가능하게 ‘사람’을 키우고 남기는 사업이 되어야 한다. 지역소멸의 위기, 고령화 사회의 도래를 포함하는 새로운 오이코스의 시대에 예술과 연결을 통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먼저 기초적인 먹고사니즘의 연결망이 필요하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 예술가 친구는 그곳 정부에서 예술인을 존중해 노인복지와 연결해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고 한다. 예술가의 자기배려의 시간과 노인돌봄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돌봄이자 배려이다. 노인들과의 관계맺음에도 예술이 가능하다.
또한 연구자, 비평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춘천시에서 행해졌던 ‘도시가 살롱’ 프로젝트는 매우 획기적인 사업인데도, 그 문화적 실천에 대한 진지한 비평적. 철학적 접근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과 삶터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 리빙 랩들이 알려지지 않고 묻히고 있다.) 그리고 매개자, 촉진자로서 기획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회적이고, 사업성과만을 측정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방식의 사업이 중요하다.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가 도는 어떤 자발적 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복이 있지만, 리듬있는 반복이지 점점 지루해지고 피로해지는 반복이 아니다. 하지만 또 무엇보다 이를 전체적으로 돌보고 실천할 수 있는 작당하는 어떤 연결망을 갖춘 터가 또한 필요하다. 문화재단이든 문화원이든 작은 동아리든 이러한 터의 연결망들이 다양하게 움터야 할 것이다.
오이코스는 에코노미가 아니다. 세계화나 글로벌은 없고 오직 가이아나 오이코스들만이 있다. 대문자 공중(Public)은 없고 소문자 공중들이 있다. 중앙은 없고 지역들만 있다. 공화국인 레스 퍼블릭(res pulic)은 염려물들(res)과 공중들(pulics)의 새로운 연결방식, 거주방식을 요청한다. 제도들은 개선될 수 있고, 혁신된다. 거만한 이미지의 국회는 다채로운 응원봉의 축제 놀이터로 변한다. 새로운 ‘나란히-가기’의 정치, 문화예술을 탐색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