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별보기

<칼럼/서평> <정책/이슈>
: 민주주의와 문화적 상상력겨울에서 봄을 기다리며
고영직 | 문학평론가
지역소멸 시대에 다시 읽는 『국토와 민중』

소설가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1983)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가 출간되기 이전에 나온 국토 기행문으로 국토, 더 정확히는 ‘지역’의 숨결을 복원하며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한 관심을 뜨겁게 촉발한 책이었다. ‘국토인문학’이라는 새로운 글쓰기의 지평을 연 박태순의 국토 기행집 『국토와 민중』은 신경림 시인의 『민요 기행』(1983-1985)과 더불어 1980년대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국토입문서’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전국적으로 답사 열풍이 일어났다.

고영직 발제자

『국토와 민중』에서 여전히 현재성을 갖는 문장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를 좁혀 놓고자 애쓰는 것이 정치·경제의 힘이라면, 그 한반도를 넓혀 놓는 작업은 문화가 해야 할 일이다” 같은 문장을 보라. 박태순은 이같은 문제의식으로 근대화·산업화·도시화 과정을 혹독히 겪어온 우리나라 온 국토를 직접 ‘발품’을 팔아 곡진한 엘레지(elegy, 悲歌)를 썼다. 박태순은 조세희·이문구·황석영·이청준·윤흥길 등과 더불어 1960~1970년대 한국소설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외촌동 사람들’ 연작으로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정든 땅 언덕 위』(1973)는 서울 변두리 공영주택에 사는 217가구 하층민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여기서 철 지난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의 문장을 환기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역소멸과 인구소멸 위기를 겪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지역을 존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문화와 예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역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우리 시대 안내서와 정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태순의 책을 출간한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한국인들에게 ‘국토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제시했다”고 평한 것은 헛말이 아니다. ‘오늘의 한반도는 광의(廣義)의 서울시’라고 할 만큼 대한민국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극화(一極化) 체제로 심화되었다. 그래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 산다는 것은 ‘2등 국민’ 신세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하지만 정부의 대응과 광역 및 기조자치단체의 대응은 너무나 미온적이다. 정부는 지역소멸과 인구소멸의 시대 2023년 지방시대위원회를 신설하고, ‘지방시대’를 선언했지만, 정부의 정책기조는 사실상 기민(棄民) 정책이었다. 2025년 문체부 예산안에 따르면, 지역문화진흥 정책사업의 예산이 단돈 ‘16억 원’에 불과하다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광역과 기초자치단체 또한 지역의 문제와 위기를 대응하는 문제의식과 정책이 너무나 피상적이다. 특히 지역에서 ‘연결될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은 사실상 전무했다. 지역활동가 양미는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동녘 2024)에서 우리는 ‘연결될 권리’가 있으며, “연결되지 못하는 시골살이는 사람들을 각자도생으로 몰아간다”고 주장한다. 수년째 시골살이를 하는 그가 ‘여전히’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으며, 자립하는 삶을 고민하며 분투한다. 나는 “불편하다고 각자 개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결국 악순환이 되지 않을까요?”라는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다.
양미의 말처럼 지역 대중교통 체계 정비는 ‘노답’이 아니다. 양미가 제시한 해법은 ‘버스공영제’다. 2013년 5월 전국 최초로 버스공영제를 실시한 전남 신안군, 2020년 7월 버스공영제를 도입한 강원 정선군은 공영제 이후 이용객이 급증했다. 2021년 기준 신안군은 20만 명에서 67만 명으로 늘었고, 정선군은 약 54% 증가했다. 2023년 ‘모든 승객 공짜’를 표방한 경북 청송군의 농어촌버스 무료 운영 또한 주민과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는다. 혈세 먹는 하마로 전락한 시내버스를 완전공영제 또는 준공영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드높다.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정책 의지와 대책 마련이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민(侍民) 민주주의’를 행동하자

12·3 비상계엄 사태는 결국 12월 14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1일 만이었다. 이와 같은 헌정사의 비극은 어느 논자가 말하듯이 ‘압축 소멸 사회’(이관후)에 대응하려는 ‘정치’의 실종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관후는 “정치가 소멸한 사회는 공동체의 소멸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주권자들이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확인해준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난 극복’이 체질이 된 대한민국 주권자들은 2차 비상계엄이 선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차분하게 행동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의 시위문화와도 사뭇 달랐다. 대한민국 주권자들은 겨울 한강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저마다의 깃발을 만들었고, K팝과 민중가요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고, 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 본행사 외에도 작은 민회(民會)를 연상시키는 공론장들이 여의도 곳곳에서 펼쳐졌다. 누군가가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엠마 골드만)라고 한 말이 실감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제까지 ‘눈떠보니 선진국’ 타령에 우쭐해하던 주권자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계엄’을 선포한 유일한 나라라는 불명예를 떠안으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헌재의 시간이 진행되는 지금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이른바 ‘희망 소멸 사회’는 위험사회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찾지 않으면 희망이 소멸된 사회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의 나라’를 넘어 ‘우리들의 나라’를 상상하고, 무엇이 좋은 나라인지 사회대개혁을 위한 사회협약을 이루어야 한다. 지역소멸과 인구소멸 같은 이슈와 문제들이 핵심의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너무나 당연하다.

쉽지 않다. 혐오와 배제의 ‘분쟁 사회’가 되어버린 정치 지형에서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이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던가. 나라 전체가, 사회의 토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비상한 위기의식을 갖고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고 행동해야 한다. 죽은 말이 되어버린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 존중의 문화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를 포함한 사회권 논의를 통해 노동하기 좋은 나라와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라는 사회 비전을 협약해야 한다. 기후 위기 같은 탈근대 과제들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이탈리아 사상가 A.그람시의 말처럼 공위기(空位期, Interregnum)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이 헌재의 시간 ‘이후’의 시대를 예비하는 변곡점의 시간이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드높은 문화의 힘’을 한없이 신뢰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사회 비전을 다시 생각한다. 만민평등의 세상을 바랐던 19세기말 동학 사상과 운동에 눈길이 자주 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녹색평론』 188호(2024년 겨울호)에 실린 원광대 조성환 교수가 쓴 문장이 특히 오래 마음에 남는다. “동학이 지향한 민주주의는 모시는 시민(侍民)들에 의한 ‘시민(侍民) 민주주의’였다.” 결국, 민주주의는 영구혁명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자

어느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라고 썼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강력히 환기한다.

지역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서사의 소멸을 의미한다. 앞서 박태순이 언급한 것처럼 ‘한반도를 넓혀 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2024년 유독 자주 찾은 지역인 전남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전남문화재단 자율기획형 사업 책임심의위원을 맡아 해남, 담양, 곡성, 고흥 등지를 찾았다. 시인보다는 ‘전사’이고자 했던 김남주 시인(1945~1994) 30주기를 맞아 김남주기념사업회가 극단 토박이와 손잡고 상연한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 관극차 해남을 처음 방문했다. 곡성 한국실험예술정신이라는 단체가 옥과면 신흥마을에서 국내외 예술가들과 함께 옛 신흥상회를 꾸며 마을 갤러리를 만든 멋진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었다. 따뜻한 10월의 가을 한낮에 이루어진 오프닝 행사는 조촐한 마을 잔치가 되었다. 아츠뷰라는 단체는 신안군 매화도 옛 매화분교에서 추진한 프로젝트 [잊혀지는 섬,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통해 기억투쟁의 주제로 아카이브 작업을 진행했다.
이처럼 문화와 예술 활동을 통해 지역의 가치를 발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를 세워야 한다. 이 점에서 저 19세기말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이 창도한 동학의 삼경(三敬) 사상은 매우 의미가 있다. 하늘을 공경하고[敬天], 사람을 공경하며[敬人], 사물을 공경하라[敬物]고 한 해월의 가르침은 글로벌 복합 위기(global polycrisis) 시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이자 새로운 문화적 비전이어야 한다.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식인(食人) 자본주의’(carnival capitalism)가 우리의 미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토양은 결국 지렁이들의 힘으로 바뀐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비전과 로드맵의 부재에서 비롯된 바 크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가 ‘서서히 죽는’(slow death) 상태에 처했다. 실제 사람들 또한 죽어가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월별 자살자 통계를 보면, 2024년 1월의 경우 ‘1306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것을 보라. 2023년 987명. 문제는 내 일(job)도, 내일도 기대할 수 없는 외로운 시민들이 급증한다는 점은 위험신호일 수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는 외로워진 대중의 지지로 유지된다”고 한 현상이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공위기의 시간에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를 성찰하고, ‘영성 없는 진보’(김상봉)의 문제를 성찰하며 사회적 비전과 로드맵을 짜야 한다.
우리에게는 지역을 상상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모든 것은 예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낡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영구혁명이듯이, 문화와 예술 또한 영구혁명의 속성을 띠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박태순은 “민중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나 입이 없다”고 말했다. 이 땅에 민중들이 사는 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역소멸과 인구소멸의 시대 갈수록 문화와 예술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겨울 한복판 와중에도 봄의 지령(地靈)이 땅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