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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지역문화, 관료제 유토피아를 넘자
고영직 | 문학평론가
“제발 분수대의 물을 잠가주세요”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2014) 3장 ‘일곱 개의 뺨’에는 어느 여고생이 ‘그날’ 이후 도청앞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자 도청 민원실에 민원을 넣는 장면이 등장한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1980년 5월의 ‘학살극’이 종료된 상황에서 여느 여름처럼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도청앞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자 참다못한 어느 여고생이 민원실에 민원을 넣은 것이다. 수업 결손을 메우기 위해 팔월 초순까지 수업이 계속되지만, 여고생은 하교할 때마다 끈질기게 민원실에 전화한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그러자 공무원들은 처음에는 “예에, 의논해보겠습니다”라고 대응한다. 그러다 같은 민원이 계속되자 어느 날 나이 든 여사무원이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라고 대응한다.
특유의 시적 문장으로 5.18이라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응시하며 십 대 희생자 ‘동호’를 소환하는 작품인 『소년이 온다』는 강요된 망각에 맞서 ‘기억투쟁’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위 에피소드는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실화(實話)였다고 한다. 당시 35세가량의 여성이 도청앞 분수대를 정지시켜달라는 민원을 넣은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한강 작가는 5.18 관련 자료를 참조하여 소설을 구성했다. 작품을 보며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라며 민원을 제기하는 장면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역사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한 시민들의 마음을 확인한다. 다시 말해 관료제에 맞서고자 한 무명(無名) 시민들의 아름다운 저항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표지.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표지.

1980년 5.18 당시 어느 여성이 도청에 제기한 민원 내용.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다.1980년 5.18 당시 어느 여성이 도청에 제기한 민원 내용.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다.

다양성보다 모노톤 선호하는 ‘행정가의 숲’

하지만 관료제는 점점 강화되고 있다. ‘감시 자본주의’는 인간 정신의 고군분투를 거름 삼아 갈수록 성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관료제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또 지역(문화)에 대한 중앙정부의 냉담함과 무관심 또한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지역문화진흥원의 대표사업인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성사업’은 2024년 예산이 전액 삭감되어 사업이 사실상 폐지되었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사람을 키우는 데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중앙정부의 어이없는 행정폭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역에서 문화와 예술 활동을 하며 먹고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핵개인과 분인(分人)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기술철학자 마크 코켈버그는 『알고리즘에 갇힌 자기 계발』(2022)에서 “이제는 근대적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베이스와 컴퓨터 파일에 분산되어 있는 분인(分人, dividual)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더 이상 근대적 개인이 아니라 탈근대적 분인(分人)이 되어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에 의해 분석되고 통제되는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 간의 신뢰보다는 오직 자기 보존이 중요한 척도가 된다.
다시 지역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내가 사는 지역이 ‘피어나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로컬)의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글로벌 복합위기는 계속되고 있고, 부자 감세 등에 따른 세수 감소는 지방보조금 삭감으로 현실화하면서 지역의 미래와 전망을 어둡게 한다. 문화정책 환경 또한 급변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민-관 거버넌스는 실종되었고, ‘위원회 거버넌스’조차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인구소멸, 지역소멸이라는 이슈에 잘 대응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행동하는 거버넌스’가 필요하지만. 중앙정부와 지역 간 공존의 지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문화도시정책의 경우 ‘대한민국 문화도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바뀐 것은 이름뿐만 아니다. 지금의 문화도시 사업은 ‘모든 도시는 특별하다’고 강조하지만, 지자체 행정이 지역의 시민들 및 문화(예술)를 대하는 태도는 하나같이 반(反)문화적이고 반(反)인문적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이것은 법정 문화도시든 대한민국 문화도시든 간에 대동소이하다.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에서 가장 필요한 자본은 ‘인내자본’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인내자본은 찾을 길 없다. ‘지역문화정책은 지역에서’라는 정책 기조가 지역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결국 행정의 인내자본의 결핍에서 비롯했다.
지역과 지역문화를 지원하는 국고 보조금의 운용 또한 보충성의 원리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 보충성의 원리는 가장 최소단위, 가장 약한 단위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보조금을 관리하는 e나라도움 시스템은 보충성의 원리에 충실한 시스템이라고 볼 수 없다. e나라도움은 ‘규칙들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를 실현하고자 한 관료제 유토피아의 꿈을 구현한 시스템일 수 있다. 행정은 다양성보다는 모노톤(monotone)을 휠씬 더 선호한다. 미국 정치학자 제임스 C.스콧은 모노톤을 선호하는 행정의 행태를 ‘행정가의 숲’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행정가의 숲을 대체하는 대안은 ‘자연주의자의 숲’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숲의 건강함은 다양성에서 비롯한다. 지역문화의 생태계 또한 다양성이라는 토양에서 자란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사진3영암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한 [2004 영암문화포럼] 장면.

사진42024 영암문화포럼 참여자들이 영암의 옛 정미소를 리모델링한 유휴공간을 둘러보고 포즈를 취했다.

피어나는 삶, 피어나는 지역

최근 지역문화의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는 몇몇 포럼에 참여했다. 전남 영암군·영암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한 ‘2024 문화활동가 영암문화포럼’ [영암에서 도모하는 문화정책의 내일](2024.12.13.-12.14)과 더불어 전남 목포시·해남군·완도군·진도군·신안군 등 5개 시·군이 주최하고, 완도군과 한국섬진흥원이 공동주관한 [2030 World Island Net 프로젝트: 서남해안 섬의 새로운 연대](2024.12.20.) 포럼이 그것이다.

영암문화포럼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60여 명의 참가자들은 격변기를 맞이한 지역문화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 특히 이런 격변기일수록 중요한 것은 분권과 자치의 관점이며, ‘새로운 상상’이 중요하다는 점에 십분 공감했다. 새로운 지역문화를 위한 문화 공론장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합의했다. 이날 나온 여러 의견들 가운데 문화컨설팅 바라 권순석 대표가 제안한 ‘통합지원사업’은 정부 차원에서 적극 시도할 만한 정책이라고 판단된다. 권 대표는 “지역의 입장에서 지역의 필요에 의해 설계되고 지원되는 분권과 자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지원사업의 패러다임 전환, 바로 통합지원사업의 출발이다”라고 말한다. 지속 가능한 지역문화 활동을 보장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 현실을 인정하자는 차원에서 통합지원사업을 제안한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적극 수용해야 할 정책이 아닌가 한다. 더 이상 지역과 지역문화 정책을 정부의 손에 내맡길 수는 없다.
12월 20일 완도군 생활문화센터에서 열린 [2030 W.I.N. 프로젝트]에서는 지역 소멸 위기에 처한 서남해안 섬 지역 기초자치단체들의 고민과 비전 그리고 문화·예술적 상상력을 들을 수 있었다. 목포에서 쓰레기의 오비추어리 활동을 해온 서동효 스몰액션 메인디렉트의 발표가 퍽 인상적이었다. 이날 포럼에서 가장 많이 나온 키워드는 ‘함께’(together)라는 단어였다. ‘서남해안 섬의 새로운 연대’라는 행사 취지처럼 연대와 협력이 없고서는 섬 인구 유출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다운레이블 장상기 대표의 언급처럼, 5개 시·군 기초자치단체들이 내세우는 성장 전략은 시장 논리에 기반한 것이 다수였고, 과연 지역 주민들과는 어떻게 ‘함께’ 하려 하는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섬에 문외한인 나는 좌장으로 참여해 조금 엉뚱한 제안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율곡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듯이, “전국의 예술가 1만 명을 선발해 서남해안 섬에 레지던시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면 섬의 소멸과 서사의 소멸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2014)의 저자인 와타나베 이타루가 빵집을 운영하며 지역 브랜딩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듯이, 섬에 체류한 예술가의 작업과 활동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지역과 지역문화에 대한 정부의 정책 기조는 2023년 지방시대위원회(위원장 우동기)가 발표한 ‘뉴거버넌스’ 전략과 비전에서 보듯이 자본 논리에 치우쳐 있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에 투자하는 데에는 상상력이 좀처럼 미치지 못한다. 지방시대위원회가 중점 추진과제로 발표한 아홉 개의 과제를 보라. 특구를 만들고, 시설을 짓고, 산업을 육성하고, 규제를 해소한다고 지역과 지역문화의 생태계가 조성되는 걸까.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 지방시대위원회 중점 추진과제

①기회발전특구 지정으로 양질의 신규 일자리 창출
②교육발전특구 도입 및 지역-대학 동반 성장: 지역인재 육성, 3
③)도심융합특구 조성으로 지방활성화 기반 구축
④)로컬리즘(‘지방다움’)을 통한 문화․콘텐츠 생태계 조성
⑤지방이 주도하는 첨단전략산업 중심 지방경제 성장
⑥디지털 재창조로 지방 신산업 혁신역량 강화
⑦매력 있는 농어촌 조성으로 생활인구 늘리기
⑧지방 킬러규제의 속도감 있는 일괄 해소로 지역 민간투자 활성화
⑨분권형 국가 경영시스템 구축으로 지역맞춤형 자치모델 마련

‘분해의 철학자’인 일본 환경학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덧셈’과 ‘곱셈’을 숭배하는 근대의 신화에서 벗어나 ‘뺄셈’이며 ‘나눗셈’인 세계로 시선과 태도를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일종의 역주행의 상상력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든다, 생산한다, 쌓는다, 올린다, 거듭한다, 산출한다’ 등의 말이 나타내듯이, 온통 활성도를 재는 척도가 지배하고 있다. 지역과 지역문화에 대한 정책 또한 활성화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와 예술은 어쩌면 ‘역류(逆流)’의 상상력을 발휘할 때 오히려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런 장기 불황의 시대일수록 역류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누구보다 좋은 삶에 진심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개념을 통해 ‘피어나는 삶’(flourishing life)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원래 ‘다이몬(daimon)이 활성화된 상태’라는 뜻이다. 사람의 행복은 가능성과 더 충만한 삶을 찾아가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경제학자 홍기빈은 에우다이모니아라는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우리 행동의 목적은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나의 좋은 삶”*1) 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피어나는 지역은 저마다 피어나는 삶에서 시작된다. 저마다 피어나는 삶이 피어나는 로컬을 만든다.

사진52030 World Island Net 프로젝트 포럼 모습. 서남해안 섬의 새로운 연대를 주제로 열렸다.

사진62030 World Island Net 프로젝트 종합토론 모습.

*1) 홍기빈,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 ebs북스, 2023,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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