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50플러스 인생학교 교육과정에는 ‘ 드래곤 호의 모험 ’ 이라는 별칭이 있다. ‘ 드래곤 호의 모험 ’ 은 놀이성과 예술성을 기반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성인교육과 매우 다르다. ‘ 드래곤(dragon) ’ 이라니 마치 아이들 환상놀이 같은 이름이지만 그 안에는 형식적인 의전을 깨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조금은 다른 삶에 용기를 더하는 통과의례(ritual)가담겨있다.의례란 무엇일까?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의 저자 지갈라타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례는 소용이 없어 보이는 데도 진정으로 없어서는 안 되고 신성한 뭔가로 경험되는 것. . . (중략) 처음에는 기괴하거나 부질없어 보일지 모르는 것이 사실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닐 수 있다. ” 그런데 ‘ 기괴하거나 부질없어 보이는 ’ 놀이와 예술 활동이 진정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의례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진정한 의례는 안심과 결속감과 지혜를 준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행하는 겉치레와 다르다. 그런데 서울 50플러스 인생학교의 '드래곤 호의 모험' 은 8년(2016~2024)을 지속해 왔고, 여전히 기괴하고 부질없어 보이지만 이 과정을 통과하면 사람들이 분명 ‘ 조금은 다른 삶에 용기를 더하게 되는 것 같다. ’ *1)
서울 50플러스 인생학교는 첫 만남에서부터 놀이를 제안한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고, 자발성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놀이에서 일어난 해프닝들은 즐거운 웃음 안에서 품어져야 한다. 50플러스 인생학교에서는 놀이처럼 자기를 소개한다. 50플러스 인생학교의 교육은 앞을 바라보고 강연을 듣는 학습 과정이 아니다. 예컨대 그룹 프로젝트 활동, 대화 및 토론, 연극적 몸짓 표현, 등 수업 시간마다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므로 서로를 친밀하게 느껴야 한다. 그래서 첫인상을 좌우하는 인사 나누기는 매우 중요하다. 50플러스 인생학교에서는 두 가지 내용으로 간략하게 자기를 소개한다. 하나는 이름 대신 부를 별칭(그 유래와 의미 포함), 그리고 ‘ 요즘 관심 가는 단어는 무엇인가? ’ 이다. 이렇게 흔히 첫 만남 자리에서 묻는 나이, 전직 등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설명하는 형식들 대신-명함 내지 말고, 민증 까지 말고- 그저 ‘ 나 ’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제안한다. 별칭으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린 시절을 소환하는 기능을 지니며, 개구쟁이처럼 놀 준비를 하게 한다.
이렇게 개구쟁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모인 사람들에게 생애 전환의 시점에서 인생학교를 찾은 이유를 말하라면, 인생 후반기의 조금은 다른 삶을 위해 좋은 친구를 만나고, 전반부에 유보했던 특히 미적(美的)소망들을 실현하고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과거의 직함과 나이를 빼고 말하라면 매우 난감해한다. 그래서 인생학교의 첫 만남은 과거의 경험이 구성한 자아 말고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것, 낯설고 어렵지만 계급장 떼고 물에 첨벙 뛰어드는 놀이이다. 이렇게 50플러스 인생학교의 교육과정은 적어도 교실에 있을 때만큼은 현재와 다른 상태로 시공을 옮겨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례이다.
50플러스가 놀이는 어린이처럼 즐겁게 몰입하는 경험으로 이끈다. 이렇게 놀면서 자신의 삶을 심각하지 않게 재정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놀이는 고독이라는 질병을 예방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유대감을 만들어준다. 에릭슨 *2)은 50플러스 시기를 ‘ 자아 통합에 의한 자아 완성 ’ 이 주된 과업인 때라고 하였다. 자아 완성이란 일관성(coherence)과 완전함(wholeness)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며, 남은 시간의 결핍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의 삶을 긍정하고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혜를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50플러스에게 긍정적 정체감은 적절한 중용과 물러섬의 미학으로 정제되어야 한다. 최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과 인생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나름의 멋을 찾고, 레빈슨 *3)이 말한 ‘ 다리 위에서의 조망(one ’ s view f rom the br idge) ’ 시기임을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자아 통합을 위해 적절한 놀이는 이야기(narrat ive) 만들기이다.
50플러스 세대에게는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하기는 파편화된 기억을 꿰는 일이다. 아메리 *4)는 노년의 시간에 관하여 기억의 퇴적물, 인생의 경험 들이 불협화음처럼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시간의 지층이라고 하였다. ‘ 깨인 정신은 질서를 읽어내려 하지만, 시간의 흔적을 쫓는 일은 무질서를 헤아리는 일 ’ 이라는 것이다. 기억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판단력, 대인관계, 가치관은 이 기억에 의존하기에 현실과 충돌하기도 한다. 또한 나이가 들면 삶 전체를 회고하게 된다. 인간은 생애 전환기에 이르면 특히 자기 삶의 여정을 되짚어 현재의 자신에게 도래한 모습을 바라보며 혼란을 느낀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생애 전환기에 이른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는 과거의 혼란스러운 사건들, 해명하고 싶지만,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들, 회복하고 싶은 명예와 감정이 기억 속에 흩어진 조각처럼 쌓여 있다. 그 조각을 잇는 것이 내러티브이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예술, 특히 연극이다. 리쾨르 *5)에 따르면 체험된 시간은 그 시간을 형상화하는 이야기 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 만들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극으로 형상화할수록 해석의 깊이는 더해진다. 그 말에 답을 하듯 리어왕은 말한다. “ 나는 누구인가? ” 리쾨르는 “ 자기가 누구인지 묻는 인간은 이야기한다 ” 고 하였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는 것은 나의 삶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자신의 역사를 선형적 시간의 흐름에서 해방해 새로운 의미망과 시간성의 맥락 안에 놓을 수 있어야 답을 구할 수 있다.
50플러스의 시기, 자전적 기억과 회상을 통한 연극은 과거를 돌아보고 그 경험을 극화하고 상연하는 과정에서 지나온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도록 한다. 인생학교의 드래곤 호 모험에서는 1박 2일 워크숍에서 이것을 짧게나마 경험하도록 한다. 이때의 연극은 짧지만 내러티브의 순기능을 엿보게 한다. 드래곤 호의 탑승 놀이로 시작해서 제물 바치기 순서가 되면, 자신이 살아온 ‘ 청년 시절의 꿈 ’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몸으로 재현하는 연극의 양식을 빌어 자신을 제삼자로 바라보게 한 후 ‘ 빈 의자 ’*6) 를 통해 다시 자신을 직면하게 한다. 이것이 ‘ 빈 의자 ’ 에 의한 자기와의 대화이다. 연극으로 재현된 누군가의 이야기는 상연되는 순간 타자의 시선과 만난다. 타자의 도움 없는 내 말이나 내 담론은 독백에 불과하다. 내러티브 정체성은 타자를 통해 그리고 타자와 함께 규정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삶의 총체적 연관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니며 사회 속에서 타자와 함께 타자를 위해서 훌륭한 삶을 추구하도록 긍정적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성을 보다 견고하게 유지하도록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야기를 하고 듣고, 이것을 신체화하여 표현하도록 하는 협력적 활동으로서의 연극이다. 이 과정은 인생학교 참가자들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과의례가 된다.
50플러스 인생학교의 교육과정 가운데 내러티브와 즉흥 연극을 하는 1박 2일 워크숍은 교육과정의 중요한 꼭짓점이다. 워크숍 이전과 이후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관점의 변화라는 점에서 다르다. 1박 2일 워크숍은 크게 다섯 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주로 가는 길 버스 안에서 행해지는 경매, 중간 쉼터에서 시(詩) 해석과 협동의 시간, 도착 후 놀이와 연극빈 의자, 저녁 후 친교의 시간, 다음 날 아침 ‘ 끝까지 가봐야 아는 보물찾기 ’ 의 순서다. 첫날 오후 3시경 강당에 모여 놀이와 연극 그리고 ‘ 빈 의자 ’ 를 한다. 연극과 빈 의자 프로그램은 연극의 플레이백(playback theater) *7)과 ‘ 빈 의자 ’ 기법을 결합한 것이다. 구성원들은 모둠을 이루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젊은 시절 회상에 의한 내러티브 재구성을 선행한다. 이를 상황극으로 공연한 후 다시 빈 의자를 통해 한 사람씩 자신의 젊은 시절과 만나는 즉흥극이 이어진다. ‘ 빈 의자 ’ 기법은 심리치료에도 많이 활용되고, 플레이백은 제의적 속성을 지니므로 이 시간은 특별히 시간을 이동하는 타임워프의 경험을 준다. 특히 이들이 수행하는 플레이백과 빈 의자에서는 시간을 역으로 배치한다. 빈 의자에 현재의 자신이 앉아 있다고 상상하고, 그에게 말을 거는 주체는 젊은 시절의 역할을 입은 자신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형식을 뒤집은 것인데, 이렇게 역할 입기를 역으로 유도하는 까닭은 놀이성을 가미하여 심리적 부담과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는 것은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에게 가장 신선한 충격이 된다. 다음 날 아침, 모두 둘러앉아 1박 2일 동안 얻게 된 깨달음, 노년을 맞이하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삶의 자세, 관계를 풀어가는 방식에 대하여 소회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개구쟁이 같은 놀이로 포문을 여는 ‘ 드래곤 호의 모험은 ’ 기괴하고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모험은 선한 시민문화로, 나이 듦에 대한 불안 대신 지혜롭게 자아를 통합하게 하고, 연대감을 안겨 주는 미적(美的) 통과의례가 된 것 같다. 이를 거친 사람들은 ‘ 조금은 다른 삶에 용기를 더하여 ’ 함께8) 크고 작은 꿈을 이루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2024년 서울 50플러스 인생학교 23기 교육과정
(상좌: 워크숍, 상우 : 빈 의자, 하좌 : 졸업공연, 하우 :연극수업)
인생학교 졸업생들이 참여한 연극으로 소통역량 기르기(서울 50플러스 남부 캠퍼스, 2022년)
*1) 서울 50플러스 인생학교의 모토가 ‘조금은 다른 삶에 용기를 더하는’이다.
*2)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Er ik Homburger Er ikson,1902년 6월 15일~1994년 5월 12일)은덴마크계 독일인으로 미국에 활동한 발달심리학자이자 아동정신분석학자이다. 인간의 사회성 발달이론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
*3) 대니얼 레빈슨 (Daniel J. Levinson) . 미국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임상심리학과 교수. 코네티컷 정신건강센터의 심리학 실장이자 사회심리와 임상심리 연구 분야의 책임자. 저서로『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 The Seasons of a Man ’ s Li fe』,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 The Seasons of a Woman ’ s Li fe』 등이 있다.
*4) 장 아메리(Jean Améry, 1912년 10월 31일~1978년 10월 17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가이다.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Hanns Chaim Mayer )이며, 제2차 세계 대전 경험을 풀어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위키백과)
*5)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년 2월 17일~2005년 5월 20일)는프랑스의철학자이다.
*6) 빈 의자 기법은 게슈탈트 심리치료, 연극치료에서 사용하는 드라마 기법 중 하나이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인데, 드래곤호의 모험에서는 자기 자신과 대화한다.
*7) 플레이백(playback theater ): 1975년 조너선 폭스가 뉴욕에서 시작한 즉흥 연극 양식이다.
*8) 총동문회 산하 900여 명에 이르는 구성원, 수많은 커뮤니티 활동, 그리고 오플쿱 협동조합 결성 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