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의 지자체들이 지역의 문화예술을 진흥하겠다며 내놓는 청사진의 대부분은 국내외 어느 어느 곳에서 “대박 난 시설과 축제를 우리도 하겠다”는 계획이다. 조물주와 억겁의 시간이 창조해 둔 고유하고 특색있는 지역의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훼손하면서 터무니없는 짚라인, 곤돌라, 리조트 시설을 만들고, 어울리지 않는 인공의 색깔을 칠하고, 단일 식물과 동물의 인위적 재배와 육성으로 생태계 혼란을 초래하는 소비 판촉 행사를 축제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벌인다. 그 효과로 관광객이 얼마나 증가했다는 언론 기사와 방문객들의 과시용 SNS 포스팅에 잠깐 고무되었다가는 금세 시든 호응에 낙담하길 반복하지만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전문가 공무원 정치인 지역민 모두 비자발적이라 하더라도 공모자가 된 터라 책임을 묻는 이도 없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의 본래적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하기보다는 표면적인 성공과 빠른 성과를 추구하는 근시안적 접근의 결과이다. 지역문화예술의 진흥은 다른 지역의 성공 사례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문화예술은 문화예술을 베끼지 않는다. 창조성, 유일성, 고유성이 그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베끼는 것은 오직 자연과 삶이 운동하는 법칙이고, 드러나지 않았지만 ‘거기 있는’ 비가시(청)권의 꿈과 이야기들이다. 문화예술은 전유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개방, 소통, 공유를 전제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복제하고 확산하면서 부를 취하는 건 자본의 속성이고, 그것을 특정의 권리와 소유로 통제하고 관리하며 질서화하는 건 행정의 속성이다. 전국적으로 비슷비슷한 관광시설과 축제가 우후죽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수 있는 건 지역문화에 문화예술은 없고 성과주의 관광과 행정만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의 진정한 가치와 영향력은 독창성과 개방성, 그리고 그로 인한 다양성에서 비롯되며, 그러므로 경제적 이익에 치중되거나 행정적 관리의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역문화와 예술이 지속적으로 생동감을 갖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자생적 노력과 예술가들의 창조적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은 단순히 관광자원이나 경제적 수단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의 삶으로부터 비롯된 꿈과 이야기를 담아낼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또한 지역의 역사와 자연, 그리고 정체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사업을 설계해야 관광객과 주민 모두에게 점점 더 깊이 있고 풍부해지는 경험과 가치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지난 7월 4일부터 사흘간 전주 팔복예술공장에서는 2024`대한민국 문화예술관광박람회가 열렸다. 전국지역문화재단엽합회가 주최하는 이 박람회는 지역문화활성화를 위한 지역문화재단의 역할을 모색하는 행사인데, 올해는 ’모두와 함께하는 문화예술 관광‘이라는 주제아래 ‘지역 활성화, 문화예술·관광에서 답을 찾다’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되었다. 문화공연과 포럼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선보였는데 그중에는 문화매개, 지역소생, 문화기획, 재원조성,문화협치, 문화향유 분야에서 지역문화 우수사례로 선정된 25개 지자체 문화재단의 활동 발표와 전시도 있었다. 바야흐로 지역분권의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인구감소와 저성장 궤도에 올라탄 경제적 위기로 지방 중소도시의 문화예술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이번 전시에 소개된 지역문화재단의 사업들은 지역의 문화예술진흥을 위해 주목할 만한 시사점을 던져 주었고 몇 가지 특성을 나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 여기로부터의 기획’이다. 울주문화재단의 ‘오늘의 반구대를 만나는 N가지 방법’에서는 지역의 문화기획자, 창작자들이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반구대 암각화를 전통공연, 뮤지컬, 패션, 공예, 교육, 축제 등 새로운 형태의 문화콘텐츠로 개발해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었다. 평택시문화재단의 ‘공간米학’에서는 지역의 생산 기반인 논과 벼, 자연환경을 모티브로 소리와 색채, 디자인, 체험형 콘텐츠를 개발 운영하면서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민들의 일상 노동과 생산품을 특별한 가치를 담은 경험으로 방문객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데서도 체험할 수 있는 비슷비슷한 콘텐츠가 아니라, ‘지금 여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은 예술의 ‘아우라’와 다름없는데, 이러한 아우라들의 다양한 경험은 그 경험자들의 삶을 고양케 한다. 그리하여 지역은 경험자들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고, 자주 방문하고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곳이 된다. 이는 곧 관여하는 창작자와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의 경제적 활성화뿐 아니라, 사회적 결속력 강화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둘째, ‘함께 사는 모두를 환대하는 문화기획’이다. 완주문화재단의 ‘무장애 프로젝트, 여섯 가지’는 정신장애, 발달장애, 증증장애 등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당사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거나 각자의 바람을 합창, 웹진, 축제 등의 문화예술 활동으로 기획하는 사업으로 모두에게 열린 도시의 문화적 환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의정부문화재단의 ‘문화도시정책페스타’는 “도시를 바꿀 정책은 어디에나 있고,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슬로건으로 1만 명 이상의 시민들을 만나며 도시의 일상 주민들의 삶의 바람을 담을 수 있는 문화예술사업을 모색하고, 이를 축제화한 프로젝트로 민관이 함께 도시변화의 주체로서 협력하는 실행 과정을 기획 운영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러한 문화기획은 단순히 이벤트를 넘어서,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존중받고,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지역 사회는 더 크고 더 나은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풍부한 사회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따뜻하고 환대하는 도시를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됨이 틀림없다.
셋째,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지역적 실천의 기획’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책 [회복력 시대]에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진보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등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지속 가능한 삶터로서의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는 지역사회로부터 출발하며 회복력을 향한 여정이라고 한다. 전주문화재단의 ‘탄소예술프로젝트’는 탄소를 포집해 오래도록 저장할 수 있도록 개발된 탄소섬유를 활용한 예술작품의 창작과 전시인데, 지역 민관산학의 협력적 거버넌스가 있었기에 추진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영상을 통해 소개된 전시만으로는 현장의 느낌을 충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역 민관산학의 협력이 향하는 방향과 그 이념의 구체로서의 예술작품의 창작과 전시라는 순치가 가능한 도시, 전주의 문화적 품격을 알려주기엔 충분해 보였다.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앞서 새로운 예술사조가 등장해 왔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근래에 예술계 내에서 생태적 전환의 문화예술기획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활발해지는 것은 특별한 신호임이 분명하다.
넷째, ‘기도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화기획’이다. 기록학자 손동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아카이브]에서 기록은 지역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며, 세대와 계층을 초월한 대화와 소통을 가능케 하며, 기록의 공유와 공감은 서로의 소외를 해소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노원문화재단의 ‘노원을 걷다’는 지역의 여러 길과 장소의 역사,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를 지역 문인들의 상상력을 빌어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하고, 이를 출판과 실감형 AR,VR앱 출시 및 교육으로 가는 과정을 선보였다. 변화가 곧 발전이고 혁신이며 진보라는 명제가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다 보니 지역의 풍경과 일상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고향을 지키고 있거나 떠났거나에 관계없이 그 변화에 적응하느라 늘 바쁜 우리 모두를 추억하거나 성찰할 장소를 잃어버린 정서적 실향 상태로 만든다.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고 기도하는 행위와 그것들의 기록은 문화예술의 시원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다. 특정 장소와 지역에 대한 각자의 기도와 기억을 나누고 공유하는 모든 사람은 문화적 동향인이며, 풍경만을 구경하고 소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지역을 아끼고 돌보는 주민이 된다.
다섯째, ‘지역문화주체 발굴 및 성장의 선순환 체계 형성’이다. 춘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문화예술의 도시다. 춘천의 문화적 브랜드로 자리 잡은 마임, 인형극, 청년문화, 애니메이션 등은 오랜 시간 문화에 투자해 온 정책의 효과일거다. 이번 박람회에서 춘천문화재단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역문화인력 양성 시스템을 선보였다. 10년 이상 꾸준히 예술 창작자와 기획자 같은 문화매개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단계별 지원체계를 만들고 운영함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파트너로 협력토록 해 가는 과정이 전시 발표되었다. 부천문화재단의 ‘부천 마을미디어’는 2016년부터 현재까지 시민들이 주체적인 미디어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플랫폼으로 1,500개 이상의 지역문화 콘텐츠를 생산 공유하고 있다. 지난 3년 전부터는 초기 성장한 시민 미디어 활동가들이 새로운 시민 미디어 활동가의 멘토가 되어 성장을 돕는 시민 주체 성장의 지역 내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실현되기엔 어려운 ‘문화도시는 문화적인 시민의 도시’임을 견지해 온 춘천과 부천 지역 문화도시 정책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 2024` 대한민국 문화예술관광박람회에서 지역문화 우수 사례로 전시 발표된 여러 지자체 문화재단의 정책과 사업으로부터 그간 지역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해 노력해 온 현장들이 정책과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지키고 있는 주요한 다섯 개의 원리를 살펴봤다. 위의 사례 외에도 그간 지역문화예술 주체로 호명되지 않았던 지역 내 관광 사업체나 시민단체와 거버넌스를 형성하면서 지속가능한 지역문화관광의 파트너십을 이끌어 낸 남해관광문화재단의 정책과 사업이나 지역 전시 해설사 과정을 수료한 주민들이 전문 도슨트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면서 지역문화협력 주체로 변화하는 선순환 과정을 보여준 강북문화재단의 사례 또한 흥미로웠다.
출생률 저하나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화로 인해 지방이 소멸하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위기감이 팽배하고 있지만, 노동과 결혼 인구에 대한 개방적 이민정책이나 정부와 지자체가 앞다퉈 내놓고 있는 출산과 이주, 관계 인구 등의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인구 감소로 인해 지방이나 나라가 망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다만 이민자들이나 노인 인구가 많아지고, 자동화된 지능형 기술의 발전으로 노동 생산 인구 구성의 변화는 불가피한데, 이 역시 일․가정 양립이나 일․놀이․학습의 조화로운 경험을 통한 전인적 성장을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 우리가 경계하고 위기감을 가져야 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는 오직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돌봄공동체의 실종이다. 이에 대한 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금 여기로부터의 기획‘, ’함께 사는 모두를 환대하는 문화기획‘,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지역적 실천의 기획‘, ’기도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화기획‘, ’지역문화주체 발굴 및 성장의 선순환체계 형성‘을 위한 정책사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사례로 축적해 온 지역문화현장들이 내외부 역학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더 많은 실천지로 확장해 가길 바라며, 여타 지역의 현장들은 그 원리를 익혀, 각자의 지역에 맞는 정책사업들을 기획하고 발현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