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 광역문화재단의 중간관리자로 일할 때, 팀에서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도와줄 한 친구가 왔다. 대학교 4학년의, 여성이면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재주도 있었던,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던 청년은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문화재단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가려지지 않았던 첫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서른 일곱이 된 청년이 11월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소식을 알려와 오랜만에 다른 지인과 자리를 만들어 오붓한 축하를 미리 했다
일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몇 년에 한번 보아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떠들어대는 우리 셋의 대화는 자연스레 각기 다른 사회, 문화적 계약 형태로 타인과 동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모습과 격한 시간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여성, 문화예술판에서 일한다는 것 말고는 아마 공통점이 없을 우리들의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들은, 조금 떨어진 시선에서 보면 여성과 결혼,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어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떠안고 있는 문제적 현상의 단면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러 감정의 사건들을 통해 본능적으로 움찔할 줄만 알았던 공기 같은 삶의 순간들을 말로, 글로, 문화와 예술의 (탈)형식으로 때론 힘을 주어, 또 때로는 힘을 빼고, 또 때로는 축 늘어진 채로 말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화활동을 하는 이의 작업이면서 견디는 일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것을 ‘삶을 묘사하는 일’이라고 표현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 1의 기획이 죽음을 잘 말하는 것이고, 그녀 2의 작업이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고용된 안정감에 연연하기보다 살갑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그녀의 반려묘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고 이를 투사한 직물 작업을 하며, 그녀 3의 작업이 의도적으로 ‘다 정하지 않음’을 통해 과정과 함께 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지지하며 당장 그럴듯하게 드러날 수 없는, 그들과 만들어가는 시간의 힘을 빌어 이야기의 깊이를 만들어 가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좋은 문화기획, 좋은 생활문화기획, 활동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런 것들이 살아 있는 문화기획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을 묘사하는 일은 삶을 반복적으로 되돌아보며 머뭇거리는 행위다. 삶의 자리, 관계, 요소의 복잡함들이 끄집어내어지고, 자신을 해치지 않는(소외시키거나 증명해야 하는 강박, 이를 유발하는 원인 등) 의미의 위치에 생각이나 상황 등을 이리저리 재배치하도록 이끈다.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복잡함 덕분에 재배치의 경우의 수가 많아져 배치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재미가 극대화된다. 안하던 것을 해본다거나 글을 쓰고, 책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예술가의 이상한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자기 속도와 여력만큼 농사를 짓거나 밥을 해먹으며 서로의 이야기에 닿으려고 조심스레 관계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같이 하기도 때로는 홀로 고독한 시간을 통해 여러 방식을 취한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단절하고 거리를 두는, 아무것도 안함으로써 적극적인 실천이나 참여의 의미가 생성되는 경우도 있다.
자기 삶을 당차게 살아가는 과정과 생활문화활동이 자연스레 동행하는 이들을 곁에서 보면 생활문화활동을 하는데 드는 수고와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만드는 재미는 이런 맥락의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적 가치로서 만들어가야 할 생활문화는 선명하고, 단순한 것들과의 다툼, 즉 삶을 ‘빨리, 쉽게, 많이’의 형태로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런 토대가 되었을 때 서사라 불리는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러보면, 생활문화 활동의 다수는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낙후하거나 결손이 있다고 여겨지는 동네나 사람들에게 노래, 연주, 춤, 그림, 공예 등을 보고 듣거나 만드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사실 이 부분도 엄밀하게 보자면, 생활문화 활동에서 기회를 제공받는 이들은 연희를 하는 그들 자신이다. 그들의 공연을 들어주고 보아주는 기회를 다른 시민들이 무대에 선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 보는 게 적절한 경우가 훨씬 많다고 여겨지지만 제공자의 인식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정반대의 입장을 상상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이 제공은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 향유 기회가 되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생활문화 활동에서 제공자가 갖는 시혜적 태도는 누구보다도 제공자로서 자신의 위계적 입지를 만든다는 데 많은 문제가 있다. 대상으로 지칭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것에 의지하게끔, 스스로는 모른다거나, 할 수 없다, 나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적 태도를 유발한다. 이런 현장에서 서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되려 그런 형식들에 유심히 보아야 보이는 낮은 삶들이 가려지고, 무감각해지며 결과적으로 은폐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생활문화의 대표적인 형식이라고 알고 있는 동아리, 동호회가 보여주는 활동과 구조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하는 문화적인 삶이라는 것이 각자의 관계나 삶의 상황에서 마땅히 다 다르게 이해되고 받아들이는 것이겠지만, 우리의 이해는 개별의 이야기가 발견되고, 목격되거나, 드러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지난 봄, 어떤 합창단 운영자들과 나눴던 어색한 대화를 떠올려보면, 어떻게 이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냐는 물음에 돌아온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른다’는 회신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 심심해서 놀았다, 졸려서 잠이 들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가, “학교 어땠어? 재밌었어?” 하고 물으니, “응” 하고 돌아선 아이의 뒷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엄마의 헛헛함과 닮아 있다.
동아리나 동호회라는 형식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또한 그 형식을 갖고 있는 활동 단위들이 모두 그러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동아리가 억울하겠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허나, 특히 문화정책, 지역문화라는 제도적 구조에 동원된 동아리로 대변되는 생활 모임들이 ‘스스로 조직된’ 자율과 열정의 독립체라는 정체성을 귀하게 잘 다듬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모나게 가꿔갔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비평 없이 정책이나 제도 아래 줄을 서,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내 삶을 살고 있다는 나다움의 해방감이 나의 기쁨이 될 때를 만들고 맞이하기 위한 시도이자 계기로서 지원금의 쓸모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삶을 들여다보는 묘사의 과정을 머리로만 생각하면 순전히 개인의, 개별적인 차원의 것으로 보이는데 막상 해보면 여러 종류의 타인(타종)들이 가깝게, 조금 떨어져 내 삶의 언저리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존재와 관계들이 보이고,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것과 무심결에 지나쳤던 것들의 위치가 바뀌거나 중요함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새로운 무리들도 보인다. 이 새로움은 이전에 없었던 것의 느닷없는 등장이 아니라, 삶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내 삶에, 또는 내가 긴한 영향을 주고받아 왔지만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알아채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친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하다. 익숙한 생활문화 활동의 모습 중 하나가 관계의 친밀함을 토대로 확장을 꾀하거나 친밀함이 목적인 경우들인데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사람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친밀함, 즐겁고, 유쾌하고, 밝은 모습들을 접하면 누구나 흐뭇해진다. 그래서인지 생활문화 활동이라는 게 왁자지껄한 (가시적인) 풍경을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내내 강조하였듯이 삶, 삶으로서의 문화와 예술을 그것으로 갈음할 수 없다. 그림자가없는 풍경들에 감춰진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누구가의 삶이 존중되기보다 그럴듯한 옷을 입혀 무대에 올리고 갖다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속상하지만 지역에서, 도시사업 등 관 주도사업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이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이분법이 아니라 단박에 보이지 않는 나머지 것들을 여러 명암의 그림자라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빛을 비추어야 각자가 갖고있는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시도하는 것으로서 생활문화를 떠올려 보자.
문화예술의 생명은 다양성이다. 저마다의 삶이 품고 있는 그림자는 다양함의 밑천이기도 하다. 다소 낯설고, 임시적이고, 우연적인 상황에서 타자를 만남으로써 삶의 다양함과 섬세한 다름을 경험할 수 있을 때, 세상을 대면하여 대화할 수 있는 태도의 힘으로서 나의 몸과 인식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열림이라는 각성은 그/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성장했다거나 조금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고 이것이 앞서 언급한 재미와 기쁨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뭔가 더 나은 것, 가치 있는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키는 실천의 연료로 작동한다. 그러니 삶을 들여다보려는 지극한 의지와 시간을 빼고 생활문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도리가 없다.
*** 이 글은 평택문화재단 생활문화매거진 『평생레시피』(2023)에 쓴 원고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필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