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일부터 한 달간, 부천 아트벙커B39에서 [소사공단: 기계를 짓는 공장]이라는전시가 열렸다. 시각예술가, 사진작가, 문화연구자, 아키비스트, 건축가, 영상제작자가 모여 만든 프로젝트 그룹 ‘ Factory 134 장소 기억연결 프로젝트 ’ 팀이 전시를 진행하였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사공단에서는 신문 윤전기가 돌아가고 과자와 껌,맨홀 뚜껑과 펄프가 제작되었다.
2023년 12월 말, 완전히 철거되는 소사공단의 마지막 공장. 「또 다른 존재들에대한 기록」에서 프로젝트팀은 이렇게 말한다. “ 공장이 생산을 멈추고 나서도 오랜 시간 머물던 기계들이 빠져나간 후,공장은 비로소 생명을 다한 듯 재빨리 낡아져 갔다. … 공장에서 나온 쇳밥이 땅을 덮은 중에도 풀들은 자라나고 거대하게 한 면을 뒤덮어 세를 확장하는 담쟁이를 보며 적자생존의 ‘ 적자 ’ 는 강한 자가 아니라, ‘ 적응한 자 ’ 라는 의미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
기능을 잃은 공장지대는 다음을 위한 ‘ 제로 ’ 가 되어 사라졌다. 공장의 기능이 멈춘 그 사이로 예술가들과 기록자들이 들어갔다. 폐허로 돌아가기 직전에, 공장지대는 순간적이나마 예술작업장이 되었다. 산업 형식이 예술 형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철거된 공장 터에서 자란 갖가지 풀들은 액자에 들어가 기억을 보존하는 예술작품이 된다. 모든 것이 변한다. 견고하고 녹슨 모든 관계는 낱낱이 해체된다. 이 프로젝트는 의미심장한 형식 전환의 사례다. 관람객들에게 알레고리 형식의 예술을 전달하여 산업 이후, 문명 이후를 상상하게 한다.
소사공단 프로젝트 기획전
곧 칠순을 맞이할 서영남 씨는 2003년 민들레식당을 열었다. 올해로 20년째다.
“점심때가 되면 긴 줄이 설 때도 있다. 그러나 이곳의 밥 먹는 순위는 힘센 사람이 먼저도 아니고, 선착순도 아니다. 가장 오래 굶고, 가장 배가 고픈 사람을 먼저 먹게 한다. 줄서는 것만 바꿔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서 대표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서 대표는 ‘먼저 음식을 받은 분은 양껏 드시지 않고 뒷분도 드셔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경우가 많다’ 고 자랑한다. 사람들은 노숙인들을 비렁뱅이라고 멸시하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안달하지, 이들은 조그마한 것에도 자족할 만큼 소박하기 그지없다는 게 그의 항변이다. 이것이 서 대표가 이들을 ‘하느님의 대사’ 라고 부르는 이유다. 많이 가진 사람들의 욕심은 쉽게 채워지지 않지만, 이들은 조그만 것에도 행복해하니 하느님이 보낸 사람들임에 틀림 없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4월 20일자)
배고픈 사람이 민들레식당(인천시 화수동 골목길 인근)에 토요일에서 수요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사이에 가면, 언제나 무료로 밥을 먹을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민들레 식당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 둘째, 기부금을 얻기 위한 프로그램을 열지 않는다. 셋째, 생색내면서 주는 돈은 받지 않는다. 넷째, 조직을 만들지 않는다. 식당을 열지 않는 목요일과 금요일에 민들레식당 식구들은 전국 교도소에 갇힌 형제들을 찾아간다. 서 대표는 노숙인들이 3∼4일쯤 머물다 갈 수 있는 환대의 집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서영남 대표와 민들레식당은 선착순이라는 가장 공평해 보이는 오랜 관행을, 가장 오래굶고 가장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는 형식으로 바꿨다. 가장 빨리 온 자가 아니라 가장 배고픈 자가 우선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놀라운가. 삶이 곧 예술이라면 이러한 삶일 것이다. 민들레식당은 삶의 형식 전환으로 세상의 존재 형식조차 변화시키는 최상의 예술 행위인 셈이다.
가톨릭 수녀들이 민들레국수집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봉사를 하고 있다.
「무지한 스승」(랑시에르)의 조제프 마코토(1770∼1840)가 ‘지적 능력의 평등’ 을 실현한 행동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가 “음악은 특정인의 것이 아닌 만인의 것” 이라는 생각을 실천하여 1920년경에 [카잘스 관현악단]과 [노동자 콘서트 조합]을 설립한 일들, 1975년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1939∼2018)가 “ 음악을 위한 사회 행동 ” 이란 취지로 설립한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활동들은 ‘필요에 따른 형식 전환’ 을 보여준 유명 사례다. 우리의 경우, 동학(東學)의 향아설위(向我設位)와 이천식천(以天食天) 역시 형식 전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음악을 만인의 것으로 전환하고, 대중을 단순한 지식수용자에서 앎의 적극적인 실행자로 위치를 바꾸고, 모심의 대상을 선조의 혼령에서 살아 있는 나로 바꾸는 이 노력들은 사람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훌륭한 전환들이다.
예술은 미적 감각의 형식을 고민하여 다른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주어진 형식을 전환하려 애쓰는 것은 더욱 다양한 자유, 더 풍성한 평등을 예술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존공생을 꾀하는 선한 의지에 따른 ‘ 형식의 전환 ’ 은 인류와 생태계의 운명에 몹시 절실하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세상엔 즐비하다. 지역 축제가 열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폭죽을 쏘아 올린다. 30분 남짓이면 끝나고 마는 불꽃놀이에 드는 비용은 막대하다. 화려한 볼거리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역 문화예술단체들에 소속된 수많은 예술가들이 생계에 매여 택배기사, 퀵서비스,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등과 같은 일에 투입되고 있는 실상은 지자체의 관심 리스트에선 삭제되어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 최규진이 최근 펴낸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서해문집 2023)에는 독특한 포스터 한 장이 실려 있다. 이 포스터[벽신문]에 적힌 일본어는 이런 뜻이다. “서로 무뚝뚝함과 찌푸린 표정보다는 따뜻한 친절과 예의를, 밝은 미소를 가게 앞에, 창구에, 직장에 넘쳐나게 해서 더욱 밝게, 강하게, 직장에 넘쳐나게 해서 더욱 밝게, 강하게, 유쾌하게 총후(銃後)의 모든 힘을 발휘하고 정진하여 장기전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는가!”
포스터의 끝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의 서명이 있는데, 조선총독부가 직접 지휘해서 만든 관변단체이자 대중선전 및 동원 기관이었다. 일제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데 이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전선을 확대하던 시기에 이 포스터는 만들어졌다. 수십 만장이 인쇄되어 전국 대도시 곳곳에 붙여진 이 포스터의 배경엔 흐릿하게 활짝 웃는 여성들의 모습이 배치되었다. 이 포스터를 소개한 최규진은 이렇게 말한다.
1942년 제작된 ‘ 벽 신문 ’ 은 여성의 감정노동을 강조한다. 도시 곳곳에 부착되었고,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에도 실렸다.
“ 왜 그랬을까? 친절이라는 가치를, 활짝 웃는 여성의 이미지로 가시화한 것은 젠더적 분할을 보여준다. 또한, 대인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겨냥한 탓이기도 하다. ‘명랑은 직업을 가진 여성의 재산이다. 고객에게 친절하라’. 그렇게 여성 노동자에게 감정노동을 더 많이 요구했다. 성질 죽이고 일해야 하는 감정노동이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감정 관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가정은 항구와 같아서 남편과 아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어야 하고, 주부가 명랑해야 한다’ 라는 논리도 있었다. (…) 초등학교 여자 어린이에게도 군복을 만들게 하는 것, 그것이 명랑 운동의 본질이었다. 친절 운동은 단순한 서비스 강화 운동이 아니었다. 온갖 어려움을 달게 받아들이며 전쟁을 명랑하게 뒷받침하라는 뜻이었다. ‘명랑’ 은 일제 말 동원정책 때 즐겨 썼던 어휘였지만 해방 이후 단독정부 수립에 즈음하여 다시 사용했다. 그 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등에서도 ‘명랑화’ 운동을 했다.”
위 포스터는 화려한 이미지와 경쾌한 문장으로 구성된 예술적 형식이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한, 부정적 전환 사례다. 이 형식은 벤야민이 말한, 바로 ‘파시즘의 미학화’ 에 해당한다. 여기에서의 전환은, 개인을 국가로 포섭하여 전선에 배치하려는 군국주의의 필요에 따른 것일 뿐이다. 형식 전환이 늘 긍정적일 수만은 없음을 깨닫게 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영문학자 캐롤라인 레빈은 ‘세상 모든 게 형식’ 이라고 말한다. 「형식들」(앨피 2021)에서 레빈은, “형식은 언제나 요소들의 배열, 즉 질서화, 패턴화, 형태화” 를 가리키며, “사실상 모든 형태들과 배치들, 모든 질서화의 원리들, 모든 반복과 차이의 패턴들” 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형식은 제한하고, 다수이고, 중첩하고, 이동 가능하고, 상황적” 이다. 지금의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도 ‘형식’ 이고, 대의민주주의 정치형태도 ‘형식’ 이다. 즉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예술적인 것 나아가 일상의 모든 근간에 ‘형식’ 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형식들, 자기생성과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자기생성과 인지」(갈무리2023)에서 ‘자기생성(auotopoiesis)’ 은 세포-인체-사회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체계’ 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살짝 단어를 변형해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 ‘삶의 형식’ 의 본질은 자기생성에 있다.
마투라나는 체계가 ‘자기 유지 관성’ 이 있다고 파악한다. 위의 레빈 역시 ‘질서화’ 를 형식의 주된 양상으로 본다. 형식은 인식과 존재의 틀로 작용하므로, 삶의 유지에 필요불가결하다.
하지만 자기 유지의 관성이 극에 달하고, 질서가 욕망의 분출을 억누르며 경직될 때엔, 낡은 형식의 파괴와 새 형식의 창출이 불가피하다. 형식은 삶을 보존하다가 해체된다.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서 다시 삶의 형식을 재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