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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로컬의 미래와 문화적 행갈이
고영직 | 문학평론가
지역은 무엇으로 사는가

‘지역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즘 나의 고민이다. 2024년, 지역의 미래가 마냥 밝아 보이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격(格)을 생각하고, 지역에서 문화적 행갈이를 바꾸려는 재미있는 모색들이 있는 한, 아직은 희망을 품어도 좋겠다고 애써 생각한다. 쉽지 않다. 지역의 문화적 구조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 문화학자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말한 감정 구조(Structure of Feeling)란 하루아침에 바뀔 만큼 그 토대가 허약하지 않다.어쩌면 우리의 의식은 물론 무의식을 바꾸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화의 본질은 사실 ‘형식’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문화라고 할 때 내용을 먼저 생각하지만, 문화의 본질은 형식에 있다.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말한 감정 구조의 본질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문화적 형식 같은 의미가 아닐까. 또 예술의새로움은 대체로 형식미학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술, 예술가, 예술운동은 어떻게 익숙하고 자명한 것들과 탈정(脫井)하며, 기존의 형식과 다른 ‘어긋남(out of joint)’의형식을 기꺼이 수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이 제시하는 탈-합치(脫合致, de-coincidence)란 쉽게 말해 기존 예술장의 익숙한 질서에서 탈주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장례식이 진행되는 3일장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행장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2022년 최고의 히트작인 소설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장례식이 이루어지는 ‘3일장’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낡은 이념과 상투적인 이야기 대신에, 달라진 지금 여기의 징후를 예민하게 읽어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렸다. 자기 안의 우물에서 벗어나려는 ‘탈정’의 상상력, 합치의 힘에 저항하려는 ‘탈-합 치’의 서사 전략을 잘 구사한 결과였다. 작가 정지아에게 그 여정은 자기 해방의 길이었고, 타자 해방의 길이었을 것이다. “황톳물이 휩쓸고 지나가야 새 질이 열린당게”(259쪽)라는 소설의 대사는 문학도, 예술도, 지역문화도 탈정과 탈합치를 통해 문화적 행갈이가 필요하다는 비유로 읽힌다.
이와 관련해 지극히 사적인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1970년대 중반 어린 시절 우리집은 가난한 소농이었는데 그 무렵 마을에는 상이군인들이 떼를 지어 구걸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집에도 곧잘 방문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사람들이 오면 함부로 내쫓지 않고, 꼭 개다리소반에 밥상을 차려 마루에 내주었다. 그때의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 에도 불구하고 내 뇌리에서 유독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위 일화에서 ‘문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즉 문화는 사람을 대하는 형식처럼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1970년대, 그 시대의 문화 형식은 누군가가 구걸을 오면 제대로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 문화의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이라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상이군인들이 20대 초반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가정한다면, 상이군인들은 당시 불과 40대 초・중반의 나이였다. 어쩌면 어머니와 그들 사이에는 한 세상의 상처와 고통을 같이 견디며 살고 있다는 설움의 동질성 같은 것이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대하는 형식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가 전 세계 11위를 차지할 만큼 ‘선진국’이라고 말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형식은 예전보다 더 진화했는가. 나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변할 수 없다. 우리 안의 감정 구조를 바꾸려 는 일종의 문화적 행갈이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의 행갈이처럼 문화적 행갈이를 바꾸는 것은 결국 우리 안의 의례(ritual)를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의 지역문화가 바뀌려면 형식의 혁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민간과 행정의 거버넌스는 지역문화를 가꾸는 중요한 형식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거버넌스가 잘 작동하고 있는가. 민관 거버넌스는 실종되었고, ‘위원회 거버넌스’조차 잘 작동하지 않 는다. 인구소멸, 지역소멸이라는 이슈에 잘 대응하기 위해 ‘행동하는 거버넌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만 중앙정부와 기초자치단체 간 공존의 지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문화도시 정책의 경우 ‘대한민국 문화도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바뀐 것은 이름뿐만 아니다.

로컬의 미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최근 출간된 서진영의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온다프레스 2023)는 ‘담론으로서의 로컬’ 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로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다음 구절이었다. “현재 얼마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인가를 가늠하기보다 얼마나 여지가 있는 곳인지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달까.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내 고유의 색깔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보다 ‘여지’가 있는 곳이 더 좋은 지역이라는 위의 표현은 지역문화의 목표와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역문화의 본질이란 물리적 인프라를 의미하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사람과 사람 간에 ‘여지’를 잘 만드는 행위와 활동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내가 사는 지역에서 문화의 형식을 잘 가꾸려는 마음과 활동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역의 자기 결정권을 잘 행사할 수 있다. 로컬의 미래는 저절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 춘천문화재단 [도시가살롱] 활동 모습. ⓒ춘천문화재단

로컬의 미래는 ‘지역화’에 달려 있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겪은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좋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1970년대 중반 히말라야 라다크를 처음 찾은 그는 어느 청년에게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라다크 청년은 “여기엔 그런 집이 없어요”라고 답한다. 라다크 사회엔 ‘가난’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다크 사회는 오랫동안 자치의 정치, 자립의 경제, 자존의 문화를 가꾸어오며 ‘면면히’살아왔다. 그런데 호지가 십 년쯤 지나 다시 라다크를 찾았을 때 뜻밖의 광경을 목격한다. 예전에 만난 적 있는 청년이 관광객들에게 “우리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우리는 너무 가난해요”라며 구걸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저 히말라야 오지까지 침투한 세계화란 이름의 자본주의화는 로컬의 미래를 앗아갔던 것이다.
지역은 인구소멸, 지역소멸 같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야 하는 진정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지역은 여전히 인사와 예산 등 권한 행사에 있어서 여전히 중앙정부의 눈치를 살피고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3년 3월, 정부는 ‘문화로 여는 지방시대’를 선언하고,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 시대’를 약속했다. 하지만 2024년 지방 교부금 대폭 삭감에서 보듯이, 사실상 ‘기민(棄民)정책’에 가까운 정책 기조로 일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평상’이라는 형식을 잘 갖추며, 내가 사는 지역을 ‘여지’가 있는 곳으로 바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금 당장 내가 사는 지역의 문화 행갈이를 바꿀 수 없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담대한 태도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은 면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 공부를 하고, 자기 스타일과 언어를 획득하며 ‘한 사람의 혁명’을 하려는 태도가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지역화를 위해서는 ‘1인칭의 마음’이 필요하다.
철학 없는 행정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 또한 중단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정치학자 제임스 C.스콧이 『국가처럼 보기』(2010)에서 말한 비유는 흥미롭다. 그는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이나 전후 일본에서의 삼나무 심기처럼 단일수종 조림(造林) 사례를 들며 삼림을 하나의 상품기계로 크게 단순화할 경우, 지금 당장의 성과는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2세대 나무에 이르러선 20∼30%에 달하는 생산 손실이 발생하면서 결국 ‘숲의 죽음’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숲의 다양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스콧은 이와 같은 폐단을 ‘행정가의 숲’이라고 비유한다. 그리고 그 대안은 ‘자연주의자의 숲’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앙정부든 기초자치단체든 간에 지역문화 정책의 기조와 비전이 행정가의 숲이 아니라 자연주의자의 숲을 가꾸려는 길이어야 한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 정책과 제도야말로 품위 있는 문화사회를 위한 위대한 희망의 원리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非凡)한 힘

지역의 문화적 행갈이는 바꿀 수 있는가. 가장 먼저 의례적인 의례를 조금씩 협력의 의례로 바꾸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자. 예를 들어 지역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축제의 의례는 어디를 가든지 간에 대체로 의례적인 의례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너무나 클리셰하다. 그런 의례적인 의례에서 삶의 파토스(pathos)가 제대로 분출되지 못한다는 점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미라클 모닝’을 비롯한 온갖 루틴(routine) 권하는 소비 중독의 문화가 진짜 의례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 한병철이 『리추얼의 종말』(2021)에서 “리추얼과 예식의 소멸은 삶을 생존으로 격하하고 세속화한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해된다.
‘시민들을 위하여’ ‘지역을 위하여’라는 레토릭 또한 대부분 위선적인 경우가 많다. 어떻게 자신의 자발적인 에너지의 흐름에 ‘의하여’ 활동을 하려는 토대를 만들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1인칭의 자세와 태도가 요청된다. 시민들이 사심(私心) 가득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아이디어에 대해 서로 즐겁게 지혜를 모으고, 함께 실행하는 과정은 1인칭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즐거워야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활동들이 축적된다면 내가사는 지역에서 문화적 행갈이가 조금씩 가능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망해본다.

. 고흥문화생활지대 페스타 장면. 사람책 토크에서 참여자들이 문화갑계, 노마드 고흥 활동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흥군문화도시센터

한 해가 저문다. 나는 어떤 삶의 서사(敍事)를 남겼나 돌아보게 된다. 한 해를 돌아볼 때 나를 가장 설레게 한 일은 2023년 전남 고흥군을 오가며 로컬 매거진 《모당모당》을 발간한 일이었다. 4권의 로컬 매거진을 만들며 고흥이 가진 매력과 로컬리티를 알리는 작업을 했다. 고흥군문화도시센터에서는 문체부 지원을 받아 지역문화활력촉진지원사업(지활 사업)을 추진했다. 문화갑계, 노마드 고흥, 다거점 조성 공(共):터, 로컬매거진《모당모당》 발간 같은 사업들을 지역 주민들을 신뢰하며 함께 걸으며 추진했다. 다시 말해 ‘동보(同步)’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결과는 어땠는가. 지역 사람들이 무얼 가졌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느냐를 확인하면서 ‘가능성’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현장사례’들을 발굴했다. 그것은 내가 사는 지역의 매력이란 결핍형 모델(Deficit model)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한 시민들이 늘어났다는 점에 있었다. 내가 가진 매력자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려는 자산기반형(Asset-based model) 모델로 생각을 전환한 시민들이 급증한 데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지역소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야기의 소멸이고, 서사의 소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로컬이라서 꿈꿀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非凡)한 힘을 신뢰하며 문화적 행갈이를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문화예술인과 기획자들의 즐거운 분투가 유례없는 ‘서사의 위기’를 돌파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너무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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