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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 효 사회에서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하여 -‘늙음’의 발견, ‘늙음’을 향하여
이동준 |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성숙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

나는 그동안 늙음에 대하여 새김질해보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내가 늙음 안으로 들어와 보니 비로소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늙음은 그저 나이 들어 낡게 된 것이고 머지않아 교체가 필요한 부품 정도로 이해했던 게 사실이다. 수명을 다했구나 생각되면 미련 없이 교체해 버리고 수거함에 내다 버리는 형광등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늙음과 낡음이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늙음은 낡음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었다. 꼿꼿하게 자라는 여름 곡식도 시원스레 보기 좋지만, 말없이 고개를 숙인 가을 곡식은 처연히 아름답다. 그게 보이기 시작한 걸 보니 나는 새로운 모험의 길에 들어선 게 확실한 듯하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늙음을 그저 다가오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늙음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이 시기를 겪어보려 한다. 노년을 맞는 일은 인생의 리즈 시절을 맞는 일보다 더 용기가 필요하고 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삶은 죽음을 맞는 연습이라고 말한 그리스의 철학자처럼 이제 노년을 준비해야 할 사람들에겐 삶은 절실하게 늙음을 맞는 연습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매일 늙음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인생에서 노년기는 생물학적으로는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는 쇠퇴의 시기요, 사회적으로는 직장과 일터에서 물러나야 하는 은퇴의 시기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성숙과 완성의 시기가 된다. 성숙(maturity)은 과일이나 음식이 익는다는 뜻이다. 익는다는 의미는 숙(熟)이란 한자를 새겨봐도 알 수 있다. 熟은 원래 갑골문에서 孰이었다. 孰의 왼쪽(享)은 제사 지낼 때 제단을 상징하고, 오른쪽(丸)은 두 손으로 받쳐드는 모습이다.

뭘 받쳐들고 있는 걸까? ‘익힌 고기’다. 제물로 잡은 고기를 제단에 올린다는 의미다. 나중에는 불에 익힌다는 뜻을 강조해서 아래에 불 화(火)를 넣게 되었다. 제단에 올려지는 제물은 불에 익혀야 한다. 이렇게 늙음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에 익혀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성장에 방점을 찍으면 그것은 크로노스(xronos)의 시간이다. 삼켜서 자신의 양적인 증대만을 목표로 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에 빠진 자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자기화한다. 성숙에 방점을 찍으면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된다. 더디지만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는 밀도의 시간이다. 성숙의 시간은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갖추고 준비해서 충분히 발육되어 열매를 내놓는 시간이다. 시간의 역설은, 삶이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는 채울수록 공허해지고,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는 버릴수록 충만해진다는 데 있다.

나는 ‘늙음’을 향하여 돌진한다

우리가 늙음을 성숙으로 이해한다면 노년기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경험이 무르익어서 결실을 준비하는 성숙의 시기가 된다. 삶은 늙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늙음은 그 사람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이 남김없이 발현되어 그 인생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나는, 우리는, 과연 성숙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성숙을 고대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인생의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늙은’이라면 ‘노화’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젊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힘을 다해 저항해야 할 것은 ‘그저 늙어버리는’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이제는 주체적 늙음이 필요하다. 그런 자라야 ‘늙음’으로 용기 있게 들어설 수 있다. 노화에 대항하는 ‘안티에이징’이 아니라 늙음으로 향하는 ‘웰에이징’의 가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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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노화에 저항한다. 노화의 흔적을 없애려고 거듭된 성형수술과 과다한 보톡스 주입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늙음의 표시들을 감추고 지우려고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주름에서 늙음을 보지만, 시인은 주름에서 지나간 세월의 깊이를 들여다본다. 예프투셴코의 시 「할머니」에 보면 시인은 이천에서 만난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속에서 그동안 할머니가 겪어낸 세월의 아픔을 읽어낸다.
‘할머니, 당신의 주름살 속에도/ 영원히 싸우는 병사들의/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들이/ 참호처럼 깊숙이 패어져 있군요.’ 이런 통찰에서 우리는 역사도 또 하나의 주름이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이 주름을 지우고 감추듯 우리는 과거 역사의 어느 부분을 기를 쓰고 감추려는 수많은 시도들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온 시간들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서리 내린 가을 새벽 나는 문득 꿈을 꾼다. 나는 사람들이 가을 곡식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농부 같은 심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을인생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그런 성숙사회가 되었으면 더 좋겠다. ‘늙음’을 보유한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자신이 가진 보물을 지역 사회를 위해, 젊은 세대를 위해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지역이 되었으면 행복하겠다. 그리고 이들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어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신나서 춤을 추겠다. 가슴 뛰는 바람이다.

효의 본질은 돌봄이었다

‘효’는 우리 한국인에게는 수백년 동안 우리의 디엔에이(DNA)에 새겨진 윤리적 가치였다. 설문해자를 보면, 부모를 잘 받드는 걸 효라고 했다. 효라는 글자를 보면 ‘늙을 로’(耂)와 ‘아들 자’(子)가 합쳐진 형태인데 자식이 연로한 부모를 업어서 받들어 모시는 일이다. 전통사회에서 이 효는 자신을 낳아 길러준 부모에 대한 경애(敬愛)를 기초로 하는 윤리로 모든 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길러주었으니 그 은혜를 부모 봉양으로 되갚게 하는 사회시스템이다. 효의 본질은 돌봄이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다.

동양의 사회는 효의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효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강요가 되고 억압이 되고 고통이 되니 문제가 된다. 다 까고 얘기하자. 효의 대상은 살아있는 부모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후의 부모와 조상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사를 통해 아들은 부모와 만나고 조상은 후손과 만난다. 제사는 유한한 인생을 살았던 이들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의 공간으로 소환되어 시계열로 이어지는 유교적 영생의 실현 방식이다. 어디 그뿐이랴. 효는 시간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확장되어간다. 효가 확대되니 충이 되고 열이 된다. 충신은 효자의 집안에서 나온다.
여자는 효부가 되고, 열녀가 됨으로써 가문을 지킨다.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자녀들에게 보고 배우라고 그리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수많은 열녀를 양산하는 사회체제로 변모해간다. 효자도 힘든 노릇이지만, 효부·열녀는 극한의 고통과 인내를 견뎌야만 따낼 수 있는 타이틀이다. 이런 타이틀을 따내야 가문은 명예롭게 이어지고 정려(旌閭)를 받아야 가문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조선의 열녀들. 그들은 사회안전망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효는 그대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어떤 사람에게 효는 그야말로 끔찍스런 경험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시부모와 시댁 식구, 자식과 남편을 건사하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천형과도 같다. 오늘날의 돌봄은 부모 봉양과 자녀 양육, 가족부양을 뜻한다. 과거 가부장적 유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시대엔 부모 봉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효라는 이름으로 가족에게 굴레 씌웠다. 이 굴레는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되고 초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지금까지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이 부양의 문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본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은 남편과 사별한 중년의 여인이 이제 ‘며느리’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해 감행하는, 기존 질서로부터의 풋풋한 반란을 그린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참견이 늘어나는 시어머니, 그리고 점점 며느리에게 기대기 시작하는 시댁 식구들. 주인공은 고민 끝에 노인 봉양의 의무만 남은 관계를 정리하기로 하고 사후 이혼을 결심한다. 이제 남편과 같은 묘에 묻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성씨도 결혼 전 성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 책에 달린 어느 열성적인 댓글처럼, 며느리는 신랑 집안의 ‘무급’ 요양보호사가 아니고 소중한 친정엄마의 ‘딸’이다.

돌봄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 돌봄이 사라진 도시

지역소멸이란 인구가 줄어들어 더 이상 생활할 수 없게 되는 지역이다. 지역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가져오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와닿는 문제는 내가 늙고 아플 때 돌봄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전엔 그 돌봄을 가족이 감당했었다. 하지만 지금 노인부양은 가족의 몫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고령자의 대부분은 가족이 없는 1인 가구, 그러니까 독거노인가구다. 누가 이들을 돌볼 것인가? 국가가 책임진다고? 천만의 말씀. 과거 가족이 책임지던 돌봄을 국가가 맡아서 하겠다며 내놓은 것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다. 하지만 서비스를 한번 받으려면 까다로운 선별심사를 거쳐야 하고 야박한 서비스시간에 풀이 죽는다. 게다가 이 제도는 요양보호사들을 값싼 시간노동자로 내몬다. 결국 책임은 가족에서, 국가로 옮겨지다가 개인에게로 떠넘겨진다.

지역소멸은 한 사회에서 돌봄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돌봄을 전담했던 가족이 사라졌고, 국가가 맡아서 하겠다던 제도는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런 좌절을 몇 번 겪고 나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결국 민간요양병원과 돌봄기관들이다. 사설 요양시설의 출현은 돌봄의 문제를 결국 자본의 논리로 환원시켜버린다. 돈이 있다면 좋은 시설에서 그에 걸맞는 돌봄을 받으며 질 높은 노년의 삶을 향유하시라. 돈이 별로 없다면 국가가 제공하는 노인장기요양서비스를 받으시라. 만일 등급 심사에서 떨어졌거나 인내할 수 없다면 안됐지만 그대로 죽으시라…. 이젠 분명히 알 것 같다. 과거 ‘효’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감당했던 극진한 부모 봉양은 현재 ‘노인장기요양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는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바로 ‘재택사’의 제안이다. 2019년 이미 독거노인가구 비율이 27%를 넘어선 일본의 현실에서 요양시설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또 조사를 해보면 시설과 병원에서 노후를 보내길 원하는 노인은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24시간 노인을 케어해줄 수 있는 그런 시설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익숙한 집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게 더 편안하고 의미 있지 않을까? 국가나 지자체는 그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고독사를 방지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방문과 돌봄서비스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그래서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집에서 혼자 죽기’를 대안으로 권한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왜 인간은 홀로 죽어야만 하는가? 돌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족이 하나둘씩 분리해 나가면 노인은 1인 단독가구로 남겨진다. 과거 ‘효’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던 부모 봉양 무상서비스는 오늘날 노인 장기요양서비스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령층 인구가 급증하면서 서비스받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돌봄로봇 효돌이, 효순이다. 이 로봇은 직접적인 돌봄보다는 건강상태 모니터링과 데이터 수집을 통해 복약 알림, 일상생활 관리, 가족 연락, 긴급 전화요청은 물론 시니어 콘텐츠도 제공한다. 게다가 고립된 생활을 하거나 우울증이 있는 노인과 세심한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AI 개호로봇 *1)이 돌봄 공백을 위한 대안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생애사: 다양한 생애 경험과 만나는 기억공간

동양에서 61세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60년을 인생의 한 주기로 보기에 환갑(還甲)은 개인에게 삶의 순환과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었음을 인식하고 노년을 통해 더 지혜롭고 귀중하게 삶을 살아가는 전환점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61세에 정년이 맞춰져 있다. 이제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은 새로운 인생의 국면에 들어서기 위한 아무런 준비도, 이렇다 할 대비도 한 게 없다. 그저 퇴직금으로 몇년을 근근이 버티다가 각자도생의 비정한 노후세계와 실감나게 만난다.
과거엔 그래도 ‘제사’라는 숨통 트이는 공간이 존재했었다. 물론 여성에겐 가부장적 배제와 억압의 숨 막히는 공간이었지만 말이다. 효는 생전의 부모에게는 정성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는 제사로 봉양한다.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로 죽게 되지만 조상을 기억하고 불러들이는 제사 의식을 통해 자녀가 부모를 만나고 조상과 후손이 하나로 이어진다. 이 자리에서 조상에 대한 기억과 응축된 삶의 교훈이 후손에게 전승되고 환기된다. 개인의 생애 기간은 비록 짧아도 계대(繼代) 전승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고 기억됨으로써 유한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그 기억 속에서 미래세대로 이어진다. 그것이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단절이다. 조상을 살필 후손도 없기에 모일 장소를 얻지 못한 조상의 넋들도 이제는 미련 없이 산회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죽으면 매장이 아니라 화장으로 가야 하는 사회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더 이상 아들과 후손을 통해 제사가 봉양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죽음조차도 가족 없이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홀로 맞이하게 된다. 다음 조치를 위해 교대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소리와 기계음만 들릴 뿐, 그 누구에게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돌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제사는 비록 사라져가고 있지만, 조상과 후손이 만나는 기억공간은 다른 방식으로도 재현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애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위기나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 등에 대한 반응과 선택의 과정이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사를 통해 만났던 과거와 현재의 기억공간은 이제 생애사를 통해 이들의 생애 경험과 이야기를 담아내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생애사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삶을 객관화시켜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재구성해서 자기 서사를 만들어 봄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문화원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생애사 기록사업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소멸 위기에 있는 당대의 기록사업이나 개인과 공동체의 생활사 기록사업은 노인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지역에서 ‘늙음’의 가치가 확인될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한 개인이 겪어온 생애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 지역의 자산인지 인식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노년기에 들어서면 주변을 정리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내려놓고 단순하고 가벼운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이제는 시간적 계승이 아닌, 공간적 확산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기에 말이다. 이는 마치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널리 퍼져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1) ‘개호(介護)’는 ‘곁에서 돌보아준다’는 뜻의 일본어식 한자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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