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만나 관계를 엮고 함께 할 수 있는 뭔가를 도모하는 일이 신나는 사회복지 현장을 떠나, 잠시 자유의 몸이 되어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한 요즘이다. 그 중 하나가 숲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
숲을 공부해 갈수록 그 속에서 사람살이가 보이고 복지가 보인다. 숲에 사는 나무는 ‘함께 하면 더 유리하다’는 걸 안다고 한다. 나무 한 그루는 숲이 아니기에 비・바람에 대책 없이 휘둘려야 하지만, 서로 함께하면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더위와 추위를 막으며 안전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무들은 안다는 것이다.*1) 그렇기에 병든 개체가 있으면 지원을 해주고 영양분을 공급하여 죽지 않게 보살피는 것이 숲이다. 또한 숲은 공동체이기에 허약한 구성원도 함부로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만약 그럴 경우 숲에 구멍이 뚫리고,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서로에게 어려움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연대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로 존재한다.*2) 숲은 경쟁을 통해 누군가를 이기는 방법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비법이라는 것을 아는, 아주 현명한 존재다.
이런 자연을 인간은 철저히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대상화한다.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무한 성장 자본주의는 자연을 인간을 위해 쓰이는 ‘쓸모’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인간에게 ‘해가 되느냐, 득이 되느냐’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해충’과 ‘잡초’란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해충은 박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잡초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은 분리된 존재가 아닌 연결된 존재이며,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는 연대해야 함을 지금의 기후 위기가 말해주고 있다.
그동안 나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다양하고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요즘 숲을 공부하면서 사회복지 현장에서의 경험을 ‘숲’이라는 틀 안에서 재해석하고, 사회복지 지형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간 만나온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의 사람, 사회적 관계가 단조롭거나 제한되어 있어 외로움이나 정서적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의 시선에서는 이들을 ‘사회적 취약계층’이라고 부른다.
걸을 수만 있어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사회복지는 ‘사람과 장소 사이에 관계(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라는 개념으로, 그리고 사회복지사는 관계를 만들고 공동체를 만들며 ‘사람과 세상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지역사회복지관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마을이 복지관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에 기반한 활동을 지향해왔다. 사회복지를 처음 시작하던 초년생 시절부터 나만의 언어로 사회복지와 사회복지사를 정의해보겠다는 생각을, 그동안의 실천 경험을 복기하며 정리해본 주관적인 정의이다.
마을이 복지관이다
흔히들 복지관이라고 하면 “어려운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라는 낙인을 찍기 십상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찬을 가져다주고, 가정을 방문해서 거동을 돕는 그런 일들을 떠올린다. 물론 이런 일도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사회복지관은 돌봄이 필요한 당사자를 돕는 일 외에 ‘당사자가 주민으로’ 살아가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한 의제로 설정한다. 그래서 마을이 연대하는 숲이 되는 일을 지향한다. 또한 돌봄이라고 하면 ‘돌봄이 필요한 당사자 개인을 케어’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기 쉬운데, 적어도 지역사회복지관은 복지관이 관여하는 돌봄이나 빈곤의 문제가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연민과 연대’를 실천의 중요한 지향으로 삼고 지역과 함께 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관계적 존재이며 누구나 의존 속에 살아가는 존재*3)임을 알기에, 사회복지사들은 돌봄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을 돕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관계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관점과 지향을 갖느냐는 실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일했던 복지관 인근에 공공임대주택이 건립되는 일이 있었다. 그곳에 입주하는 주민 중에는 소위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불리는 독거어르신, 장애인, 정신장애인이 상당수 존재했고, 이들을 위해 단지에는 사회복지시설이 의무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여러 이유로 가동되지 않고 방치되자 입주민들은 당시 주민들을 만나고 있던 복지관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별도의 운영비와 인력을 지원받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직원들은 당연히 주민들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며 그곳에서 더 열심히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공간을 운영할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신접살림 마련하듯 이곳저곳에서 후원받은 물품으로 공간을 채우자,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공간을 구실로 서로에게 말을 걸었고, 말을 걸면서 이웃이 되어갔다. 이웃이 되어가니 주변에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그 이웃을 도울 방법을 서로서로 내어놓으며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그곳에서는 1인 가구의 식생활 관리를 위한 공동체 활동, 이웃을 직접 찾아가는 생일파티단, 마을 축제를 기획하는 기획단, 정신장애인들이 증상에도 불구하고 주민들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돕는 활동까지 다양한 ‘서로 돌봄’이 행해졌다.
타자의 시선에서 공공임대주택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일명 ‘휴거(휴먼시아 거지)’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외부에서는 여전히 이곳을 갈등이 난무하는 곳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할 터. 하지만 공공임대주택이라는 이유로 그 갈등은 더욱 크게 부풀려진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마을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이곳이 고립된 섬이 되지 않도록 주변 마을과 연대하는 것,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다. 여전히 이곳에서는 주민들에 의한 서로 돌봄 활동과 그에 못지않게 갈등도 존재하고, 돌봄이 필요하지만 돌봄을 받고 있지 못한 주민도 존재한다.
좋은 생각으로 지은집
두근두근 밥상
설명 : LH 7단지 1인가구 참여자들이 뜨개 소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혼밥의 품격
설명 : LH 7단지 1인가구의 균형 있는 식생활 지원을 ‘혼밥의 품격’ 참여자들과 함께하는 송년 파티 장면.
혼밥의 품격이란 비록 혼자 먹는 밥상이지만 품격 있는 밥상을 마련해보자는 의미이다.
돌봄은 ‘관계,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은 사회복지 현장의 오래된 명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만을 케어하면서, 개인이 살고 있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관여는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장, 이것 또한 현실이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관계와 공동체의 문제로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현장도 있다는 사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더 이상 돌봄이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아는 우리 사회는 사회복지 현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 형태의 돌봄을 시도하고 있다. 이전보다 돌봄을 이야기하는 영역은 다양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세 모녀 사건’은 수시로 일어나고, 여전히 돌봄의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이에 대해 우리 사회는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로 돌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돌봄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의 전환, 그래서 돌봄 뒤로 남겨지는 사람이 없도록 타인의 비평에 열려 있는 것”*4), 이것이 돌봄의 공공성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즉 돌봄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강화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돌보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촘촘한 제도적 돌봄 위에 지역단위 공동체적 돌봄이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사회복지 현장에서 돌봄을 실천했던 경험을 토대로 ‘함께 돌보는 구조’를 위한 제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돌봄은 당사자를 ‘서사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서사적 존재로 이해할 때 타자와의 관계성은 좀 더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고, 관계성을 고민한다는 것은 결국 ‘돌봄은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의 전환을 좀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역단위 다양한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돌봄이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중심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즉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복지적 접근 외에도 문화, 환경, 노동, 평생학습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은 배불리 먹는 삶 못지않게 품위 있는 삶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사는 좋은 삶을 위해 이제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시민교육’이 구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도 되어야 하고, 시민도 되어야 한다. 사람은 되었지만 시민이 되어 있지 않거나, 시민은 되었지만 사람이 되어 있지 않다면 온전한 사람도, 온전한 시민도 아니다.*5) 이제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사람이자 시민으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모든 현장에서 시민교육이 일상화되어야 한다.
나무의 건강은 숲의 공동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6) 튼튼하고 건강한 나무도 살다보면 아플 때가 있고, 그럴 때는 약한 이웃도 큰 도움이 된다. 지원과 도움이 사라진 숲에서는 해롭지 않은 곤충 한 마리 때문에 나무가 쓰러지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제도로서의 돌봄 숲이 탄탄하게 마련되는 것 못지않게 ‘돌봄은 모두의 일’이라는 ‘연대의 마음’을 장착하는 것, 아마도 숲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삶의 지혜가 아닐까 한다.
*1) 페터 볼레벤, 『나무수업』, 위즈덤하우스, 2016년, 14쪽.
*2) 페터 볼레벤, 『나무수업』, 위즈덤하우스, 2016년, 29쪽.
*3)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코난북스, 2022년, 12쪽.
*4)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코난북스, 2022년, 267쪽.
*5) 흥사단교육운동본부, 『민주시민양성교육 교재』, 2021.
*6) 페터 볼레벤, 『나무수업』, 위즈덤하우스, 2016년,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