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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돌봄 찬’ 사회는 가능한가
고영직 | 문학평론가
돌봄 민주주의,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문명의 중심에 왜 돌봄이 없는가?’
위 질문은 <2023 서울변방연극제>(7.7-7.23)에 상연된 SF 렉처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연출조기현)의 핵심 질문이다. 연극은 저출생·고령화가 심각해진 근미래의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5년 동안 아이는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아 ‘무(無)출산’ 사회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젊은 피를 수혈(輸血)해 65세 이상 노인들을 회춘시키는 과학기술을 개발해 인구소멸을 막겠다는 ‘무(無)령화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인생 2회차를 맞은 부모 세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취업은 물론 결혼-출산-육아 등 그동안 당연시해온 생애주기를 철저히 외면하는가 하면, ‘부모 되기’ 자체를 거부한다. 한마디로 말해 ‘살던 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렉처(lecture)와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 는 ‘돌봄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극 후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가 ‘문명의 근거’를 묻는 어느 학생의 질문에 15,000년 전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을 꼽는 장면이 등장한다. 연극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이성애 가부장제 가족 질서가 견고히 작동하는 사회, 누군가를 돌보고 관계를 연결하는 것을 부차적이고 도구적으로 간주하는 사회, ‘할머니 가설’이라는 이름 아래 돌봄(care)의 일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전가해온 사회에 과연 돌봄 민주주의는 있는가라는 점을 말하는 듯하다.
최근 어느 국회의원이 70~100만 원 주고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해 ‘돌봄 공백’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부 또한 외국인 가사도우미 정책에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돌봄 민주주의의 미래가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에 등장하는 저 1970년대 ‘조국근대화의 신앙’(박정희, 1967)이라는 표현이 오버랩되는 것만 같다.

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는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서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지만, 왜 지금 여기의 문명은 ‘돌봄찬’ 사회와 무관하느냐고 묻는다. 특히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 『새파란 돌봄』(2022)을 통해 영 케어러(young carer)로 산다는 것의 힘듦을 토로해온 조기현이 직접 구성, 연출, 출연을 한 작품이어서인지 돌봄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예리하다. 다시 말해 연극 <무출산무령화사>는 인구(人口)를 숫자 이전에 ‘삶’으로서 보아야 하고,18세기 이후 등장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해 살게 만드는 권력의 작동 방식인 ‘생명권력’(M.푸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른바 생명권력은 결국 자본주의의 확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여하튼 <무출산무령화사회>는 노동 중심 사회에서 ‘보살핌’을 위한 돌봄 사회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가치관 변화가 요청된다는 점을 역설하는 작품이었다. 돌봄에 관한 한, 우리는 근본적 회심(回心)을 의미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적 상황에 놓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 사진1-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 포스터.

. 사진2-2023 서울변방연극제. 올해는 ‘취약하고 오염되고 더러운 것들의 축제’를 표방했다. 서울 서대문·마포·성북을 비롯해 고양, 평택, 공주 등지에서 열렸다. 취약하고 오염되고 더러운 것들의 축제라는 행사 취지는 모두를 향한 돌봄, ‘난삽한 돌봄’이라는 이미지와도 잘 부합한다.

다중재난 시대 돌봄의 위기

하지만 자본주의 바깥은 있는가? 그리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만들 수있는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1947년생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길』(원제 Cannibal Capitalism, 2022)에서 ‘식인(食人)’ 자본주의라는 은유를 통해 공식 경제에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감추어진 장소’들을 파헤친다. 자본주의가 인종화된수탈, 사회적 재생산, 지구 생태계, 정치적 권력 전반에 걸쳐 심각한 ‘폭식’을 한다는 것이다.‘돌봄’을 폭식하고, ‘자연’을 탐식하며, ‘공적 권력’의 내장을 적출하고, ‘인종화된 인구집단’의 부(富)를 먹어 치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사람을 먹어치우고, 지구를 먹어치우며, 결국 자기 자신마저 먹어치우는 상황에 상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란 ‘제도화된 사회질서’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그런 점에서 『좌파의 길』은 우크라이나 전쟁, 돌봄의 위기 등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다중재난의 시대 일종의 ‘질문의 책’인 셈이다. 최근 어느 논자가 지금의 자본주의는 ‘테크노 봉건제도’(마틴 포드)의 질서로 변신했다고 했다. 돌봄에 대한 낸시 프레이저의 생각을 들어보자. “신자유주의는 돌봄 활동을 가족과 공동체에 떠넘기면서도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빨아먹음으로써, 사회적 재생산을 불안정에 빠뜨리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을 극심한 돌봄 붕괴로까지 비화시켰다.”(『좌파의 길』, 서해문집, 2023, 296쪽)
낸시 프레이저가 사용하는 ‘식인(食人)’이라는 은유는 최근 다중재난의 상황을 잘 설명하는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여기의 자본주의가 자신을 지탱하는 문명적 토대마저 포식함으로써 자본 자체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파멸에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지구를 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절대로 ‘인류’가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다”(274쪽)라는 구절을 보라. ‘인류세’라는 표현은 ‘자본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 제이슨 W. 무어의 인식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책에서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뱀이라는 비유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이해되는대목이다.

돌봄의 위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낸시 프레이저는 3장 ‘돌봄 폭식가’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노동-젠더-생태-민주주의 의제를 어떻게 통합해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항적 헤게모니’를 구축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고민한다. 그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접합’ 부위마다 벌어지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을 강조하는 것도 이해된다. 흥미 있는 대목은 ‘시장(market)’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최상층과 기층에는 시장이 없지만 그 중간에는 어느 정도시장이 있을 수 있다”(285쪽)는 공식을 제안한다. 최상층에게는 사회적 잉여를 할당하고, 기층에게는 지불 능력을 원칙으로 삼는 게 아니라 ‘권리’의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층에게는 “사회주의자는 중간층을 다양한 가능성의 혼합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상상해야한다”(286쪽)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장이 협동조합, 커먼즈, 자주적 결사체, 자주관리 프로젝트와 공존하는 공간이기를 희망한다. 그 길로 가는 길이 묘연하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지만, 낸시 프레이저의 이러한 시장 구상은 전통적 사회주의와는 판이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 사진3-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 표지.

모두를 위한 돌봄을 위하여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와 낸시 프레이저의 저술을 접하며 이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질문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사에서 문학평론가 김종철 선생(1947-2020)이 던진 유명한 질문이다. 누구보다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거대한 전환을 꿈꾼 김종철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최근의 다중재난 시대를 어떻게 돌파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결국, 문제는 ‘돌봄 정치’(a politics of care)로 어떻게 전환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국가는 사라져도 시장은 살아 남는다’는 식의 노골적인 시장친화적인 신자유주의 행보로는 돌봄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어느 논자가 돌봄 정치로의 전환을 위해 풀뿌리 사회운동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한 주장에 대해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미 애리조나주립대 김정희원 교수는 『황해문화』가 주최한 포럼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다중재난 시대의 길찾기>( 인하대 정석학술정보관, 2023.7.8.)에서 발표한 논문 「반폭력으로서 돌봄 정치」에서 “모두가 돌봄 제공자이자 수혜자가 되는 보편적 돌봄 모델을 더욱 적극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단지 나와 가까운 사람들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돌봄, 즉 난삽한 돌봄(a promiscuous care)을 보편화할 수 있도록 우리 머리와 몸을 바꿔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우리가 겪었듯이, 다중재난 시대의 돌봄 노동은 사회적 편익과 번영으로 이어지는 공공재(公共財)적 성격을 띤다. 결국, 돌봄과 돌봄 노동은내 눈앞에 있는 구체적 사람(혹은 비인간)에 대한 ‘응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봄은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돌봄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유포되고, 돌봄 노동을 폄하하는 사회에서는 저출산·고령화 같은 이슈는 절대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서 돌봄을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돌봄과 돌봄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는 “만드는 방식이 우리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어느 때보다 돌봄 찬(carefull) 탈성장 사회로 거대한 전환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는 좀처럼 ‘살던 대로’ 살던 관성과 ‘하던 대로’의 하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른바 자신만의 우물에서 벗어나려는 ‘탈정(脫井)’을 하지 못한 것이다. 젊은 피를 수혈받아 19세 청년으로 회춘한 연극 <무출산무령화사회>속 어느 배우가 “다시는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냉소주의로는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돌봄 민주주의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시민이란 자기 목소리로 공동체에 참여할 때 탄생한다. 물론 너무 심각해지지 않아야 한다. “가난한데 애 낳으면 죄”라는 담론이 젊은 세대에게 내면화되고,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어”라는 담론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시절, 우리는 ‘각자도생’을 넘어 ‘각자도사’(各自圖死)의 세상에서 고립과 외로움에 놓일 위기에 처해 있다. 돌봄 찬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실천이 요청된다. 문명의 탄생이 그러했듯이, 결국 돌봄 민주주의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시인 블레이크가 쓴 표현 중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사람에게는 우정”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는 우정’이 필요한 시절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 영원히.

. 사진4-새에게는 둥지가 필요하고, 사람에게는 우정이 필요하다.

. 사진5-어느 노숙인이 그린 그림. 집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은 열망이 잘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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