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립 공공도서관과 지역사회가 함께 지속가능성의 열쇠를 찾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다.
“Libraries are all about the community. 도서관은 지역사회가 전부다.” 2022년 10월 느티나무도서관을 방문한 미국 UT오스틴 대학 D. 랭크스(Lankes) 교수는 도서관이 서비스하는 대상이자 그 일부이기도 한 ‘커뮤니티’가 도서관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했다. 지속가능성의 실마리에 꽝! 도장을 찍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건 오랜 일이다. 모든 것이 무료로 운영되는 공공도서관은 흔히 ‘밑 빠진 독’이라고 불린다. 기부에 의존하는 사립 도서관의 살림살이는 말할 나위도 없다. ‘한여름에도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앞길을 장담할 수 없다. 매력적인 압력단체가 되기를 자처하며 선택한 자유의 대가!
처음엔 10년쯤 지나면 길이 보일 줄 알았다. 후원자가 늘어나는 속도를 산술적으로 계산한, 야무진 꿈이었다. 새로 후원을 신청하는 만큼 중단하는 사람도 생겼다. 도서관 구석에 ‘전기요금’이라는 카페도 열었지만 그 수익으로 전기요금을 낸 달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영리와 비영리를 병행하기란 만만찮았다. 도서관 이야기를 담아 책도 펴내고 관장의 ‘앵벌이’라 불리는 강연, 기고, 갖가지 위원회 활동도 했지만 인세, 강사료, 자문비 수입으로는 해마다 늘어나는 예산의 5%도 따라가기에 어려웠다. 운동의 확산에 의미를 둘 뿐.
다시 10년이 지나도 뾰족한 길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오랜 세월 달마다 수백만 원씩 기부해 온 고액 후원자들이 잇따라 재정난을 겪으면서 문을 닫는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다. 마무리를 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평소 잘 쓰지 않는 ‘아름다운’이란 수식어를 달곤 했다. 재단은 더 지속하지 못하더라도 그 정신과 그동안 쌓아온 경험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은 희박했다. 공익법인이 해산하면 잔여재산은 국가나 지자체로 귀속되는데, 기부채납하여 ‘공립’ 도서관이 된다면 실험이나 도전은 기대할 수 없을 테니.
20주년을 앞두고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대신 인연을 맺어온 이들과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화두는 ‘마무리’였지만, 실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갈 이유를 찾으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시민 자산화’라는 개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도서관을 시민의 공유재로 만들 수 있겠다! 국내에도 건맥, 해빗투게더 같은 사례들이 등장해 희망에 불이 켜지는 듯했다. 하지만 펍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협동조합과 달리 도서관은 수익사업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또 한계에 부딪혔다.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민자산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을 그려야 했다. 당장 길이 보이진 않았지만, 도서관이 자기 삶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이 함께 도서관을 유지해 갈 길을 찾기로 했다. 시민들이 돈을 모아 도서관 운영비를 대는, 실현 가능성 낮은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도서관을 함께 꾸리고 함께 이용하는 모두의 자산으로 여기게 된다면, 공공의 재원이 지원되더라도 독립성과 자율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단지 재정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기보다는 커먼즈(commons)를 만들어가자는 도서관 운동의 비전을 좀 더 단단하게 다진 셈이다.
커뮤니티를 북돋우는 데 더 힘을 쏟기로 했다. ‘지식의 동사化’와 ‘공공성의 전환’. 시대 흐름과 사회 요구를 반영하는 도서관의 변화는 ‘제공하는’ 공공성에서 ‘북돋우는’ 공공성, 나아가 ‘불러일으키는’ 공공성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해 왔는데, 그 노력을 우리부터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도서관 한 층을 메이커 스페이스로 만들었다. 2019년 초 마침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추진한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값비싼 기기들도 장만했다. 동네부엌, 동네공방, 텃밭연습장, 공유오피스 겸 다목적 홀이 생겼다. 낭독회나 마을포럼에서 영감과 경험을 주고받던 이웃들은 머리와 심장을 두드리던 상상을 손발과 근육으로 실행해 볼 수 있는 공간을 반겼다. 소비자로 살던 사람들이 바느질, 목공예, 텃밭에서 작물을 길러 요리도 하고 술도 빚고 3D 디자인으로 가구도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프로그램을 짜고 모집하는 방식이 아니라 뭔가 해보고 싶은 사람이 ‘여기 붙어라’ 게시판에 써 붙여 이웃들을 초대한다.
생활문화박람회 현장의 컬렉션 버스킹. 느티나무도서관은 십진분류 대신 이웃들의 질문에서 주제를 골라 책, 기사, 영상, 논문, 법령까지 관련 자료들이 한데 꽂히도록 컬렉션을 엮고, 다양한 공간과 행사에 ‘컬렉션 버스킹’으로 찾아가 활동을 응원한다.
메이커 활동은 삶터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구체적 대안을 모색하는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가져온 페트(PET)병으로 섬유를 뽑아 티셔츠를 만들고, 업사이클링에 디자인을 결합해 장애인들 몸에 옷을 맞추는 리디자인 패션쇼도 하고, 독박 돌봄에서 헤어나 ‘서로 돌봄’의 길을 찾는 돌봄마을 모임도 생겨났다. 관련 자료들로 컬렉션을 엮어, 텃밭에는 [도시농업]과 [지렁이] 컬렉션이, 태양광 패널이 설치된 옥상 길목에는 [에너지를 경작하다] 컬렉션이 꽂혔다. 작은 관계들이 엮이고 확장되면서 도서관은 ‘플랫폼’이 되었다. ‘주어지는’ 공공성은 밋밋하고 획일적이지만, 삶 속에서 함께 체득하고 실천하는 공공성에는 다양성과 상상력이 펄펄 살아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민관협치위원회는 다양한 영역에서 협동조합, 마을공동체, 사회적기업 등으로 활동하던 지역의 단체들이 연대체를 꾸려 지자체장 후보와 정책협약을 이루어낸 성과로 구성되었다. 20년 가까이 활동해 온 시민사회가 비로소 행정과 파트너십을 경험하게 되었다. 협치포럼이나 공론장을 통해 정보도 얻고, 마을에서 도시 전체로 시야를 넓혔다. 특히 지난해 ‘자원순환’을 주제로 시도한 마을실험실은 공론장을 실행 단계까지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성취의 경험은 자신감과 용기로 이어졌다. 느슨하게 연계하던 28개 단체가 ‘리빙랩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2022년 초 문화부와 경기도의 공모사업에 지원했다. 법인으로 공간과 조직을 갖춘 느티나무재단이 주관단체를 맡았다. 각각 2억씩 총 4억 원의 사업비가 확보되었지만, 도서관에까지 할애할 몫은 없었다. 도리어 일거리가 늘고 온라인 플랫폼까지 만드느라 재단 자체 예산을 더 들여야 했다. 그 대신 하루하루 확장되는 네트워크가 오롯이 자산으로 쌓였다.
연대사업의 화두는 ‘연결’과 ‘실험’이었다.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하면서도 지속가능성의 벽과 ‘각자도생’의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던 사람들이 지역과 영역의 경계를 넘는 협력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실험’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생각과 아이디어를 나누던 공론장에서 ‘실천’으로 무게중심을 옮기자는 선언이었고,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무장애 생태 텃밭, 함께 만드는 놀이터, 환경영화 상영…, 주제도 형식도 다양한 문화 반상회가 꾸려졌고, 시민기술골목학교를 열어 IT를 활용한 협업과 홍보물 제작, 업사이클링도 배웠다. 이름은 학교지만 집체식 강의는 배제했다. 폐목재로 화분을 만들어 쓰레기가 쌓이는 골목에 화단을 꾸민 게릴라 가드닝, 소재와 디자인을 배워 제품까지 만든 업사이클링 디자인 등 모든 과정이 실행을 통해 배우는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수공예 공방들과 자원순환 모임이 결합해 호숫가에서 제로웨이스트 마켓을 열고, 왕년에 밴드였던 직장인과 주부들이 공연도 하고, 지역에서 생산한 제철 먹거리로 몸에도 환경에도 좋은 레시피를 개발하는 모임도 생겼다.
2022년 한 해 용인시 곳곳에서 다양한 주제로 리빙랩을 시도한 18개 문화반상회와 삼삼오오 6개 팀. 면적이 서울만큼 넓은 용인의 곳곳을 잇는 거점이 생겼고, 회색으로 표시된 지역들도 채워가려고 탐색 중이다.
지역사회의 문제를 하나씩 탐색하고 정보, 노하우, 암묵지까지 공유하면서 차츰 네트워크가 넓어지고 있다. 도서관은 그 현장 곳곳을 찾아가 컬렉션 버스킹을 열고, 새로 만난 이웃들을 연결해 또 다른 협력사업을 작당 모의한다. 자부담으로 공모사업의 틀을 깨는 시도도 했다. 작은 규모지만 주어진 형식이나 조건 없이 시민들이 선정하고 평가하고 기금을 모아 지원하는 ‘무정산’ 공모사업!
가장 큰 성과는 사람의 발견과 성장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 숨어 있었던 걸까!’ 번번이 놀라며 크고 작은 모임들을 만났다. 사업의 기획부터 함께한 협력단체 대표들과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한 문화통장, 매니저와 코치들은 고생한 만큼 밀도 있게 협업역량을 다져, 약 스무 명의 ‘어벤져스급’ 실무추진단이 꾸려졌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주체들과도 연결할 물꼬가 트였다. 가드닝, 무장애 생태텃밭 같은 프로젝트로 4-H연합회, 친환경농업인연합회와 연결되어 마침내 도-농이 만났다. 소상공인들과 협력할 접점도 찾아, 내년에는 골목의 카페나 식당에서 작은 콘서트나 전시회, 마켓을 열어보자고 모의하고 있다.
사람의 발견은 공간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도시 전체를 그물망처럼 연결할 거점 공간들이 생겼고, 숱한 회의와 워크숍, 공유회 같은 행사에 자리를 내준 지역서점, 복지관 같은 기관들과 한 단계 깊은 협력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나둘 공방을 열기 시작한 메이커들이 임대료가 싼 곳으로 모이게 되면서, 개발에서 비켜난 채 다닥다닥 다세대주택들만 늘어서 있던 골목이 공방거리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도 만들었다. [용인살이의 모든 것(yll.or.kr)]. 다양한 단체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휴대폰에서도 쉽게 소식을 공유할 수 있다. 모든 활동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면서 아카이브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다.
연대사업의 성과를 더 확장해 나갈 기반으로 2022년 11월 용인시민기금이 출범했다. 느티나무가 시민 자산화를 고려하며 5년 동안 모아온 1억 원을 종잣돈으로 출연하였다. 시민기금은 시민들이 연대하여 만들어가는 자조 기금이다. 삶의 전환과 지역사회 혁신을 위해 상상력과 가능성을 펼치는 데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도록, 운용수익이나 성과보다는 활동 주체의 성장에 목표를 둔 ‘인내자본’이자 ‘모험자본’으로 만들어가기로 했다. 약정기간 동안 일정 금액의 기금을 납부하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공간 마련, 공동구매, 자금난 등으로 긴급 자금이 필요할 때 배분위원회 심의를 거쳐 대출받을 수 있다.
협력하여 추진하는 지역 혁신사업은 ‘포괄예산’으로 무상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경험, 관계, 암묵지까지 공유하면서 수익이 발생하면 시민기금으로 보전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잠재적인 파트너들이 발굴되도록 아이디어 공모 형식의 ‘무정산’ 지원사업도 이어가려고 한다. 사업의 심사, 선정, 평가 모두 시민평가단이 맡는다. 시민기금의 생명은 신뢰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공유하면서 기계적인 공정성이 아니라 투명한 협의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기금과 참여의 확대를 위해 대학, 병원 같은 지역 앵커기관들과의 연계도 모색하고 있다. 1년 뒤에는 법인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시민기금 선포식. 종이비행기에 희망을 적어 날리는 130여 명의 파트너들. 한 해 동안 연대사업으로 지역의 문제를 찾아 생각과 경험을 조율하며 함께 배우고 실천한 이웃들이 맛난 밥 한 끼 나누며 서로 응원하는 파티로 열었다.
시민기금 출범은 우리가 쌓아온 신뢰를 증명해 주는 듯했다. 서로 알고 믿고 기대하게 되었으니, 담대하게 시행착오를 포용하면서 실험을 확장해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힘으로 혁신과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전환의 시대, 그 말의 무게를 비로소 체감한다. 기존의 틀을 조금 낫게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인식과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경쟁력을 높이거나 소유권의 지분을 더 공평하게 가르는 수준으로는 이 불안과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없을 만큼,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점점 더 복잡하게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예측하기 어려운 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짓고 돌보며 서로를 살리는 커먼즈의 관계와 문화. 지역 혁신은 그렇게 일상의 삶이 전환될 때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켜켜이 쌓여가는 경험과 우정은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지속해 나갈 이유와 힘도 얻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고민하며 찾기 시작한 지속가능성의 열쇠는 지역사회가 도서관을 필요로 하는 일, 결국 도서관의 존재 이유를 꾸준히 찾고 실현해 가는 데 있었다. 지금 우리가 찾은 존재 이유는 지역에서 삶의 전환을 촉진하고 연결하고 북돋는 역할이다. 도서관은 시민력의 엔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