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별보기

<연재> <사업>
역사문화기행호국의 길 따라가는 김포문화기행

 

김종훈 김포문화원 전문위원

오천년 역사의 벼 재배지이자 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 

 김포는 서울과 맞닿아 있는 도시로 조선 후기 외세의 입김이 거세게 불어 닥칠 때 서울을 향하는 길목으로 방어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더욱이 지금은 한강 하구에서 북한과 마주보고 있어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포는 ‘평야’와 ‘쌀’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쌀의 유명세가 대단하여 ‘김포금쌀’ 상표는 밥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예로부터 ‘북으로는 한강 하류에 임하여 토지가 평평하고 기름져 백성이 살기 좋은 곳’이었고, 벼가 익을 무렵의 적정 온도와 일교차도 꼭 들어맞아서 논농사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김포 통진읍 가현리에서는 약 4천 년 전의 탄화볍씨가 출토되어 이곳 김포가 벼 재배지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강화도가 있는 서해를 향해 비쭉이 튀어나온 반도 형태인 김포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따라서 김포를 탐방하고자 하는 투어는 서울과 김포를 가르는 천등고개를 지나 강화를 향해 가는 48번 국도를 따라 동에서 서쪽으로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 



중봉 조헌 선생의 영정

  48번 국도를 따라 김포에 들어서면 먼저 김포시청 뒤 북성산 자락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조 왕릉의 하나인 장릉이 위치해 있다. 장릉을 견학한 뒤 48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김포가 낳은 구국의 인물인 중봉 조헌 선생의 동상이 있으며, 동상을 지나쳐 중봉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조헌 선생을 기리는 우저서원이 나온다. 다시 되돌아 나와 48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우회전하여 한강하구 쪽으로 들어가면 민족의 한이 서린 역사의 현장인 애기봉이 나온다. 다시 되돌아 나와 김포반도 끝에 이르면 강화대교 건너기 직전 오른쪽에 문수산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 조선 시대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던 문수산성이 있다. 문수산성 견학 후 김포 평화누리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김포반도와 강화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염하강 기슭에 고려시대 말기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건너가던 때의 전설이 담겨있는 손돌의 묘가 있고, 바로 이웃하여 외세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덕포진이 있다. 김포탐방 순서에 따라 하나씩 살펴보자.

장릉(章陵)


 장릉은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추존 왕)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으로 인빈 김씨의 소생으로 선조 13년(1580)에 태어났다. 광해군 즉위 후 왕의 박해로 우울한 생활을 하다가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몰려 죽임을 당한 후 홧병으로 광해군 11년(1619년) 40세로 사망하였다.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 왕으로 추존되었다.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3세 때 원종과 결혼하였다. 인조반정 후 원종과 함께 왕후로 추봉되었다. 인조 4년(1626) 46세로 사망하였다.

 원종과 인헌왕후의 묘는 처음에 양주 곡촌리에 있었다가 인조 5년에 김포로 이장하여 흥경원이라 하였고, 인조 10년에 봉릉하여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장릉은 왕과 왕후의 능을 나란히 두어 쌍릉을 이루고 있다. 능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2009년 6월 장릉을 비롯한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우저서원(牛渚書院)


 우저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인조 26년(1648)에 세워진 서원이다.

 조헌 선생이 태어난 집터에 이만춘 등이 서원을 건립할 것을 상소하여 왕명에 의해 세워졌다. 숙종 1년(1675) 우저(牛渚)라는 이름을 사액 받았다. 1834년 중건되었고 1973~1976년에 전면 보수되었다. 서원은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지은 교육기관이다.
우저서원 내에는 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는 통칸으로 되어있다. 또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이 있어서 조선 후기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말기 서원의 폐해가 지나치다고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47개의 서원만을 남겼는데, 이때 훼철되지 않고 남은 서원 중의 하나가 우저서원이다. 

 조헌 선생의 자는 여식(汝式)이며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열(文烈)이고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중종 39년(1544)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명종 22년 24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헌은 율곡의 문인으로 관직에 나가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상소를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 사신에 관한 상소를 올릴 때는 지부상소(도끼를 짊어지고 상소를 올린다는 뜻)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선조 22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 선생은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승병장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책임회피에 급급한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 당하고 만다. 조헌 선생은 불과 700명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간다.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야 호남평야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적을 물리치고자 영규와 함께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700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애기봉(愛妓峰)


 김포는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요새이다. 김포반도의 끝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조강을 이룬다. 조강 옆 산 정상인 애기봉은 입구에서부터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154고지가 바로 이곳이다. 애기봉 정상에서는 전망대가 있어 북녘땅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애기봉이란 이름은 병자호란 때 끌려간 평양감사를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그리다 죽은 기생 애기의 한이 서려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1968년 이곳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기의 한과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한이 같다고 ‘애기봉’이란 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웠다. 
매년 추석 때면 이곳 망배단에는 실향민들이 찾아와 조상들에게 제를 올리고 통일을 기원하고 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초대형의 트리를 세워 불을 밝히고 있다.

애기봉에서 보이는 북한


문수산성(文殊山城)
문수산성 전경

 문수산성은 김포시 월곶면에 있는 문수산(해발 376.1m)에 세운 석축산성이다. 강화도의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조선 숙종 20년(1694)에 세워졌다. 문수산은 김포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산성은 김포반도의 가장 북서편, 지리적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되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 있어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서울로 입성하는 관문이자 강화와 내륙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의 길목이다.

 문수산성은 서울로 진입하려는 외세를 막기 위한 관문으로서 중요시 되었으며 강화도에 대한 방어와 강화도를 거쳐 내륙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는 저지선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의 내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고, 이 전투로 성내의 민가와 성벽, 문루가 파괴되었다.

 문수산성은 문수산 정상부에서 해안 쪽으로 뻗은 능선을 이용하여 세워진 성벽과 해안에 접하여 축조된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성의 총 길이는 6.2㎞, 둘레는 약 2.4㎞이며 면적이 약 64,000평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이 장축인 장방형 형태이며, 지형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이다.

 현재는 해안쪽 성벽과 문루는 거의 파괴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 일부분만 남아 있다. 남문은 새로이 복원되었다.


덕포진(德浦鎭)과 손돌묘(孫乭墓)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 포대는 서해로부터 서울로의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포대로, 강화를 마주보고 있는 손돌목의 천혜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되었다. 조선 선조 때 설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 때와 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서구 열강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격전지로 역사적 가치와 유물사적 의의를 가진 곳이다. 

 1980년 이 지역의 발굴 조사에서 돈대지와 함께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던 장소인 파수청을 확인하였다. 당시 포탄 7발과 상평통보 2점이 출토되었고, 건물지에서 주춧돌과 화덕 자리가 발견되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고종 11년(1874)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을 마친 후 포대와 토성을 정비하고 돈대지와 파수청을 복원하였다. 2007년 새 단장한 덕포진 유물전시관에는 포의 위치와 포의 유효거리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발굴된 포를 전시하고 있다.
포대는 해안을 따라 구릉처럼 길게 토축하여 이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개별 포대를 설치하였다. 토성의 전체 길이는 700m이다.


손돌의 묘

 덕포진 끄트머리에는 고려시대 때의 뱃사공인 손돌의 묘가 있다. 손돌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 갈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이다. 손돌의 인도로 염하를 건너던 고종은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끼고 손돌의 목을 베었다.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 배를 몰아가면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손돌을 후하게 장사지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손돌 진혼제

 조선시대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가 그곳 주민들에 의해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중단되었다. 그 뒤 1970년부터 제사를 다시 지내기 시작했으며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 주관으로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내고 있다.

 김포의 슬로건은 ‘BEST GIMPO(김포)’이다. BEST, 김포를 방문한다면 당신은 최고의 가장 좋은, 가장 행복한 여행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김포로 떠나보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