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사전에서 ‘자생(自生)하다’는 “1. 자연히 싹터서 자라다, 2. 외부에서 유입되지 않고 내부에서 저절로 생겨나다, 3. 스스로의 힘만으로 삶을 꾸려 나가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 규정은 자연생태와 인간사회생태를 모두 아우르고 있으며, 특정한 지리적 경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지역’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두 번째 규정은 틀린 말이다. 모든 종(species)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토착구역 이외의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구역의 자생종(indigenous species)이 반드시 해당 구역의 고유성(Endemism)을 획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유입종(introduced species, alien species, exotic species, non-indigenous species, non-native species)도 자생종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생태에서의 이러한 사실은 지역사회생태계에서 이주민, 혹은 외부 자원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특정 구역의 자연생태는 태양에너지를 받는 위치의 차이로 인한 온도 분포, 대륙과 바다의 분포, 고도 혹은 깊이의 차이, 지역의 역사, ‘미기후’ 등 다양한 요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 사전의 세 번째 개념 규정도 적확한 개념이라고 할 수 없다. 자생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햇빛과 물, 바람, 기후 등 외부 환경과 생태계 내의 유기체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 특정 유기체의 생존이 결정되는 것이지 ‘스스로의 힘만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독립적 유기체는 없다. 우리가 흔히 자연생태계의 유기체 간의 먹이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먹이사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생태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먹이그물’이 자연생태의 먹이 구조를 설명하는데 훨씬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먹이그물이 다양하고 촘촘할수록 건강한 생태계라는 것이다. 자연생태계엔 적자생존도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상호부조, 즉 ‘만물은 서로 돕고 산다’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소 장황하게 자연생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자연생태가 인간사회생태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세계관의 근간에는 자연생태를 해석하는 방식과 관점이 녹아 있다. 자연생태의 유기체 가운데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을 통해 살아남은 ‘적자(適者)’가 ‘선택’받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에 적용해 개개인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믿게 만든 일련의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당대의 다윈 추종자들은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제3세계를 식민지화한 제국주의 흐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했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인간 사회에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논리다. 영국 사회학자인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과 인류학자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우생학 등은 진화론을 우생학으로 연결시키는 논리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골턴은 저능아와 장애인들의 단종(斷種)을 주장했고, 이러한 논리는 히틀러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낳는 토양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무한경쟁을 당연시하는 풍조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윈은 「인간의 계보, 선택과 성의 연관성」이라는 논문에서 “자연 선택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종들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서로 돕고 단합할 줄 아는 종들이다. 협력을 잘하는 구성원들이 많은 공동체가 잘 번창하고 가장 많은 수의 자손을 부양한다.”라고 말하고 있어 다윈을 악용해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다윈의 의사와는 무관함을 말해주고 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간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이른바 다윈 추종자들이 ‘적자생존론’을 제국주의 옹호 이론으로 악용하는 흐름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적자생존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생태나 인간사회생태에도 생존경쟁만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 주면서 그런 습성과 성격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이 글의 주제인 ‘지역 자생’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의미하는 ‘지역’은 한국의 현실 상황으로 볼 때 기초지자체로 치환해 말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그렇다면 ‘지역 자생’은 기초지자체라는 지리적, 행정적 경계에서 지역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지역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렵고, 건강한 지역사회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내부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 생태계와의 공존도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경우, 기초지자체가 모여 광역지자체가 되고, 광역지자체가 모여 국가를 형성한다. 즉 기초지자체의 총합이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광역지자체의 정책과 이웃한 기초지자체와의 상호관계가 지역의 사회생태계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특히 국가의 미래 비전과 정책이 지역 자생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서울지역 일극(一極) 중심의 사회구조가 그 외 지역의 ‘지역 자생성’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이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경제, 문화 인프라와 자생성의 핵심인 지역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서울이 모든 자원과 사람을 지나치게 빨아들임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역 자생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마저 위협하는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본격화하자 노무현 정부에서부터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정책 과제를 설정하고 비수도권으로의 분권, 분산, 분업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 이후 들어선 정부들은 지역을 살리는 정책에 무관심하거나 최소한의 과제로 축소하고 말았다. 최근 집행되고 있는 ‘지방소멸대응기금’도 애초 취지와 무관하게 사용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어 실효성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이른바 ‘지방소멸’도 더욱 가속화되는 현실이다. 최근 산업연구원은 전국 228개 시·군·구의 인구 변화를 조사한 [K-지방소멸지수 개발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소멸위험지역과 소멸우려지역을 포함한 ‘소멸위기지역’은 총 59곳으로 조사되었고, 중장기적으로는 수도권지역 일부도 소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자생력’ 회복은 국가 차원의 정책이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역 스스로의 정책적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 놓인 지자체들 사이에서도 지역자생력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차원의 정책 철학과 노력에 따라 지역의 미래가 바뀐 무수한 사례들이 자구적 노력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이런 사례들은 때로는 지자체 집행부가 상대적으로 유능한 경우도 있고, 시민 결사체들의 노력이 성과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민의 역량이 성장해 지역의 자생성을 높이는 것이 지속성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들자면, ‘유후인’과 ‘유바리’시가 극명한 대비 사례인데 유후인의 경우엔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지키고, 시민의 단합된 자발적 노력으로 지역을 살린 데 반해 유바리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소수 의사결정구조를 통해 마치 회사 경영처럼 지역개발을 추진하다 결국 파산을 맞은 바 있다. 이런 사례를 통해 볼 때 시민역량 강화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혁신, 사회적 공론과 합의를 통한 과정의 중요성, 지역 자원의 가치를 발굴, 활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안목 등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지역 자생력을 높이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발전’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대부분의 지자체 집행부는 산업사회의 낡은 인식체계와 정책 대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에서 추구하는 양적 성장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것이다. 지역 현실과 무관하게 기업을 유치하고, 관광객을 늘리고,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양적 성장하려는 관성에 머물러 있다. 기업을 유치해서 일자리를 늘리려는 의도 자체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쇠퇴하는 굴뚝산업이 아닌 유의미한 산업시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인프라의 집약과 전문 인력의 수급이 가능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조건을 갖춘 지자체는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관광객의 단순한 양적 팽창은 오버투어리즘의 폐해를 불러옴으로써 양면의 칼날로 작용할 수 있는데 이런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구름다리를 만들어 관광객 유치에 성공한 지자체 사례가 등장하면 너도나도 구름다리 건설에 나서는 게 현실이다. 문명의 대전환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욕망과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고 있는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대처하는 지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요컨대 핵심은 문화적, 생태적 관점의 발전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 살고 싶은 곳도, 놀러 가고 싶은 곳도 그 두 가지 요소들이 좌우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서울처럼 대도시가 갖는 매력 요소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지역이 서울처럼 되거나 서울과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이 주목해야 할 대상은 문화적, 생태적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매력적인 지역으로 질적 전환하는 것이 지역의 과제이다. 그러자면 문화, 생태적 관점으로 발전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사람과 자연, 사람과 도시환경,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문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관점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살기 좋은 지역이 되면 인재가 유입되고, 새로운 활동이 일어나 지역 자생력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 형성이 중요하다. 지역자생력은 건강한 지역생태계 형성과 작동으로부터 발생한다. 지역경제생태계, 지역교육생태계, 지역정치생태계, 지역문화생태계 등이 올바로 작동하고, 상호부조할 때 지역자생력이 커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갈수록 문화의 위상과 역할이 커지고 있는 세계적 흐름이다. 문화와 경제, 문화와 복지, 문화와 환경, 문화와 교육 등 상호 관계에서 문화의 역할과 접점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관광이 활성화된 지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화콘텐츠, 즉 지역문화 활성화가 주요 요인인 것을 알 수 있다. 로컬 크리에이터 활동의 대부분이 문화적 관점의 접근 결과물이며, 관계인구의 형성도 지역문화 활동의 성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청년 문제, 1인가구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도 문화적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문화적 자생성이 생길 수 있는 환경, 즉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 조성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지역의 문화적 관점의 발전 동력은 건강하고 다양한 문화 영역의 구성원들과 이들의 상호부조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는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자연생태계가 햇빛, 물과 바람, 기후, 위치 등 주로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면, 지역문화생태계는 국가와 지자체 등 자원배분을 담당하는 정책 결정 단위와 시장의 영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특히 문화영역은 시장실패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영역이기 때문에 자원의 배분을 담당하는 국가와 지자체 등의 문화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지역문화생태계를 이루는 유기체들의 상호부조를 이루고, 자생성이 커지도록 정책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가와 대부분의 지자체 문화정책은 지역문화생태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하는 방식의 문화정책을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방향, 하향식 문화정책을 시행해왔고, 정책 생산과 시행, 평가 과정에서의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으며, 정책 생산을 위한 연구와 조사 등도 현저히 부족했다. 지자체 행정공무원은 순환보직이기에 전문성을 쌓기 어렵고, 문화재단은 예술지원, 시설 관리, 사업 시행 등에 머무르고 있으며,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문화예산 규모나 문화 관련 조례의 미비 등 안정적인 문화정책 시행 기반도 취약하다. 정책 시행을 위한 준비-시행-사후 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이 문제인 셈이다. 이용자중심이 아닌 공급자 중심,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의견 수렴이 아닌 상명하달식 문화정책이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를 형성할 리 만무하다. 사회적 공론 과정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은 간 데 없고, 지자체장(長)의 취향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된 문화정책이 횡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화정책의 현주소이다.
내가 아는 어느 지방문화원은 지역에서 매우 크고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국가와 지방비 지원금을 잘 받아오고, 지역의 다른 문화단체에 비해 사업 수행도 잘하는 편이다. 한 마디로 실력도 권력도 있다고 할 수 있는 편이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자부심도 높고, 임원이 되기 위한 경합도 치열하다. 다른 문화단체에 비해 실력도 있고, 권력도 막강한 이 지방문화원이 있는 지역의 문화생태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결론을 말하면, 오히려 지역문화생태계를 망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도와 무관하게 지역 내 다른 수많은 유기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뺏고 있는 것이다. 자연생태에 비교하자면 우세종이 지역 내 생태계를 압도함으로써 생태 다양성을 훼손하는 격이랄 수 있을 것이다. 지역문화생태계는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유기체들, 즉 시민, 예술가, 기획자, 예술강사, 교사, 문화전문인력 등 상호 간의 공존과 협력으로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각자의 비전과 역할에 충실하면서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태도와 노력이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를 만드는 길이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명제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사실이다.
한편,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민간의 자발성과 자생성 또한 중요하다. 공공지원에만 의지해서는 지역문화생태계 조성이 불가능하다. 문화예술계의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문화 활동을 즐기는 시민 또한 자생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공연과 전시로 상징되는 전통적 활동을 벗어나 여타 사회 영역으로의 확장성을 가지는 것이 문화와 예술의 파이를 키우고, 사회적 영향력을 넓히는 방법이다. 경제, 교육, 복지, 환경 등 사회의 여타 영역과의 논의와 협업을 통해 지역문제를 문화적 관점으로 해결해 나갈 때 지역의 질적 발전 또한 가능해지고 문화의 확장성도 생긴다. 그러자면 문화정책 수립과 시행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학습을 통해 능력을 신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지역문화생태계를 조성하고, 지역의 문화자생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공공 문화정책의 혁신, 민간의 역량 증진과 자발적 노력을 기반으로 한 문화거버넌스 구축이 필연적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혁신 과제가 관점과 방향성이라면, 마지막 과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현대사회는 갈수록 복잡하고 세분화되어가고 있어 기존의 칸막이식 행정으로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행정부서를 가로지르는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행정의 효과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공급자 중심의 행정으로는 다양한 시민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거버넌스에 대한 개념 규정이 쉽지 않고, 여러 오해들도 존재하는 현실이긴 하지만 사실 거버넌스 구축의 필요성은 앞서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구체적 논의는 어렵지만, 문화거버넌스의 핵심은 지역문화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유기체들의 참여에 기반한 지역문화정책의 혁신체계 구축과 운영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수반되겠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러 정책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역자생력은 동기부여와 자발성, 자율성에 기반한 시민참여에 의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시민 문화활동 성과 공유전
순천만 국가정원
전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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