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지구가 숨죽이고 지내온 지난 3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엇이 우리 삶의 실상이고 진실인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최후까지 인간답게 하는지를 말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그랬다. 예술은 미술관이나 아트홀, 공연무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절실한 곳에서 용감히 행해지고 더 찬연히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무대에 서는 것만이 목표였던 예술가와 활동가들에게 지난 3년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자기 자신의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예술이 삶의 터에 들어와 어떤 ‘무늬’를 그려 나갈 수 있을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삶이 빛나고 있을 때 삶을 찬미하기는 쉽다. 그러나 삶이 절망적일 때, 그동안 누리던 삶의 풍요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삶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삶의 가치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술의 가치도 그렇다. 예술이 삶에 가 다 닿으려고 할 때, 삶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마침내 삶이 되려는 순간, 예술이 자신의 모양과 형태를 잃어버려서 아무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불러주지 않게 될지라도 삶이 되고자 열망하는가? 마치 물에 녹아서 형체가 사라진 소금처럼 말이다. 이렇게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실로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던져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지점이다.
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 탈출하기보다 연주를 택한 단원들. 영화 타이타닉(1997)의 한 장면.
하르키우(Kharkiv)는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올해 2월 러시아의 폭격으로 하르키우에 있는 학교, 병원, 도로, 공공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하르키우 시내의 한 호텔 로비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주변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인데 한 어린 소년이 피아노에 앉아 묵묵히 피아노를 치고 있다. 소년이 연주하는 곡은 [학교 가는 길(Walk to School)]. 이 세상에 국가의 폭력만큼 무자비하고 무서운 것도 없지만, 음악만큼 절망 속에서도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없다는 걸 소름 돋게 보여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작곡가 중 한 사람인 폴 레너드 모건(Paul Leonard-Morgan)은 “삶의 가장 끔찍한 순간에도 누군가 음악으로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는 게 감동스럽다”고 말했다.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월레스 하틀리(Wallace H. Hartley)는 구명조끼를 입고 탈출하는 대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바이올린을 켜자 동료 단원들도 하나둘 연주에 동참했다.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려고 이성을 잃었던 승객들은 연주를 들으며 침착하게 구명보트에 올랐다. 구명보트를 타지 못한 승객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차분히 맞이했다. 예술은 우리에게 인간다움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의연함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현장에 던져진 한 송이 꽃과 같다. 시인과 예술가의 마음에는 이 꽃이 자라고 있다. 이 꽃은 1967년 베트남 반전시위 도중 한 여인이 군인의 총구에 붉은 장미를 꽂아주거나, 1991년 모스크바 시민들이 탱크에 뛰어올라 포문에 한 송이 꽃을 꽂아 넣으며 ‘포를 쏘지 말라’고 설득하는 사진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꽃을 들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표현이다. 어느 때는 다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강한 저항의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용서와 화해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되기도 한다. 예술은 이렇게 무방비로 세상과 맞설 용기를 드러냄으로써 예술다움과 생명력을 이어 나갈 수 있다.
1991년 구소련 시절, 모스크바 시내로 진군한 탱크에 뛰어올라 포문에 꽃을 꽂아넣는 시민들.
예술이 인간의 삶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삶 자체가 예술이었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예술가였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인간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존재로의 진화를 가능하게 해준 토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이 삶의 실재에서 벗어나 기능화되고 도구화되면, 그리고 추상화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면, 그때부터 전문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예술이 고도화되는 과정은 마치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죽으면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의식과도 유사하다. 시신에서 ‘살을 발라냄으로써’(defleshing) 영혼을 그의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면에서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이를 ‘탈육신’(excarnation)으로 개념화했다.
반대로 예술이 차디찬 정신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이 사는 세계에 들어와 치열하게 삶의 부조리와 마주하고자 하는 과정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incarnation) 개념과도 통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그가 창조한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아기예수의 탄생을 ‘네티비티’(the nativity)*1)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 온 것은 가현(phantasm)이 아니라, 실제로 한 여인의 몸을 통해 베들레헴이라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전능한 신이 그의 전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을 제한된 시공간으로 던졌으며 인간의 보호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겼다는 사실이야말로 계시된 신비(Sacramentum) 그 자체다. 성육신은 예술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또 생활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연초부터 나는 멋진 한 방을 맞았다. 홍성문화원이 보내온 ‘사투리달력’ 때문이다. 매월 달력을 넘길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표제어는 탱크 같은 표준말 세상에 대한 시골말의 멋진 한 방이었다. 충청도가 아닌, 홍성의 사투리라는 의식, 그게 중요하다. 날이 8월엔 ‘원체 쪄유’에서 9월로 넘기니 ‘션혀 바람이’ 불어왔다. 마지막 12월엔 ‘욕봤슈 증말루!’ 따뜻한 격려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한다.
얼마 전 한 학술회의에서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초간본(1926)이 홍성말로 쓰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시집은 1933년 표준어규정 제정 이후 여러 판본들을 거치면서 원래의 어휘들이 표준어로 변개되었다는 것이다.*2) 만해는 홍성말로 시를 썼다. 당연히 홍성말로 사유했다. 갑자기 홍성말이 중요해졌다.
홍성문화원은 2021년 『홍성지역 사투리』 발간에 이어 올해 홍성 사투리 달력을 만들었다.
이천의 남부권역인 장호원, 율면, 설성면에도 충청북도와 인접해서 그런지 충청어 사투리 같은 말들이 아직도 생활 속 곳곳에서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벌러지(벌레), 돌팍(돌멩이), 방구(바위), 느태낭구(느티나무), 뿌래기(뿌리) 같은 말들이 그렇다. 이런 말들은 이천에 행정적으로 편입되어 있긴 하지만 이천과는 다른, 그 지역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본디 그 땅에 있던 말을 ‘땅말’이라고 부른다. 땅말은 그 지역에서 생래적으로 생겨난 말이다. 사람(호모, Homo)이 흙(후무스, Humus)에서 왔기 때문인지,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에서 보는 것처럼 말도 사람이 사는 땅마다 달라진다.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면 그 땅에는 ‘마을어’가 생긴다. 마을어가 뭔가? 그런 건 못 들어봤다고? 나는 이천의 마을기록사업에 참여하면서 문득 ‘마을어’라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을어는 그 마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독특한 표현이나 말투, 억양에는 마을 주민의 생활방식, 정서적 안정감이 스며 있다. 마을마다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에 그 말도 제각각이다. 강과 산이 서로 인접해 있어도 마을마다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다. 남한강은 단양에선 금강(錦江), 충주에선 북강(北江)으로 부르다가 여주에 이르면 여강(驪江), 양평에선 양강(楊江)이라 불렀다. 이렇게 부르는 이름이 달라도 그 이름에는 지역마다 그들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가 스며 있다.
경기어를 보자. 서울말과 비슷해도 권역마다 큰 차이가 있다. 이천말도 사실은 수많은 마을어가 모여 형성된 것이다. 이천 백사면에서는 산이나 숲을 ‘말림’이라고 부른다.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말린다’는 뜻이다. 절에서 말린다고 하여 절말림, 신씨 집안에서 말린다고 하여 신말림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영튼다’는 말도 있다. 산에 들어가 나무할 수 있게 허용한다는 말이다. 이른 봄날 영트는 날이 되면 설봉산에는 나무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요즘 지역마다 마을기록사업이 대유행이다. 하지만 마을어를 모른 채 마을에 들어가서 마을을 기록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만일 누가 해외에 특파원으로, 주재원으로 가게 되었다면 먼저 그 나라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겠는가? 또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선교하러 간다면 그 지역과 부족의 언어를 당연히 익히려고 할 것이다. 그들의 말을 배우지 않고는 그들의 생활 현장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 그 지역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그 지역 사람일 리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지역의 언어를 쓰지 않는 이들이 지역에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하거나 지역의 문화에 대해서 훈수를 두려고 한다. 마을어를 익히지 못한 자가 마을에서 동네지식인인 양 섣부른 지식공작을 펼친다. 너무 가볍다. 마을어를 배우고 땅말을 익힌다는 건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려보겠다는 의미다. 가상하다. 하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지식인도 많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부유하듯 늘 다른 기회를 엿보며 다른 궁리를 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중앙을 꿈꾼다. 예술인과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중앙 정계, 중앙 문단, 중앙 무대. 왜 이렇게 중앙으로만 가려고 하는 걸까?
한번 물어보자. 지금 미술관에 불이 났다. 목숨을 구할 텐가? 작품을 꺼낼 텐가? 지금 지역의 현실은 어떤가? 피폐해서 꺼져가는 중이다. 낙후지역, 쇠퇴도시, 변방, 소멸지역 ― 이 모든 말들이 그동안 지역을 식민화하고 대상화시킨 후 그 위에 씌워놓은 낙인들이다. 그런데 지역에 무슨 기초거점을 세우겠다는 것인가? 지역에 문화예술은 또 무슨 의미인가? 어떤 예술교육을 하라는 것인가? 훈수는 그만두고 마을어를 익히는 일부터 시작하라. 주민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들의 일상적인 말속에 오래도록 살아온 삶의 경험이 스며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우리가 알아채기만 한다면 이들은 허름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신이 보낸 메신저이거나 스승일지도 모른다. 마을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관제의 언어, 경직된 지시의 언어가 아닌, 인간미 있는 마을어로 말을 건네는 그런 동네지식인이 필요하다.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수많은 정책과 사업에도, 지역에 문화예술교육의 기초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이런 진실의 화법이 꼭 필요하다. 탱크의 언어가 아닌, 꽃의 언어로 말이다.
지역을 사유한다고? 그렇다면 동네말을 배우시라. 마을어 십년 과정에 입문하시라. 그런 다음에야 그대는 지역어로 사유할 자격이 있다. 지역에서 실천하겠다고? 그렇다면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고 신을 벗은 다음 동네 한 바퀴를 맨발로 걸으시라. 지역에서 예술하겠다고? 그렇다면 그대의 콧대를 접고 주민에게 배우시라. 우선 촌로를 찾아뵙고 그들의 경험과 기억을 오래오래 인내를 갖고 경청하시라. 지식인에게 지역을 사유하는 일은 어쩌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일지 모른다. 지식인의 권리와 그동안 지식으로 편히 살아왔던 혜택들을 기꺼이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의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면 언제든 그 위험은 닥칠 수 있기에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역의 현장으로,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모험과 용기를 감행해야 하는 새로운 장면 전환이다.
1) 영어에서 ‘nat’는 born이라는 뜻이다. ‘native’도 ‘원래 그 땅에서 태어난’, ‘토착민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기예수의 탄생(the nativity)은 임시방편적인 신의 현현이 아닌, 이 땅에서 진정한 육신성을 가짐으로써 인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세상을 향한 신의 사랑을 증거한다.
2) ‘긔루다’는 이 시집에서 만해의 사상을 하나로 응축시킨 독특한 표현이다. 애처롭고 가엽다는 뜻이다. 그의 님은 석가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내가 불쌍히 여기고 자비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모든 중생이 다 님이 된다. 그래서 그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