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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_ 신권식의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를 중심으로이야기 주권, 당신의 삶이 작품이 되도록
김해규 | 평택인문연구소장
지역사 연구에서 민간 사료의 가치

역사는 과거의 기억(記憶)이다. 기억의 편린(片鱗)들을 발굴하여 분석하고 해석한 결과물이다. 과거의 기억은 문자와 유물, 유적을 통해 전승된다. 하지만 계급사회에서 문자는 국가나 지배층의 전유물이었고, 유물·유적도 지배층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역사에서 개인의 삶, 피지배층의 삶과 생각은 쉽게 잊히거나 소멸되었다. 역사가들은 국가나 지배층이 남긴 문헌 기록과 유물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객관적 역사’는 국가와 지배층의 입장에서만 서술된 반쪽짜리 역사였다. 그동안 피지배층의 삶과 기억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 고잔3리 보한재 신숙주 사당 고잔묘

지역사(地域史) 연구는 기존의 역사 연구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지역사 연구가들은 국가와 중앙에 종속된 지방(地方)이 아니라, 공간적·문화적으로 구분된 지역(地域)을 범주로 역사를 연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정한 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좁히면서 사료(史料)의 한계에 맞닥뜨렸다. 지역 안에서도 지배층과 관련된 사료는 일정부분 남아 있었지만, 문자를 사용하지 못했고 유물과 유적을 남기기 힘들었던 피지배층의 역사는 접근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한국의 근대는 서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피지배층들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으며 신분적 억압과 제한 없이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근대에 도입된 기독교도 근대 지식과 세계관의 변화, 문맹 퇴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가 되면 여성들도 교육받을 기회가 많아졌다. 야학과 강습소의 개설, 브나로드운동과 문자보급운동도 여성들의 문맹 퇴치에 일정부분 기여했다. 일정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농촌지식인이 증가하면서 서민층도 삶과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편지를 주고받고, 호적문서나 토지문서, 행정문서들이 개인에게 발급되면서 관련 기록들도 증가했다. 서민층이 남긴 문헌으로는 일기류나 편지가 대부분이지만, 마을 별로는 리계(里契)라든가 대동계, 연반계 문서, 공동제의나 두레와 같은 공동노동조직 관련 문서, 이동농업협동조합이나 새마을운동 관련 문헌들도 많다.
근대 서민층의 다양한 기록은 지배층 중심의 역사학을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의 역사’로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중앙사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지역적 입장,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죽으면 소멸되고 잊히는 개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삶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주체로 기억되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신권식의 생애와 『평택일기』

신권식(1929~)의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1)(전3권)는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주한 평택지역 사료조사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신권식은 고령 신씨 봉래공파의 삼괴당 신종호 후손이다. 삼괴당 신종호(1456~14987)는 보한재 신숙주의 손자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진사시와 문과, 문과 중시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장남 신항(申沆, 1477~1507)은 성종의 부마가 되었으며, 14세 신의(申檥, 1530~1584)도 중종의 부마가 되어 명문가 반열에 올랐다.

. 고잔5리 대곡마을 신권식(1929년생)씨

평택시 청북읍 고잔리 일대(2리, 3리, 5리)에는 고령 신씨 봉래공파 후손들이 많이 산다. 이웃한 화성시 양감면, 향남면 일대에도 고령 신씨가 많지만 이들은 북백공, 고천공, 소안공의 후손들이다. 신권식은 청북읍 고잔5리에 살고 있다. 고잔5리는 고잔2리, 고잔3리와 함께 대표적인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신권식은 고잔5리 대곡마을에서 태어나 7세 무렵에는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9세 때 청북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했다. 해방 이듬해 상경하여 선린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1학년 때 몸이 아파서 휴학했으며, 이듬해 입학한 체신학교 부설 중학교도 질병으로 휴학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8년에는 오류동의 동양공고에 입학했지만, 이것도 한국전쟁 때 징집당하는 바람에 졸업하지 못했다. 1955년 군대에서 전역하여 서울시청 임시직 공무원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만두었고, 그해 가을 청북읍 고잔5리 대곡마을로 낙향하여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신권식은 농사를 짓는 한편 일찍부터 지역사회 활동에 눈을 돌렸다. 그가 사회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31세 되던 1960년부터다. 그해 청북면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고잔리 제2농업협동조합을 설립할 때는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3년부터는 고잔5리 이장을 지내며 새마을운동을 주도했고, 지역 유지(有志)들이 돌아가며 맡는 삼덕국민학교 육성회장도 지냈다. 이밖에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평택군 군정자문위원, 평택경찰서 방범협의회장, 청북면장학회장, 청북면 초대 주민자치위원장과 같은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지역 유림을 대표하는 진위향교 전교와 경기도향교재단 감사도 지냈으며, 종중에서는 고령 신씨 봉례공파 초대회장, 삼괴당파 초대회장, 고령 신씨 대종회 부회장 같은 주요 직책을 수행했다.

평택시 청북읍 고잔5리 대곡마을은 바닷가에 인접해서 농지가 넉넉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삼계리 앞에 동척농장이 조성된 이래 간척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지면적이 확대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이웃한 농골에 한국전쟁 피난민 정착사업소(고잔사업소)가 설치되었고, 대곡안원과 밭원 그리고 농골안원과 밭원 일대가 간척되면서 농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1960년대에는 재일교포 방덕환 씨가 대규모 간척사업을 전개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남양방조제가 준공되면서 그동안 간척되지 않았던 고잔리 입구까지 경지면적이 확대되었다. 경지면적은 확대되었지만 간척지의 농업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우선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없어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렸다. 1965년, 1968년 가뭄은 애써 농사지은 벼들을 타죽게 했다. 거센 남양만의 물살에 간척된 제방과 농지가 포락(浦落)되는 일도 잦았다. 일부 피난민 간척지는 염기(鹽氣) 제거에 소용되는 기간을 줄이기 위해 염전(鹽田)으로 개발되었다. 1971년의 태풍은 염전과 간척지를 파괴시켰다. 복구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1974년 아산만방조제, 남양방조제가 준공되었다. 경지정리와 농수로 공사로 평택호의 풍부한 농업용수가 공급되면서 간척지는 옥토로 변했다. 1978년부터 남양간척지에 대청호 수몰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신권식은 마을과 주변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관여했다. 그것이 일기에 오롯이 담겼다.
신권식은 30세였던 1959년부터 일기(日記)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일기는 하루하루 경험한 일들을 사실 위주로 간략하게 작성되었다. 앞서 소개한 정치, 사회활동이나 간척사업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었지만 날씨와 농사, 장시 이용과 금융거래, 근대교육, 의식주, 가정생활과 친족관계, 민속과 놀이에 이르기까지 농촌과 가정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신권식은 2007년 그동안 써왔던 일기가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로 출간된 뒤로도 계속 일기를 쓰고 있다. 그의 일기는 역사다.

. 고잔5리 마을풍경

. 고잔5리 신권식(1929년생)의 대곡일기

 

개인 기억과 기록이 갖는 의미

특정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삶과 기억은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라고 말한다. 서민층의 삶과 기록에는 국가와 지배층의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경험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농민들의 『농사일기』, 어민들의 『어로일기』에서는 『농사독본』, 『어로독본』에서 찾을 수 없는 생생한 경험과 지식이 담겨 있고, 가정생활을 이끌어 온 여성들의 기억과 구술에는 고단하면서도 단단하게 살아온 근대 여성들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1670년경 장계향이 쓴 『음식다미방』은 조선 시대 음식조리법과 관련된 대표적인 고전이다. 조선 시대에는 음식 관련 책들도 문자를 향유했던 남성들이 저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음식 재료나 조리법의 디테일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컸다. 『음식다미방』은 경상도 양반가의 여성이 직접 작성한 조리서다. 내용에는 면병류, 조과류, 채소류, 초류, 주류와 관련된 재료 손질법과 조리법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당시 음식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17세기 경상도 양반가의 일상을 복원할 수 있으며, 당시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비롯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까지 매우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의 성리학자 미암 유희춘은 『미암일기』를 후대에 남겼다. 『미암일기』는 조선 중기 양반들의 일상과 사회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남녀균분상속제라던가, 장남이 아니라 딸과 사위가 장인·장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가족 형태도 발견할 수 있다. 양반 집성촌과 사당과 묘역이 16세기에는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으며, 양반층과 서민층의 의식주, 형제 및 친족관계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근·현대 평택 지역은 변화가 많았던 지역이다.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면서 ‘평택(平澤)’이라는 새로운 근대도시가 발전했고, 한국전쟁 뒤에는 두 개의 기지촌이 건설되면서 지역의 중심이 ‘평택’과 ‘송탄’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서평택 일원에는 곳곳에 한국전쟁 피난민정착사업소가 건설되어 대규모 간척사업이 전개되었으며, 1974년 아산만방조제, 남양방조제 준공으로 거대한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대청댐 수몰민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포승읍 원정5리는 대청댐 수몰민 정착촌이다. 마을 주민 김학규가 쓴 『나의 발자국』(전2권)은 낮설고 물 설은 남양간척지에 정착하여 힘겹게 살아온 대청댐 수몰민들의 30년 삶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평택시 신장동 기지촌의 상징적 인물 정태호의 『나 황해도 구화요』는 황해도 전쟁 피난민으로 미군 기지촌에 흘러들어와 자수성가한 어느 피난민의 삶의 기록이다.
근대 서민층의 기록으로는 일기나 편지가 대표적이다. 특히 신권식의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처럼 지역 사회의 유지로 다양한 정치, 사회활동을 경험했고, 사회경제적 변화의 중심에 섰던 인물의 일기는 아래로부터 역사 쓰기의 보물과 같은 근거자료가 된다. 우리는 신권식의 일기를 통해 ‘일기가 개인의 기록이자 사회적 기록’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국민이 ‘국가의 주권, 역사의 주권자’가 되려면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만큼 신권식의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는 그동안 여러 편의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김영미는 「농촌생활사 연구의 보고(寶庫) 평택 대곡일기」(2013), 「평택 대곡일기를 통해서 본 1960~70년대 초 농촌 마을의 공론장, 동회」(2013)와 같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양윤주는 「1960, 70년대 농민의 의식구조와 변화-평택일기를 중심으로」(2016)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안혜경은 「평택일기를 통해 본 일생 의례와 속신」이라는 민속학 논문을 발표하여 활용도를 넓혔다.
근래 ‘문화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민주주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 개인이 주장하고, 기록하고, 창작해야 한다. 지역사는 그동안 소외되었고 배제되었던 피지배층의 역사를 역사 속에 복원하려는 지극히 민주적인 시도다. 위로부터의 역사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래로부터의 역사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역사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민층의 기록과 유물이다. 일기는 역사의 주권, 국가의 주권이 국민 개개인에게 있다는 살아 있는 표현이다. 좋은 일기의 발굴, 객관적 연구가 중요한 이유다.

1)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전3권)는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고잔5리에 거주하는 신권식이 1959년부터 2005년까지 작성한 일기다.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 과정에서 발굴했고, 경기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지역문화연구소가 주석과 해제를 붙여 2007년 3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초기 제목은 고잔5리 마을 지명을 빌려 『대곡일기』라고 했지만,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평택일기』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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