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부터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미크론이라는 변종 바이러스가 국내·외적으로 다시 창궐하면서 일상 회복이 지체되고 있다. 재난의 시대를 잘 사는 지혜는 ‘지금’을 잘 배우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잘 배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내가 사는 동네의 토양(soil)이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돌보는 공동체’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누구나 실감하고 있다.
내가 사는 삶터를 돌보는 공동체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자기를 돌볼 줄 알아야 하고, 내 곁의 이웃을 돌볼 줄 아는 ‘돌봄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흥미 있는 사실은 원래 서로 손을 잡는다는 말은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설령 형식적 이해관계라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한다. 정치철학자 김만권은 『새로운 가난이 온다』(혜다 2021)에서 이해관계를 뜻하는 영어 표현 ‘interest’라는 말을 뜯어보면, 그것은 우리가 사이(inter-)에 존재함(est)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도 ‘관심’과 ‘흥미’를 위해서도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인 셈이다.
그러나 사회체제의 전환은 여전히 쉽지 않다. 우리 사회가 ‘성장에서 돌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갈수록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생태 전문가들이 경고하듯이 ‘Busisness is usual=Death’라는 등식처럼, 지금껏 하던 대로 계속하면 공멸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지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인간은 영물(靈物)이어서 그 잠시 동안의 맑은 하늘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1)라고 말한 것처럼 ‘맑은 하늘’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는 도저한 낙관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냉소주의의 특징이 아니던가.
‘맑은 하늘’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치와 분권의 힘에 바탕한 민주주의를 여전히 신뢰한다는 것이며, 라이프스타일 혁명을 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최근 이와 같은 단상을 어느 지면에 적은 바 있다. “결국, 문제는 전체를 살피며 라이프스타일 혁명을 이루는 것이다. (중략) 나는, 당신은, ‘인간 하락’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나와 당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더더더’에서 ‘덜덜덜’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바로 지금이 그때다.”*2) ‘인간 하락’이라는 말은 구글에서 디자인 윤리학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휴먼테크놀로지센터 창설자로서 ‘잘 쓴 시간’ 운동을 하고 있는 트리스탄 해리스가 주의력과 적절한 행동 감각, 민주적 소통과 사회관계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고, 소셜 미디어에 중독된 현상을 겨냥해 만든 말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더 이상 라이프스타일 혁명을 늦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이프스타일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라이프스타일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거창할 수도 있다. 나는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 폐기처분하는 삶을 당연시하는 지금의 소비중독의 삶과 문화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며 전 세계적으로 미니멀 라이프의 삶을 권장했던 ‘정리의 신’ 곤도 마리에가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다는 보도는 그래서 씁쓸하다. *3) 우리 삶에는 정리 수납이 필요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애초에 이런 물건들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성찰이 더 먼저일 것이다. 다시 말해 공급 외에 수요 측면에서도 지속가능한 경제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의 풍요에 들어가는 ‘진짜 비용’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농촌·농업·농민, 이른바 ‘3농(農)’의 삶과 문화가 철저히 파괴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된다. 농촌사회학자 정은정의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한티재 2021)과 더불어 정성숙의 소설집 『호미』(삶창 2021)을 접하며 더욱 굳어진다. 정은정은 “예식장과 산부인과, 소아과 병원이 사라진 곳.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 모두 사라진 자리가 지금의 농촌”(p.147)이라고 우울한 어조로 진단한다. ‘시작’을 상징하는 그 어떤 희망의 단어들조차 실종된 곳이 농촌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존엄한 소멸을 보장하는 농촌을 위해 마지막길이라도 ‘꽃상여’ 타고 갈 수 있도록 장례 지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정은정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전국 경향 각지에 있는 지역 문화원들이 농촌 지역 어르신들의 존엄한 소멸을 위해 앞장서서 장례문화를 주도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본다.
“사회의 문화와 제도는 비가역적이다. 무상급식이 안착하고 난 뒤 그 누구도 도시락 시절로 돌아가자 하지 않고, 고속철 속도에 익숙해지면 무궁화호의 속도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온라인으로 만사를 도모하는 세상에서 오프라인 시장의 힘은 점점 빠질 수밖에 없다.”
- 정은정,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한티재, 2021, p.89
그렇다. 정은정의 주장처럼 사회와 문화와 제도는 비가역적이다. 코로나19 시대, 대규모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온라인 쇼핑이 오히려 대세가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더 ‘나쁜’ 쪽으로 악화되는 현상만은 꼭 막아야 한다. 농촌·농업·농민이 죽으면 우리 모두가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읍·면 단위의 실질적인 ‘자치’와 ‘자급’이 시급하다. 농촌·농업·농민을 더 이상 희생의 시스템으로 활용하려는 사회체제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가 정성숙이다. 1964년생 전남 진도 출신의 작가 정성숙은 소설집 『호미』에서 “천한 일은 호미 쥔 자들의 몫”(「작가의 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출구 없는 현실을 묘파한다. 특히, ‘여성농민’의 관점에서 “우덜 같은 쭉쟁이 인생들”(「놈」)의 답답한 농촌의 실상을 냉정한 눈으로 묘사한다. 고추·대파·배추 같은 농산물 값이 폭락하고, 소값 파동이 여전하며, 농협 빚에 야반도주를 한 농민으로 인해 연대 보증을 한 농민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현실을 냉정히 그려낸다. 도시인들이 생각하는 ‘낭만적인’ 농촌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숙의 소설은 (여성)농민의 정당한 분노가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민중적 활기 같은 ‘기운’이 묘하게 감지된다. 작품의 현실은 비참하지만, 마냥 비관적이지 않다. 서울살이 8년을 제외하고는 32년째 전남 진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촌·농업·농민의 삶과 문화에 착실히 밀착한 ‘언어’들의 활기 덕분이다. “집은 험해도 살제마는 땅이 없으믄 끄니를 굶는 것”(「호미」, p.27), “각시 없다고 아무 데나 씨 뿌리고 댕겼다가는 탄저병 걸린다아”(「기다리는 사람들」, p.53), “온몸이 흙투성이였고 생활이 흙 천지였다”(「백조의 호수」, p.96), “애국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복숭아나무 심을 자리」, p.131),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는 못 속인다”(「아직도 건네지 못한 이야기」, p.163), “무수씨 뿌리면서 동치미 국물을 이녁 혼자 한 동우는 마시고 있구마안”(「이른 봄」, p.198) 같은 활력 있는 표현들을 보라.
특히, 농협 빚을 연대 보증해 파산 직전에 이른 한동네 농민들이 한바탕 소동 후 ‘항꾼에’(함께) 정신을 발휘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다. “어깨동무로 빚보증 서대끼 빚 갚는 길도 어깨동무를 해서 찾는 수밖에 없는 것이제라”(「놈」, p.268) 같은 인식이 그것이다. 작중인물들의 이러한 ‘결기’에서 아무도 농촌·농업·농민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현실을 바꾸려는 강한 연대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정성숙의 소설은 당사자의 관점에서 농촌·농업·농민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 그동안 농촌소설에서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던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잘 재현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에 값한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 독일 정치경제학자 마야 괴펠이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나무생각 2021)에서 “미래는 우리가 내린 결정과 그 실천이 모여 이루는 결과물”이라고 한 말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관점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와 더불어 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말해 가치 대신 가격을 더 신봉하는 행정의 언어가 아니라 삶에 밀착한 ‘새로운 생각’을 표현하는 시의 언어, 살림의 언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의 정성숙 소설에서 강조하는 ‘항꾼에’ 정신 또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하다. 개인의 노력주의로 변신한 능력주의가 활개 치는 사회는 농촌·농업·농민을 비롯해 디지털 소외계층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끝없이 양산하며 희생의 제물로 삼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는 돌봄전환사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회이기 쉬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 문화원을 비롯한 문화예술 현장의 변화 또한 요청된다. 나는 특히 정부(문체부 등)의 성과지표체계에 ‘균열’을 내려는 활동이 요구되며, 현장의 필요에 맞는 새로운 성과지표체계를 만들어 적용하려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문화도시사업의 경우 문화도시 조성 초기에는 거버넌스 구축에 비중(1년차 65%, 2년차 60%)을 높게 두고 점차 성과의 비중(3∼5년차 50%)을 높여간다는 ‘지침행정’은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버넌스가 중요하다는 점을 문화예술판에 있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간 파트너들을 대하는 정부의 거버넌스 추진의지가 ‘불신’을 받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화도시를 평가하는 위원들의 자격과 자질부터 평가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비등해진다는 점은 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문화예술 현장에서부터 라이프스타일 혁명을 위한 작은 시도들을 해야 한다. 일상이 달라져야 하고, 언어 또한 달라져야 한다. 이기심만 가르치는 경제학에서 벗어나 재화보다는 인간을, 이윤과 상품보다는 경험과 관계를 더 중시하려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 대신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해야 한다. 지역 문화원을 비롯해 문화예술판의 변화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우리 모두 ‘질문’을 품은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행복한 삶이고, 어떻게 돌봄 찬(carefull) 탈성장 사회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함민복 시인이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이 아니라, “거대한 반죽 뻘”의 ‘말랑말랑한 힘’을 강조한 길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하는 ‘오래된 미래’이다. 함민복의 시 「말랑말랑한 힘」의 끝부분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말랑말랑한 힘」 끝부분). 말랑말랑한 힘이 진짜 힘이고, 말랑말랑한 언어가 진짜 우리의 동력(動力)이다.
1) 김종철, 《녹색평론》, 2009년 11-12월호.
2) 고영직, 「더 늦기 전에 라이프스타일 혁명을」, 《녹색평론》 2021년 11-12월호(제181호), 235쪽.
3) 경향신문, 2019.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