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월요일 새벽을 기다린다. 벌써 몇 년째이고, 어느 날에는 기어코 신문이 도착하는 시간을 알아내서 그 즈음에 현관문을 열어 제낀다. 한겨레신문에 연재되는 김진해 교수의 [말글살이], 이 칼럼이 보고파서다. 그 이유는 이보다 더 명쾌하게 내가 사용하는 문장들의 뒷배가 되어주는 글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많은 탓인지 아직 생면부지의 필자를 나는 늘 그리워하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향토사전문책방 ‘이목구심서’에서 열 번째 진행했던 [말술학교]에 가장 먼저 초대하고 싶은 분도 그이였다. 전화번호도 받아 놓았지만 아직 손가락이 그 언저리에서 멈춰지는 쑥스러움 탓이다. 이렇듯 그분을 흠모하고 모시고 싶어 하는지 알 턱이 없겠지만, 그분이 쓰신 800자의 칼럼 중에 「얼음사전」이라는 글을 가장 좋아하는 줄 알면 흔쾌히 이 남루한 책방에 와주실 것 같기도 하다. 그 칼럼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랑, 연애, 애정’이라는 것을 남녀가 애틋해 하는 것이라 해석한 사전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정정해 달라는 경희대생들의 요구를 들어준 국립국어원은 다시 남녀로 바꿔달라는 청원을 받아 들여 2년 만에 서로가 남녀로 바뀌었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었다. 거기에서 종이 사전이 사라지고, 전자사전이 등장하고, 표준국어대사전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한 단어가 가진 여러 가지 생각과 해석의 여지를 다 놓치게 되었다는 말에 너무나 쉽게 공감이 갔다.
사실 그런 상황인지조차 몰랐던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작년 겨울 후배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창업을 해 보겠다고 찾아왔을 때 아껴둔 몇 개의 회사 이름을 호명해 주었다. ‘그라제’는 어때?, 아님 ‘긍께’는 어때? 뭐 이런 사명(社名)이었다. 난데없는 사명을 들은 후배는 계속 소리 내어 말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두 단어가 모두 긍정의 의미를 지니긴 한데, ‘그라제’는 강한 긍정을 의미하고, ‘긍께’는 긍정하되 약간 뒷걸음칠 소지도 있는 단어라고 우리끼리 해석한다. 무언가 문화적인 일들을 주문하면 전라도의 제땅말로 ‘그라제’라고 하면 서로 동의하는 것이다. ‘긍께’는 약간 된발음을 주면 “긍께이” 이리 되면서 뭔가 뒤끝이 남은 찝찝하진 않지만 개운하지 않은 긍정이 되는 것이다. 이건 숫제 그 동네 사람들이어야 감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에야 서류와 녹취 같은 것이 횡행하지만 옛날 언약이 주를 이루던 시대의 이 애매함은 마치 전라도를 대표하는 “거시기”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말이 타지로 나가면 말 대접 받기가 어려워진다. “그 말이 뭔데?”라는 질문은 품격이 있지만, “쟤 전라도 촌놈이구나”라고 상대를 규정하는 데 사용되면 낭패가 되기도 한다. 뭐 전라도야 개땅쇠니, 하와이니, 홍어니 하는 비유를 많이 들어놔서 암시랑 안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상황을 처음 직면하면 왠지 께름칙하고 뒷단이 걱정되는 것이 경험한 현실이기도 하다. 한데, 저렇게 전라도 사람을 규정하는 말들도 찾아보면 그 내력이 창창하다.
갯땅쇠 혹은 개땅쇠라고 하는 말에는 신라 시대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관장했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 장군과의 연관성을 지닌다. 그의 막강한 힘에 해상 세력이 굴복하고, 완도가 그 중심에 섰을 때 이를 제거하고자 한 신라 정부는 마침내 장보고를 제압하고 그 수하의 장졸과 백성들을 섬에서 완전히 비워 이주시킨다. 그들이 옮겨간 곳은 “징게맹게 외베미뜰”이라고 하는 김제와 만경강의 드넓은 뜨락의 해안가 갯벌이었다. 해상교역과 어업에 단련된 몸들을 더 이상 뱃전에 실지 못하도록 했던 정책은 결국 갯가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라는 것과 다름이 아니었다. 그들은 해안가의 갯벌 주위를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작물을 심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해풍과 넘실대는 파도와 짠물 때문에 도무지 먹고 살기 힘들었다. 그런 이들을 지칭하며 갯가에 땅을 부치며 사는 마당쇠 같은 사람이라 해서 부여된 말이 “개땅쇠”이다. 이러한 역사는 훗날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대규모 간척사업 시기 그 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려는 이들이 경향 각지에서 몰려오며 더욱 고착화된 언어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개땅쇠’라는 말에는 어떻게든 가족은 굶기지 말아야 하는 아버지·어머니의 처절한 삶이 녹아 있으며, 그를 위해 새로운 땅을 열었던 개척의 정신들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상기해 볼 수 있다. 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완도의 청산도에 가면 만나는 구들장 논이나 지리산 피아골에서 만나는 삿갓배미 같은 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지금이야 관광지로 유명짜한 곳이지만 청산도는 사면이 바다인 데다 경사도도 높아 논농사는 엄두도 못 내던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어른들은 산비탈에 구들장 같은 돌판을 놓고 흙을 다지고 다시 놓고 다지며 자식들 쌀밥 한 그릇이라도 먹이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생애가 담겨 있다. 서편제의 롱테이크 장면에서 보여지는 다락논과 돌담 그 장면에 우리가 열광하고 찾아가지만 그것을 구축했던 조상들의 피땀 어린 정성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피아골 삿갓배미는 험준한 경사의 산비탈에 돌을 쌓고 흙을 넣어 논을 만들다 잠시 쉬려고 삿갓을 놓아두었는데 분명 작업을 했던 그 논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해괴망칙한 일이 어딨지?’ 하면서 삿갓을 드니 그 안에 두럭논이 보였다는 이야기. 땅은 사람과 조응하면서 살아왔음의 방증이다. 자연이 거기 있으면 자연이지만 사람이 손길을 내밀면 그것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터무늬’라고 한다. ‘터무니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생명이 움직이는 곳에는 자연과 조응하며 터무니가 그려지고, 그것은 언어가 되고, 삶이 되고, 생명줄이 되며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게 만든다.
‘호남이 흉년이면 팔도(八道)가 굶어죽는다’라는 말이 유효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반도의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그러했지만, 이곳에서도 땅마다 가격이 달랐다. 요즘이야 역세권이니, 학군이니, 조망권이니 하지만, 옛적 땅의 시세는 거름기 많은 땅, 물 닿기 좋은 땅이 최고였다. 그 중에서 가장 비싼 땅은 진흙이 많은 논이었다. 그곳에서 난 쌀을 먹고 산 사람은 송장의 무게도 다르다고 했다. 이 말이 우리 동네에만 있는가 싶었는데, 여러 지역의 문화원 식구들과 만나 얘길 꺼내니 각자의 고장에 다 그런 곳이 있었다. 내 삶의 방식과 무게가 다르지 않아 누구와도 교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과 같았다.
거기에 더해 영산강 언저리에 사는 나는 어릴 적부터 홍어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왜나면 모든 큰 경사나 애사에는 홍어가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숫제 그 홍어를 먹으러 축하연에 왔다는 소리를 곧잘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이상한 게 있었다. 같은 전라도인데 섬진강 자락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홍어를 싫어했다. 마치 딴나라 사람 같았다. 그 냄새 나는 것을 어떻게 먹느냐면서 그분들이 찾는 것은 냄새가 좀 약한 간재미 종류였다. 물길이 또 식문화를 바꿔내는 것인데, 세상에 그 섬진강변의 사람들은 김치에도 장어탕이나 추어탕에도 뭔 냄새나는 향신료를 뿌리는 것이었다. 잰피였다. 한국산 후춧가루. 훗날 서울의 어느 남원추어탕집이라는 곳에서 잰피를 찾으니 없었다. 남원 광한루앞 추어탕집이 유명하니 그 이름만 가져다 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정작 식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을 규정하는 것은 제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산과 음식문화에도 잔뜩 고여 있다. 이를테면 울산에서는 오배기가 없으면 잔치가 아니라고 하고, 태안쪽에서는 굴젖이 없으면 잔치가 아니라 하고, 김제에서는 죽합이 없으면 잔치가 아니라 한다.
자연의 산물이 그들만의 고유한 식습관을 만들고 몸에 ‘인이 백혀서’ 달아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심야식당>이라는 드라마의 한국판을 보면 가래떡구이를 김에 싸서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서해안의 대천쪽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넘어선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 마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서사를 보는 듯했다. 산천이 사람을 키운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사이 잊어버리고 산다. 잠시 둘러보면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과 경상남도의 밀양 아리랑, 전라남도의 진도 아리랑의 가사와 리듬 안에서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왜 강원도의 느릿한 음악이 나왔는가는 정선의 첩첩한 산중을 보면 알게 되고, 밀양의 뻥 뚫린 뜨락(뜰)을 보면 박진감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찰진 전라도’라고 하지만 목숨을 건 갯일과 밭일을 동시에 하는 이들의 삶의 곡절은 진도 아리랑 안에 스며 들어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와 문장이 갖는 내재적 힘의 근원은 타인의 입에서 금방 옮겨 온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이어져 온 것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집인 고흥으로 갔다가 어머니가 해 주신 맛난 장어탕을 먹고 올라오는 차부에서 연신 하시던 말씀 “영림해라 잉” 그 말씀이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담양이 고향인 나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몸짓 안에서 이미 번역이 되고도 남았다. “명심하고 열심히 해라”라는 말씀. 그 간곡한 당부를 여태 간직하고 있다. 여느 때처럼 고향집에 들렸다 나오면 여지없이 어머니의 인사말 “가거라 잉…”. ‘잉’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말줄임표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어머니의 당부가 들어 있음을 자식은 기억한다. 차조심, 몸조심, 건강조심, 이런 직설을 넘어서는 말씀 “잉”. 황형철 시인은 그래서 「가거라 잉」이란 시를 지었을 터이다. 사무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가거라 잉
… 문을 닫고 돌아선 후에도
한참을 울리는 말
가거라 잉
제 집에 다다를 때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마저 염려하고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의 말
얼른 또 오라는 역설의 말
앞으로 오고 갈 모든 세월까지
싸그리 살펴주겠다는
예사롭지 않게 든든한 말
눈물이 핑 도는 말
사랑한다에 찍은 곁점과 같고
베갯잇에 넣어둔 부적과 같고
머리에 베고 가만가만 잠을 청하고 싶은 말
가거라 잉
말수 적은 당신께서
빼먹지 않고 꼭 하는
천금과 같은 말
가계(家系)의 굵은 맥과 같은 말
가거라 잉
_ 황형철 시 「가거라 잉」 전문
남도 사람들은 이 시를 보며 방금 동구밖에서 배웅하는 어머니를 연상할 것이고, ‘잉’이라는 말이 없다면 다른 곳에서도 똑 같이 배웅하는 인사말 정도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뜬금없이 사족처럼 붙는 “잉”은 영어의 ‘-ing’처럼 진행형과 보폭을 같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착시도 인다. 폭넓게 쓰이는 제땅말이 위력을 발휘할 때의 생각이 지나쳐 간다.
십수 년전 제주 가파도에서 음식을 가져다주는 분에게 말을 붙이다가 그 독특한 억양이 경상도다워서 여쭸다. 어디시냐고.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다. “퐝”이라고. 나만 제외하고 모두들 알아 듣는 기색이었는데, 포항이었다. 포항 사람들은 전라도의 장흥 사람들이 ‘자응’이라고 하다가 아예 “장”이라고 하듯, 고흥 사람들이 “공”이라 하듯 그리 부르는 것이었다. 고향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사람이 이주해온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는 싯귀를 이대흠 시인이 고해놨다. “장흥에서 조금 살다보면 누구든지/ 장흥 사람들이 장흥을/ 자응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응에 아조 뿌리를 내리면/ 장서 나서/ 장서 자라고/ 장가 있는 장고나/ 장여고를 나온 토백이가 된다// 장흥에서 자응으로 가는 데는/ 십년이 족히 걸리고/ 자응에서 또 자앙, 장으로 가는 데는/ 다시 몇십년이 걸린다”(「장흥」 부분)
이주해온 사람에게는 이 말이 삼팔선 같은 것이겠지만, 제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내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부산의 광안리와 해운대는 외지 사람 눈에는 바로 지척 같지만 그 사이에도 물때가 다르고, 마주하는 환경이 다르니 두 지역 간의 언어적 차이를 조사했던 플랜비협동조합과 같은 단체도 있다.
복기해 보면 그렇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터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 갯일과 농사일에 기대어 살았던 시대가 내려준 유산은 속속들이 고층 건물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천루의 허공에서 타자의 말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흙발로 노동으로 이뤄진 말들은 다시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생략되어 버리고 전파를 타는 말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소멸되어 가는 제 땅의 말들에 대해 국가나 자치단체나 정치인들이나 관심이 없다. 모두가 국가가 정리해 놓은 ‘표준어’라는 함정에 함몰되어가고 있고, 지역의 언어는 변방 축에도 끼지 못하고 박해와 소멸로 점철되고 있다. “와따 어째 그랄까 잉? 어째야 쓰까”라고 한탄하며 묻고 싶지만 이 말에 답해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알고 있는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한다.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와 매체를 떠도는 인공의 말에 민감해 하지 말고, 땅심이 배여 있는, 어른들의 삶의 경험이 축적된 말들을 더 자주 쓰고 입에서 입으로 전파해야 한다. 행정수도가 옮겨졌어도 무늬만 옮겨진 이 땅에서, 서울이 모든 사람들을 집어 삼키는 이 땅에서. 근디. 왜 이리 서럽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