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생명체로 보는 건 지구와 지구에 서식하는 모든 생물들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생명이라는 현상이 지구를 기반으로 한 유기체 시스템 속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구를 인류는 오래 전부터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받아들였다. 지구에는 처음 생명 현상이 시작된 이래 38억년 동안 여러 차례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으면서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번성하고 멸종하는 지질학적 시간의 흐름이 있었다.
세계 최강국이던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이 닥친다. (Joseph Turner, The Fifth Plague of Egypt, Indianapolis Museum of Art)
이 진화의 과정을 거대한 나무에 비유하자면 수많은 가지 가운데 영장목의 잔가지 하나가 지금의 현생인류에 해당한다. 20여만 년 전에 나타난 이 현생인류가 어떻게 현재 지구를 뒤덮는 지배종이 되었는지, 그리고 인류 이전에 지구를 지배했던 다른 종의 멸절 과정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인류가 아닌, 지구의 입장에서 말이다. 지구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문명의 전환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코로나19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이듯, 지구 입장에서 보면 인류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질병이요, 심각한 바이러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백신을 개발하려 하는 것처럼 지구 역시 인류라는 질병,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지구 위에 더 확산되지 않도록 스스로 백신을 고안해내지 않을까?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각종 기상이변이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쩌면 지구가 만들어낸 일종의 백신이 아닐까? 지구가 인류를 지구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된 이상, 지구는 인류의 거주지와 활동 범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호들이 더 이상 인류에게 통용되지 않게 되는 임계점(tipping point)에 이르면(지구가 인류의 파괴적 활동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는 일종의 임계점이다) 지구는 지금의 인류를 지상에서 쓸어내기 위한 지각변동 시스템을 작동하게 될지 모른다.
고대의 신화를 찾아보면 인류는 지구를 생명으로 다루기보다는 죽은 몸으로, 소유하는 물건으로, 때로는 전리품으로 다루어 왔음을 알게 된다. 수메르 신화에 보면 티아맛(Tiamat)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신이다. 이 티아맛에 대항해 바빌로니아의 젊은 신 마르둑(Marduk)이 홀로 전투를 벌여 티아맛을 죽인 다음 그 시신을 해체해 하늘과 땅을 만들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우주의 질서를 세운다. 이렇게 최초의 신은 대부분 자연의 힘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이 자연은 때론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혼돈과 무질서의 힘으로 표상되기도 하지만, 모든 만물을 품고 또 만물을 낳으며 만물을 번성하게 하는 모성적 권력으로 이해되었다.
반면에 마르둑의 출현은 군사적이고 정복적인 지배권력의 모형이다. 마르둑에 의해 정복당한 티아맛의 몸은 이제 한낱 물질로 전락한다. 티아맛의 몸이 마음대로 처분해도 되는 물건이 된 것은 그것이 정복의 전리품, 전쟁의 대가 또는 결과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르둑은 이 죽은 물질로부터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고 이에 기반하여 새로운 권력체제를 구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주는 어떤 성격인가? 잉태되고 낳고 길러지는 생명이 아니라, 조작되고 통제되고 착취해도 되는, 효용성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처분하거나 폐기해버릴 수 있는 사적 소유물이 되고 만다. 지배권력의 확대는 결국 노예계급을 요청한다. 신들은 이전에 그들이 스스로 감당했던 노동력을 대신할 노예로 인간을 창조한다.
고대 크레타의 뱀 여신상은 원시적 대지모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에도 이러한 지배권력 모형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가이아(Gaia)는 태초부터 존재한 신으로, 신들의 어머니이자 만물의 어머니로 모든 생명체의 모태인 대지를 상징한다. 가이아는 혼자 힘으로 우라노스(하늘)와 우로스(산), 그리고 폰토스(바다)를 낳고,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티탄족(Titanes)을 낳는다. 그리고 원초적 신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올림포스 신족을 대적할 빌런들인 거인족(Gigantes)을 낳는다. 반면에 제우스로 대표되는 지배권력1)은 가이아로 상징되는 자연 세계를 힘으로 제압하고 거기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가이아에 의해 잉태되어 생명으로 조성된 세계는 자체적으로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배자에 의해 정복되어 인공물이 되어버린 세계는 죽은 물질에 불과한, 소유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제우스의 등장을 과거에는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로, 혼돈을 넘어선 질서의 확립으로, 신화에서 이성의 시대로의 전환으로 해석해왔지만, 지구 입장에서 보면 제우스는 어머니의 몸을 밟고 올라서서 사유화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연을 생명의 포대가 아닌, 원료 물질로 떨어뜨린 장본인이다. 우라노스(천공)와 크로노스(시간), 그리고 제우스(질서)로 이어지는 지배권력은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제우스는 먼저 비, 바람, 번개, 폭풍, 지진, 화산 같은(티탄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힘들을 하나하나 흡수하면서 자신의 위력을 키워나간다. 싸움에 진 티탄들을 타르타로스에 던져 감금하고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멀리 변방으로 내쫓는다.
제우스가 그리스 세계로 들어와 벌인 폭행 사건들을 정리해보자. 그는 그리스 전역을 돌며 토착 여신들과의 결합을 통해 도시들을 접수한다. 제우스의 위력 앞에 여신들은 그 지역을 수호하는 대지모신의 역할과 기능을 대부분 잃고 처녀신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제우스는 변신술에 능해 수많은 인간 여성들을 속이거나 유혹해서 작은 변방 지역까지(마치 동네 골목까지 대기업 편의점이 들어오는 것처럼) 자신의 세력 범위를 넓혀간다. 제우스가 보이는 과도한 집착, 성도착적 이상행동은 아마도 권력 상실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를 불안하게 하는 조짐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메티스가 낳은 아들이 제우스를 몰아낼 것이라는 신탁이 그에게 전해진다. 다급해진 제우스는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처럼 임신 중인 메티스를 삼켜버리지만 이번에는 제우스의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괴로워하는 제우스의 머리를 프로메테우스가 도끼로 내려찍자 거기서 중무장한 아테나 여신이 튀어나온다.
제우스는 가이아가 그를 대적하기 위해 거인족을 낳았다는 소문도 듣게 된다. 그리고 이들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인간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여신들뿐 아니라 수많은 인간 여성들까지 겁탈하는 이유가 바로 이 신탁에 따라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줄 인간 영웅을 얻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공헌을 했더라도 인간이 클럽에 들어올 수는 없다. 헤라클레스나 디오니소스도 아버지가 제우스라 할지라도 불로 인간적인 요소를 태워 없앤 후에야 올림포스 클럽의 정식 멤버가 되는 것이다. 이 클럽의 성격을 모방한 모임2)은 이제 인간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개나 소나 들어올 수 없는 그들만의 특별한 권리를 향유하는 클럽 말이다.
제우스는 우라노스나 크로노스처럼 권력을 혼자서 독점하지는 않는다. 그의 형제인 하데스에게는 명계를,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할당해주고 그 자신은 하늘을 지배영역으로 삼는다. 그에게 동조한 신들에게도 관장할 영역을 적절히 분배한다. 데메테르는 곡식을, 헤스티아는 화로를, 헤라는 가정을 관장하게 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면 원탁회의를 소집한다. 올림포스는 천상의 영역에 있는 신들의 특별구역이다. 올림포스클럽에 가입된 12명의 신들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라는 특별한 식사를 하면서 날마다 향연을 즐긴다. 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이런 공평한 특권은 그들만의 리그일 뿐, 사치스런 올림포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수많은 노동력과 자원들을 어디선가 끌어와야 한다.
민주정을 뜻하는 데모크라시는 데모스(demos)에 의한 지배체제(kratia)라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의 민주정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아닌, 성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지는 정치체제3)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테네에는 대지주인 귀족층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권한을 키워왔고 데모스의 범위에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같은 평민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폴리스 내에서 노예계층과 여성, 외국 출신의 거류민들은 폴리스의 경제적 기반을 떠받치고 있었지만 분명 데모스가 아니었다. 게다가 점점 그 범위가 확대된 데모스들의 산술적 평등과 권력의 분배가 폴리스의 자치 역량과 지속적인 번영으로 이어지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사회적 계층질서에 기반한 특권층의 ‘그들만의 리그’는 올림포스클럽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그리스 민주정의 역사는 귀족층이 그들과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평민에게 부여할 것인지, 평민을 데모스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지를 두고 벌어졌다. 플라톤은 일찍이 아테네의 민주정 속에는 그들이 최악의 체제라고 평가했던 참주정이 숨어 있다는 점을 폭로하고 싶어했다. 플라톤은 대체 어떤 지점에서 민주정 속에 도사린 위험성을 발견한 것일까?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아테네가 귀족층만이 누려온 정치적 권리를 평민들에게까지 확대함으로써 민주정의 이상을 주창하고자 한다면, 왜 데모스의 범위를 노예와 여성, 외국 출신의 거류민으로까지 확장하지는 못하는가? 아테네는 왜 다른 동맹국들을 동등한 일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그들에게 참주처럼 군림하며 제국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가? 그리고 아테네는 동맹국인 다른 폴리스들에게 이 민주정의 원리를 적용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4)
야심가를 지목하여 쓴 도편들. 도편 Ostraca 중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이 많이 보인다.
아테네는 민주정이 시작되기 전 이미 여러 번의 참주정을 경험했다. 참주는 폴리스 사회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 속에서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플라톤이 보기에 아테네의 민주정은 아테네 시민들의 민주정에 대한 공통의 신념보다는 제국이 이룩한 공통의 부에 근거해 운영되어온 정치체제이다. 페리클레스 시대가 끝나고 펠로폰네소스전쟁과 역병의 후유증을 겪으면서 아테네에는 다시 30인 참주정5)이 들어선다. 자신의 이익 추구로 치닫는 민주정이 어떤 모습으로 변질될지, 그에 대한 플라톤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열렬한 지지가 민주정의 원리에 찬동하고 실현하기 위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 누리는 혜택과 권리 때문이라면, 그런 데모스는 민주정의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이나 문제들에 대해 눈감아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데모스는 결국 거기까지였다.
제우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괴이하다. 불멸의 제우스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니…. 제우스는 이 신탁 때문에 여인들과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영웅들을 자녀로 두게 되었지만 애석하게도 영웅은 이미 반이 신이기 때문에 이들과 결탁해 가지고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신탁의 진정한 뜻은 그런 막강한 영웅의 힘이 아니라 평범하고 혈통적으로도 보잘것없는 인간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이 강대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원래는 한 쌍씩 붙어 있는 형태의 인간들을 둘로 쪼갰다거나 여러 종류의 인간들 가운데 제일 뒤쳐진 철의 시대 인간만을 남겨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약해진 인간들로부터 무슨 도움을 받는다는 걸까? 제우스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인간이 전능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그들이 두 가지 무기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수많은 인간의 결합체인 커먼웰스(조직체인 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쌓아온 테크네(기술)다.
커먼웰스(Common Wealth)는 수많은 시민과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를 하나하나 구성요소로 하여 이루어진 거대한 권력의 조직체로(영국의 사상가 홉스는 이 괴물을 ‘레비아탄’이라고 불렀다), 이 괴물은 지금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6) 그리고 테크네(Techne)는 자연의 위력을 제압하는데 제우스가 소지한 번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서 거인과의 싸움 이후 아직도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색출해서 박멸해 나간다. 인간은 근대 이후 커먼웰스와 테크네를 통해 한때는 제우스마저도 두려워 떨게 했던 자연의 잔당 세력들을 모두 정복한다. 제우스와 올림포스 신족들은 그후 인간들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숭배와 제사를 받지 못하게 되자 지상에서 권력을 잃고 사라진다. 이제 인류가 흉폭한 제우스를 대신해서 참주의 자리에 오른다. 피조물의 왕관을 쓴 호모 티란누스(Homo Tyrannus)의 등장이다.
우리는 권력자에게서 거세 공포증, 권력 상실에 대한 불안감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 안에도 제우스의 권력욕과 불안감이 잠재되어 있다. 그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성은 우리가 고삐를 놓치면 언제든 우리의 머리를 쪼개고 밖으로 튀어나올지 모른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온갖 무기를 장착하고 튀어나온 호위무사 아테나처럼 말이다. 인간도 언젠가는 지상에서 절멸되는 때가 올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한계와 자연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근대의 시민국가도,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떠받쳐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그것이 커먼웰스에 기반하고 있는 이상 이기적인 데모스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자기 이득을 취하는데 급급하면 그 체제는 인간 중심의, 인간만을 위한 올림포스클럽 이상이 될 수 없다. 동양적 지혜로 보자면, 권리와 이득을 보고 모인 자들은 결국 그것이 없어지면 멀어지고 흩어지기 때문이다.(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史記).7)
헤시오도스는 인간의 시대를 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의 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 등 다섯 시기로 구분했다. 독일 비텐베르크의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황금시대]를 보면 온갖 식물과 먹을거리가 풍성한 동산에서 사람들은 함께 먹고 대화화고 물놀이를 하며 춤을 춘다. 사자들도 서로 정겹게 몸을 부비고 있는데 이곳에서 사슴은 더 이상 그들의 먹잇감이 아니다. (Lucas Cranach the Elder, [황금시대의 인간], 1530)
인간에게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이 주어진 것이라면, 다른 생명에게도 생명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마땅히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고백한다. 인간이 주장하는 모든 ‘권리’는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강자의 논리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는 것을.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타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등급화하려 든다. 권력자를 중심으로 귀족과 평민, 노예가 등급화되고, 전체 동물계도 인간과의 진화 단계가 멀어질수록 원시동물로 취급되어 생명의 등급도 낮아진다. 만일 인류가 강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윤리를 벗어나 다른 종의 권리와 다른 생명체와의 연대를 요청하는 새로운 권리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권리를 제한하고 덜어내는 생태적 생명윤리가 요청된다. 인간만의 평등이 아니라 모든 지구 생명이 등등하게 초대되는 협력체제에 대한 희망이다. 바이오크라시(Biocracy)는 생명공동체, 모든 생명이 함께 이루어가는 협치체제를 말한다. 커먼웰스(물질적 부와 이익)에 기반하고 있는 데모크라시를 돌파해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이 시기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보아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생활양식 전체를 바꾸어 내지 못한다면 인류의 문명은 ‘인류세’라는 지층을 남기고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문명의 전환을 위해 새로운 공존의 문화,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연대하는 체제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 체제에 이들 미약한 지구 생명들의 자리는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강이, 산이, 나무와 돌들과 꽃들이, 신음하고 소리 지를 때 그 아픔의 소리를 우리는 알아채고 있는가? 인류는 취약한 존재들과 공감하며 그들의 자리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비워줄 용기가 있는가?
나는 지금의 문화, 지금의 윤리로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예감한다. 인류의 문화는 처음부터 자연을 생명으로 대하기보다는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다루어 왔다. 문화는 자연을 길들여 인간의 생활방식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는 낯섬(Unfamiliarity)을 친숙함(Familiarity)으로 만드는 행위,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던 자연을 인간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바꾸는 활동이었다. 길들인다는 것은 정복하고 사유화해서 언제든지 의도대로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권능 하에 운행되는 세계. 그 세계에 낯선 생명이 끼어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가축화는 결국 동물을 생명이 아니라 물건으로, 고기로 취급하는 단계로 우리를 이끌어서, 오늘날 공장식 사육과 도축을 거쳐 식탁과 접시에 이르는 거대한 생명의 참살 과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생명의 자각에 눈을 뜨게 되면 이것은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나치의 유태인 학살(Holocaust)보다 더 끔찍한 살육이 아닐까? 우리는 조류독감이나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퍼졌을 때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 발병 지역 인근의 가축 모두를 생매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곤 했다. 정부가 보기엔 수십만 톤에 이르는 아까운 고기가 폐처분되는 것이고 손실이 조금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8) 이런 조치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모세의 출생설화에 등장하는 유아학살과 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파라오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노동력에 손실이 조금 생겼을 뿐이라고.
이제 지구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바이오크라시 체제가 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질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지구를 살린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라.’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이렇게 요구할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지구 생명체에게도 그들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라. 그리고 다른 생명체를 길들이는 짓을 하지 말고 이들을 해방시켜라. 특히 대량 사육과 육식 소비를 당장 멈추어라.’ 이제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개벽을 수행해 나가는 근본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의 권리도 스스로 제한하고 덜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다. 지렁이(Earth Worm)는 힘없는 이 땅의 민중을 의미한다. 그동안 땅바닥을 기며 바닥살이를 해온 천민계층의 사람들이다. 이들도 밟히고 밟히면 꿈틀댄다는 말이다. 꿈틀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동등한 생명이고,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인격체임을 소리 지르는 것이다. 그 꿈틀댐이 첩첩이 쌓이면 마침내 몸의 변화가 일어나고야 만다. 더 이상 참고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면 식물에게도 가시가 돋치고 지렁이에게도 단단한 비늘이 돋친다. 민중의 대항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후위기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구된다면, 우리는 먼저 기존의 관점을 의심하고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항발전, 대항문화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민중이 기억하는 대항기억들이 모여서 대항역사를 이루고 이 역사는 기존의 지배권력 중심의 역사를 지양하면서 더 넓은 역사 이해의 지평으로 우리를 고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지렁이는 인류가 훼손시킨 지구생태계를 회복시킬 실낱같은 희망이다.
지렁이는 우리 구전설화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지렁이설화 가운데 하나가 견훤 이야기다.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파다했다.9) 그래서 그가 처음 봉기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민중의 지지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을까? 역사는 그를 실패한 영웅으로 규정한다. 그는 성품이 포악해서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외모가 흉물스럽다. 그리고 이 징그러움은 너무도 쉽게 포악함과 한통속으로 엮이고 만다. 견훤은 지렁이의 자손이라서 성정이 포악했다. 그래서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민중 속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기억도 남아 있다. 그는 누가 뭐래도 흙수저 출신이고 그의 실패는 끝내 이루지 못한 그 지역 민중의 한을 대변한다는 해석이다. 지렁이는 민중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속한 민중에 의해 배신당하고 다시 바닥에 던져진, 비극적 영웅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중설화에는 지렁이 후손이 줄줄이 등장한다. 삼별초군을 이끌었던 김통정 역시 지렁이의 자손이었다. 그 어머니가 지렁이와 정을 통해 낳았다 하여 진통정이라 불렀는데 그는 태어날 때 온몸에 비늘이 돋아 있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땅속을 헤집고 다니는 지렁이의 자손이지만 그의 몸에 돋친 비늘과 날개는 그가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할 장수임을 암시한다. 그는 이 땅의 수많은 아기장수들처럼 비운의 최후를 맞게 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최후 이야기에는 ‘장수발자국’, ‘장수물’이 등장한다. 김통정은 최후를 맞으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밟았는데 그 움푹 패인 발자국에서 샘이 솟아올라 ‘장수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저항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척박한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장수물’이라는 샘물을 남긴다. 그리고 이 샘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또 다른 지렁이설화 하나는 눈 먼 시모를 지렁이 국을 끓여 봉양한 며느리 이야기다. 눈먼 시모가 방에만 들어앉았는데 며느리가 매일 뭔가를 삶아서 뽀얗게 국을 끓여 드시게 했다. 시모는 그때마다 건더기는 다리 밑에 넣어놓고 국물을 늘 마시곤 했다. 그러다 언젠가 눈이 밝아져 볼 수 있게 되니 아들이 와서 어떻게 그리 눈이 밝아지게 되었는지 물었다. 시모가 말하기를, 며느리가 매일 약이라고 해주는 거를 먹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게 꺼꾸래이(지렁이)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했는데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지더란다.10) 어쩌면 그동안 자신의 권력에 취해 있던 인류에게도 이 꺼꾸래이의 힘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지렁이는 매일 흙을 먹고 자신의 몸무게의 수배나 되는 분변토를 배출한다. 어떤 황무한 땅이든 지렁이는 그 토질을 바꾼다. 지렁이는 천하고 더러운 동물이 아니다. 지렁이는 흙을 살리고 기름지게 만들어 그 땅에서 스스로 생명이 나고 번성하게 만든다. 지렁이는 양성을 한 몸에 담고 살아간다. 가부장과 가모장을 한 몸으로 실현하고 살아간다. 지렁이가 번성하면 그 지역의 문화도 바뀔 수 있다. 지금 인류에겐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런 경외감과 세계감에 대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문화는 아직도 그저 보고 즐기고 누리는 폭력적인 지배자들의 예술감상과 문화향유에 시중들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겐 치열한 지렁이 되기가 필요하다.
1) 가이아로부터 탄생한 우라노스는 가이아와의 결합으로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싶어 그의 자식들을 타르타로스에 던져버린다. 가이아는 고통 받는 자식들을 구하고자 그의 자식들 중 가장 영리한 크로노스를 시켜서 ‘아다만트’라는 금속으로 만든 낫으로 우라노스를 거세해버리고 2세대 권력자로 등극한다. 하지만 크로노스도 권력을 잃게 될까봐 레아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들을 삼켜버리는데 이때 레아가 몰래 숨긴 막내아들 제우스가 중심이 되어 치열한 전쟁 끝에 천둥과 번개로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3세대 권력을 차지한다.
2) G8 같은 선진국클럽, 글로벌기업포럼이나 지식인클럽, 동네 소상공인모임, 예술인연합회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수없이 많다.
3) 원래 데모스는 폴리스의 농촌 지역을 구분하는 행정구역 단위(deme)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주로 평민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도시국가를 이루는 폴리스의 주체인 시민 데모스는 엄밀하게 말해서 20세 이상의 성인, 그 중에서도 자유민 남성만을 전체 시민으로 인식했다.
4) 아테네는 민주정의 근본원칙보다는, 외부로는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 사회의 부를 독점하고 내부적으로는 노예제를 용인함으로써 물질적 이익을 취하는데 주력했다. 민주정이든 참주정이든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귀족층이든 평민이든 그들 계층에게 이익이 돌아가기 위해선 일관성이 없더라도 데모스의 범위를 더 확대하기보다는 제한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내용이 플라톤이 지적한 아테네 민주정의 한계점이었다.
5)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한 뒤 들어선 30인의 참주정은 기존의 아테네 민주정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거나 사형을 선고하는가 하면 3천명의 시민들을 따로 분류해 이들에게만 특권을 부여했다.
6) 이 괴물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산업혁명과 식민제국주의를 통해서, 그리고 국가(States) 중심의 아메리카식 민주주의를 통해서 그 자양분을 획득하고 몸집을 불렸을 것이다.
7) 권리權利의 한자 어원을 보면, 우선 권權은 저울 추를 의미하고 이利는 벼禾를 베어刀 수확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권리’라는 말에는 이익을(利) 저울질한다는(權) 관점이 이미 들어가 있다.
8) 이런 대규모 살처분의 근거가 된 가축전염병예방법은 가축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면에서 너무도 폭력적이고 반생명적인 방식으로 돼지들을 강제로 구덩이에 밀어넣는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아무도 돼지의 편에 서서 그들의 생명을 변호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없었다. 돼지들은 생명이 아니라 그저 물건이고 재산이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인간에게 적용했던 개체 간 거리두기와 사전 방역조치가 왜 돼지들에게는 취해지지 않았던 것일까? 돼지는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되는 것이기에 생명으로 대우받거나 죽지 못하고 그저 물건으로 치워질 뿐이다. 그것이 인간이 지배하는 지구의 현실이다.
9) 견훤과 고려의 삼태사가 안동에서 격돌했는데 도저히 견훤과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그래서 견훤의 동태를 몰래 살펴보니 기력이 쇠할 때마다 웅덩이 속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나오면 다시 힘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태사는 싸움 중에 견훤이 웅덩이에 들어가면 그 위쪽에 소금을 들이부으라고 백성들에게 명했다. 그래서 비로소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10) 「눈 먼 시모를 지렁이로 봉양한 며느리」, 구연자: 경북 경산시 용성면 부제리 김복순 할머니, 2013. 한국구비문학대계(gubi.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