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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 권정생의 동시를 중심으로타락한 언어를 대체하는 새로운 표준
김대현 문학평론가
교착상태

말을 공부하는 사람이면서도 가끔 마주하기 난감한 말들이 있다. 당연히 이는 그 말들의 표층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표의 외연을 넘어 그 이면에 내포된 발화자들의 음습한 욕망과 그 욕망을 견인하는 공동체의 모순들이 말들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이 곤혹스러운 것이다. 웃음으로 위장된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다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금은 전략적으로 형성된 또 다른 조롱의 어법들이 그러하다.
물론 타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는 양상은 아니다. 정치적 권력 또는 다수자들의 지배적 정서에 따른 언어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조금은 다른 에토스를 가진 사람들, 예컨대 신분, 젠더, 지역, 장애 등에 의한 차이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말들은 시기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양상이 현재와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과거에는 그러한 말들이 온당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문화적 공동체의 감수성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시기의 놀라운 성취를 보인 창작물들에서조차 지금은 도무지 수용하기 어려운 표현들이 간혹 나타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문제는 이전과 달리 문화적으로 성숙한 것처럼 보이는 공동체 내부에서도 혐오 표현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의 공동체가 도달한 윤리적 표준은 합리적 근거 없이 타자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은 불합리한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발화자들은 타자에 대한 혐오가 담긴 언어들을 끊임없이 생성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그와 유사한 구조를 보이는 사안에서 쏟아지는 혐오의 표현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을 비난하는 혐오 표현에 대항하는 미러링과 이에 대한 백래시, ‘요즘 애들’과 ‘꼰대’라는 개념 사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세대 간의 분리 의식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대체로 혐오 발언의 발화자들은 자신들의 표현이 부당한 혐오가 아니라 합리적 차이에서 근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욱 깊이 들어가면 각자의 심연에 착종된 복잡한 이유들이 있을 터이지만 제한된 지면에서 이를 다루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적절하지 않다.

여하튼, 일종의 이른바 능력주의에 기반한 이러한 믿음은 발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정당하게 소유하여야 할 몫을 다른 사람으로 인해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박탈감을 가지게 하고, 이러한 박탈감이 자신이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를 내재한 언어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가 이런 ‘몫 없는 이’들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를 방조하고 있다고 믿는다. 분노한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혐오 표현이 부당한 침해에 대한 정당한 방어권의 행사라고 인지하며 타인을 상처 입히는 것에 아무런 윤리적 부채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이들의 박탈감과 분노에 대해 공동체를 운영하는 자들의 대처 방식이다. 분노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에게 아무런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는 시스템 운영자들의 훈계에 지쳐 있다. 이전에 그들이 약속한 이상향은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도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공동체의 운영체제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점유하는 그들은 별다른 성찰 없이 과거의 담론 지형을 바탕으로 동일한 언어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언어의 타락이라는 현상이 진부한 이유이다. 결국 타락한 언어란 그 자체로 시대를 경유하여 되풀이되는 질문에 어떤 해결책도 줄 수 없는 대답이 반복되면서 교착되어 있는 상태를 은유한다.

공동체의 구조

가끔 심기가 어지러울 때 권정생의 동시집을 찾아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분노와 좌절감으로 얼룩진 혐오 표현들의 전장에서 권정생의 동심(童心)이 보여주는 섬세한 말들의 풍경은 의식의 안식처를 제공함과 동시에 나아가 어떠한 진전도 없는 사회적 교착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오해를 회피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동심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만 바라보는 미숙한 마음이 아니라 ‘천진(天眞)’이라는 어의 그대로 어떤 기교에도 변질되지 않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결정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동시는 힘이 세다. 간결한 호흡과 리듬만으로 세계의 구조를 탐색하는 순정한 인간의 정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앙쥐야
쬐끔만 먹고
쬐끔만 더 먹고
들어가 자거라

새앙쥐는
살핏살핏 보다가
정말 쬐끔만 먹고
쬐끔만 더 먹고
마루 밑으로 들어갔어요

아픈 엄마 개가
먹다 남겨 둔
밥그릇을
달님이 지켜주고 있지요

_ 「달님」전문 1)

1) 권정생 동시집 『산비둘기』, 창비, 2020.

권정생 동시집 [산비둘기] [동시 삼베치마]

인용한 시는, 달빛이 비치는 밤에 개가 남긴 밥그릇을 쥐 한 마리가 탐하고 있는 풍경을 다룬다. 비교적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는 그 표층 너머에 우리의 공동체가 어떤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간파하고 있다. 근대적 소유관계에서 “밥그릇”은 어미 개에게 전유된 몫이며, “새앙쥐”는 그에 대해 아무런 지분이 없는 자에 해당한다. “달님”은 이러한 “몫 없는 자”들이 함부로 남의 몫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치안을 담당한다. 하지만 시에서 “달님”은 “새앙쥐”의 몫을 기꺼이 인정한다. 이는 몫 없는 자들을 배제하는 근대적 소유관계의 논리는 지속 불가능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달님”은 그러한 배분의 논리가 가진 함정도 인식하고 있다. “정말 쬐끔만 먹고/ 쬐끔만 더 먹고”라는 표현은 그래서 더 절묘하다. 어떠한 몫을 분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이상의 몫을 가져가길 바라는 인간이 가진 욕망의 본질이 선연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 욕망을 절제하게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수행하는 역할이라는 것을 천진한 동심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선아 시험지 100점
반 안에서 단 혼자뿐

내 시험지 25점
반 안에서 또 혼자 뿐

(…)

선아하고 키도 같은데?
선아하고 나이도 같은데?

(…)

아 아-
알았어! 알겠어!

이제 내가
선아 100점과
내 꼴찌점을
애써 알려 든 것처럼

선아도 벌써부터
그렇게 애써 공부했다는 것을
_ 「선아 100점」부분 2)

6학년이 되면
나도 이젠
많이 알아야겠어요

하늘빛이 파아란
그 꿈 같은
파아란 마음을 알아야겠어요

산수 시간에 배운 것 말고
잇과 시간에 배운 것 말고

엄마처럼 인자한
그런 마음을 배워야겠어요

때로는
선생님의 말씀을
꼭꼭 되씹으며
나대로의 생각을 할 줄 알아야겠어요

_ 「6학년이 되면」전문 3)

2) 권정생 『동시 삼베치마』, 문학동네, 2011.
3) 위의 책

인용한 두 시편은 능력주의에 대한 권정생의 복합적 인식을 보여준다. “선아”와 ‘나’는 키와 나이를 비롯하여 여러 부분에서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둘의 점수는 반에서 1등과 꼴등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차이가 벌어진 이유를 찾던 ‘나’는 ‘선아’가 투입해왔던 노력이 점수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깨닫는다. 실력에 대한 존중이라는 점에서 이는 얼핏 능력주의에 대한 투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편의 인식은 다르다. 화자는 “산수”와 “잇과”로 대변되는 학업과 이재에 대한 능력이 인간을 판단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타인의 부족한 부분을 인내하는 엄마의 마음을 비롯하여 “나대로의 생각”과 같이 각각의 개인이 가지는 고유의 가치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른바 능력주의에 대한 권정생의 인식은 무언가를 쟁취한 타인의 노력을 인정하되 그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가진 다른 가치들의 소중함을 함께 승인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어린이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표준

지금까지 소개한 시편들이 권정생의 사유를 전부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교착상태를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정생의 접근법이 어떠한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는 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외연의 무한한 확장을 통해 집단에 소속된 개인들의 차이를 무화하는 혐오의 언어들 속에서 작은 개별 존재들의 차이를 긍정하는 권정생의 섬세한 언어들이 앞으로 구축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표준에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더욱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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