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은 “돌아봄이 돌봄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오은)고 썼다. 이 말은 ‘다독임’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오은은 산문집 『다독임』(난다 2020)에서 보듬다, 감싸다, 쓰다듬다, 다독이다, 어루만지다 같은 계열의 동사들에 특별히 주목한다. 나는 시인이 쓴 표현에서 특히 “입고픈 사람이 귀고픈 사람을 만나는 순간”(앞의 책, 19쪽)이라는 표현에서 환대와 돌봄의 문화를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입고프다’는 “자유롭고 숨김없이 말을 하고 싶다”는 뜻이고, ‘귀고프다’는 “실컷 듣고 싶다”는 우리말이다. 다시 말해 입고픈 사람과 귀고픈 사람이 우애롭게 만나는 마주침의 순간이야말로 환대와 돌봄이 단박에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환대와 돌봄의 가치가 더 이상 상상력의 차원이 아니라 전면적인 현실화 및 제도화를 절실히 요청한다고 보아야 옳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함께 살 줄 앎’이라는 진짜 역량(capability)이 전면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물론 포스트 코로나는 저절로 오지 않을 것이다. 학벌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위드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집, 땅, 차, 돈(주식)에 열광적으로 ‘몰빵’하는 현실에서 그런 돌봄과 환대의 진짜 역량의 구현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故 김종철 선생(1947-2020)이 생전에 즐겨 말한 표현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다(Hope against Hope.)’의 태도와 관점은 매우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무엇이 진짜 역량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언명한 ‘예시(豫示)적 정치’를 위한 상상력과 실천을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량이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유령인 소위 능력주의(Meritocracy)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능력주의는 결국 각자도생에 불과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환대와 돌봄을 위한 ‘상호의존의 정치학’(영국 더케어콜렉티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지역의 다양한 사람과 장소를 연결해 한 인간이 속한 시·공간을 구조화하려는 예술교육과 문화돌봄 활동이 시급히 요청된다. 예를 들어 춘천문화재단이 2020년부터 추진하는 [도시가 살롱] 사업을 비롯해, ‘가치 안은 배움터’를 표방하며 학교 안과 밖을 연결하며 예술교육과 문화돌봄 활동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예가 된다. 어쩌면 그런 활동 과정에서 ‘이웃’을 생각하는 춘천 시민들은 장차 시민력(市民力)이 높은 시민으로 새롭게 탄생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재난의 시대에 사람을 걱정하는 시민력의 가치가 매우 각별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정치철학자 김만권이 “외로움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한겨레, 2021.5.10.)라고 언명한 것처럼, 철저히 개별자로 ‘고립’된 시민들은 외로운 군중이 되어 각자도생의 윤리를 내면화하며, 능력주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공유지를 파괴한다. 그런 시민들의 능력주의는 결국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다.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메리토크라시의 발흥』(1958)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능력·실적을 뜻하는 merit와 사회체를 뜻하는 cracy의 합성어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그 지위가 결정되고, 능력이 가장 높은 사람이 통치하는 사회를 당연시하는 체제를 말한다. 문제는 능력주의가 강조되는 체제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를 비롯해 ‘사람의 자리’가 점점 희박해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여기 대한민국에서 목격하는 현실 또한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말라’라는 식의 무자비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던가.
지역에서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구현하려는 문화기획자 및 동네지식인들의 활동이 요구된다. 그런 문화기획자 및 동네지식인들은 나보다 약한 사람의 ‘자리’를 생각하며 ‘의자’를 놓고 관계의 ‘평상’을 놓는 다양한 문화적 기획과 활동들을 모색한다. 지역 문화원 또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며 그런 기획과 활동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기도문화원연합회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동안 지역문화원(오산·의왕·하남)과 협력해 추진한 ‘마을 큐레이터’ 되기 프로젝트 같은 활동이 더 많이 필요하다. 마을 큐레이터 프로젝트는 지역에 사는 한 사람의 주민(住民) 입장에서 ‘사심(私心)’ 가득한 기획들을 구상하며 지역 사람들과 더불어 추진했다. 이처럼 지역문화원은 각자의 지역에서 예술가 또는 주민(시민)들과의 수평(水平)적인 협력의 경험들을 쌓아가며 각자의 ‘사례’를 만들어가며 자기 역량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문화기획자와 동네지식인들은 결국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 ‘뉴노멀’ 사회에 요구되는 돌봄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진짜 지식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뉴노멀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가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파커 J. 파머)라고 한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문화기획자 또는 동네지식인들은 내가 사는 지역에서 예술교육과 문화돌봄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적·예술적 개입을 요청받고 있다. 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기획자와 동네지식인이 요청받는 역할과 활동은 일종의 ‘인문대피소’로서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대피소라는 개념은 내가 사는 지역에서 재난 이후의 삶의 방식을 깊이 고민하고, 인간주의를 강화하려는 트랜스 휴머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먼’ 시대 인문(人文/人紋)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동시에, ‘사람의 자리’를 생각하려는 대면·비대면 방식의 모임을 활성화하려는 문화적 기획과 활동들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인문대피소로서의 역할은 유형·무형의 ‘공공 공간’을 회복하는 일이다. 공공 공간이 파괴된 곳에서는 공유하는 삶을 의식하기 어렵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문대피소라는 개념과 관련해 영국의 ‘더케어콜렉티브’가 최근 출간한 『돌봄 선언』(니케북스 2021)은 매우 유의미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이들은 재난의 시대 돌봄이 결여된 세상은 배척과 혐오에 근거해 정체성을 공유하기로 악명 높은 ‘무신경한’ 집단들이 활개 칠 수 있는 나쁜 토양을 만든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무늬뿐인 돌봄’(carewashing)이 세계 각지에서 넘쳐나고, 코로나19 같은 재난 상황에서 돌봄이 부재하며 극단적인 무관심(carelessness)이 지배하는 것을 보라. 그런 사회에서는 우리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생각하며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들이 ‘돌봄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관점에서 ‘보편적 돌봄’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돌봄 선언』에서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은 3장 ‘돌보는 공동체’ 편이다. 이들은 돌보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네 가지 핵심 특성, 즉 상호지원, 공공 공간, 공유자원, 지역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꼽는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치들이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돌봄과 복지활동의 민영화를 수반하는 아웃소싱이 아니라 지역 내부에서의 확대와 ‘인소싱’을 통해 공공 부문을 개혁해야 한다”(91쪽)는 주장이다. 아웃소싱이 아니라 인소싱! 앞에서 인문대피소라는 개념을 내가 제안한 것도 지역의 필요에 맞게 ‘인소싱’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고, 역량을 키우는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뉴노멀 시대에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 6개월여 동안 지속되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확인한 것처럼, 환대와 돌봄의 가치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갖추어야 하는 개인적·사회적 역량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자기 배려-타자 배려’의 의미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집단면역’이라는 말 대신에 ‘면역우산’ ‘집단보호’라는 말을 사용한다. 지난 5.22 한미 정상회담 이후 우리나라도 백신 접종이 본격화되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은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실체적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대한민국)을 ‘돌보는 공동체’로서 바꾸기 위해 인문대피소가 필요하고, 그런 공공 공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주체로서 동네지식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토양(soil)을 구축한다면, 뉴노멀 시대가 마냥 각자도생의 윤리가 권장되는 ‘헬조선’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래서 동네지식인이야말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진짜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동네지식인들은 ‘누구나’의 것이 되어야 할 공유지가 갈수록 ‘누군가의’ 것으로 사유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지식의 공공성을 생각하는 문화적 기획과 예술적 활동을 하리라고 믿는다.
수년 전부터 나는 사람의 격(格), 도시의 격(格)을 자주 생각하곤 한다. 요즘 각광을 받는 문화도시 열풍 현상 또한 한낱 지원사업의 새로운 장르로 인식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화도시는 시민들이 ‘도시에 대한 권리’ 차원에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모든 곳을 ‘우리 모두를 위해 영원히’ 시민들과 함께 누리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시민의 권리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시민 누구나 환대받을 권리를 행사해야 하고, 시민 개개인들 또한 누구에게나 환대할 용기를 발휘하는 데에서 갖추어질 것이다. 누군가가 “약자는 ‘개인’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영)이라고 한 말은 문화도시를 생각하고 추진할 때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관점일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시적으로 선취한 시인 이문재의 시집 『혼자의 넓이』(창비 2021)에 수록된 시 「끝이 시작되었다」를 감상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시인은 위드 코로나 시대 “저 낡은 시대의 인간”에서 벗어나 “어머니 지구”를 위해 “우리 안의 인류”가 “기필코 두 눈”을 떠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인은 재난의 시대에 필요한 삶의 태도와 감수성은 ‘세계감(世界感)’을 인식하는 것이고, 어쩌면 ‘뒷걸음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고 시적으로 묻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래서 시인 이문재의 「끝이 시작되었다」를 비롯한 시집 『혼자의 넓이』는 위에서 줄곧 언급한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구현하기 위한 예시(豫示)적 정치의 시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시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뉴노멀’의 필요성을 강력히 환기하는 수행적 힘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적 예언 내지는 시적 전망은 분명 자기 충족적 예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항상 좋은 시, 좋은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과 믿음을 작품에 구현한다는 점에서 시인이 근미래(近未來)의 현실을 시적으로 훌륭히 선취했다고 보아야 옳을 터이다.
그런데 이 시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표현, 즉 “낡은 것은 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는”이라는 표현은 각별한 주목을 요구한다. 이 말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쓴 표현으로 공위기(空位期, Interregnum) 상황에서의 사회·정치적 지체(遲滯)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19 상황에 대비해보면, 문제는 분명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력과 정치가 분리된 상황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국가 없는 국가주의’를 표상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제는 한 나라가 방역을 잘 한다고 결코 종식될 수 없는 문제이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며 ‘돌봄전환사회’로 레짐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도 수없이 많은 문제와 갈등들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냉소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돌봄전환사회를 생각하며 ‘정의로운 전환’을 구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 시절에, “모든 것은 예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는 식의 낡은 관성과 관행과 과감히 작별하려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인문대피소 같은 문화적 기획과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제는 세대 교체가 아니라 ‘시대 교체’를 고민해야 하고, 삶의 언어를 회복하며, ‘이코노믹(economic)에서 에코(eco)로’ 우리 삶을 전화하려는 비평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어쩌면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예술교육, 문화돌봄 같은 문화적 기획과 활동들이 일종의 ‘영구혁명’으로서의 속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을교육 또는 마을배움뿐만 아니라 문화도시사업이 하나의 트렌드로 인식되고, 또 하나 지원사업의 장르로 오해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지역 문화원의 할 일도 적지 않다. 지역의 예술가, 지역 주민들과 협력의 경험을 계속 축적하며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리듬과 에너지의 흐름에 ‘의하여’ 다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기획과 활동을 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돌봄전환사회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내 삶을 더 이상 성장과 발전 위주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조금씩 ‘이탈’하려고 고민하고, 시민을 존경하며 웃음의 도시로 바꾸려는 행정의 유쾌한 실험이 만날 때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역 문화원을 비롯한 문화기획자들과 동네지식인들은 ‘입고픈 사람’과 ‘귀고픈 사람’이 만나는 환대와 돌봄의 순간을 더 자주, 더 많이, 기획하고 활동해야 한다. 지금은 시인 브레히트가 언명했듯이, ‘좋은 옛것’보다는 ‘나쁜 새것’이 더 필요하다. “춤추고 노래하자 안팎의 새것을 마중하자”(이문재).
“끝이 시작되었다”
끝이 시작되었다 1)
춤을 추자 관을 들쳐 메고
춤추는 아프리카 청년들처럼
춤을 추자
낡은 것이 가고 있다
낡은 것이 잘 갈 수 있도록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자 우리 함께 배웅하자
드디어 끝이 시작되었다
서로 손을 잡고 끝의 시작을 바로 보자
낡은 것은 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2)
저녁 같은 혹은 새벽 같은 이 시간
마침내 끝이 시작되었다
땅끝에서처럼 바다의 끝에서처럼
끝에서 끝을 똑바로 보고 돌아서자
이 끝을 시작으로 만들어내자
오래된 아침 그래서 처음인 새 아침이
우리 앞에 있다 아니 우리 안에 있다
바야흐로 끝이 시작되었다
춤추고 노래하자 안팎의 새것을 마중하자
이번이 마지막 끝일지도 모른다
이 시작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첫 시작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관을 메고 춤추자 요람을 들고 노래하자
저 낡은 시대의 인간을 위하여
기필코 두 눈 뜰 우리 안의 인류를 위하여
다시 뭇 생명 보듬어 안을 어머니 지구를 위하여
_ 이문재 시 「끝이 시작되었다: 인간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지구로」 전문
1) ‘끝이 시작되었다’는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대사다.
2)낸시 프레이저의 책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김성준 옮김, 책세상)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