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 일찍 우리 집에 SSG이 쓱 들어왔다. 현관 앞에 놓인 SSG 상자에는 우리 가족이 일용할 양식이 가득하다. 코로나로 바뀐 일상의 대변혁이다. 주말 아침 현관문을 열면 어김없이 ‘쓱’ 박스가 놓여 있다. 아이스 팩과 함께 흐르거나 깨지는 것, 망가짐 없이 예쁘게 새벽 배송되어 온 일용할 양식들! 어디서든 핸드폰 하나와 지불할 신용카드만 있으면 쇼핑이 가능하고 배송까지 받아 볼 수 있다. 오늘 아침 식사는 호밀빵. 냉장고에서 땅콩버터와 딸기잼, 우유를 꺼내 일어나는 순서대로 한쪽씩 입에 물려주면 아침 식사가 마무리된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누가 새벽길 떠나가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왜, 누가 떠났는지 눈이 오면 어김없이 이 동요를 생각했었다. 이제 누군지 알 리 없는 누군가가 새벽에 ‘쓱’ 박스를 남겨놓고 떠나갔다.
일상의 모습을 따라가 보자. 일용할 양식은 새벽 배송으로, 신문은 포탈을 통해, 지식도, 쇼핑도, 여가도 모두 온라인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목격하는 일상의 모습이다.
장 보는 시간을 줄여 몸을 편하게 하니 확실히 좋은 것인가? 코로나19를 피하는 안전한 비대면 장보기가 준비되어 예전과 다름없는 마음껏 먹고 쓰는 것이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는 또 내일 어떤 하루를 대면하게 될까?
바이러스의 창궐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사회적·심리적 영향이 오늘 아침 경험한 ‘쓱’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유통기업인 신세계(E마트)가 만든 ‘쓱’의 광고에는 인간다움, 따뜻함, 감동이 가득하다. 새벽 배송을 위해 애쓰는 직원들의 노동이 그 가운데 있다. 그러나 미화, 포장된 이 광고는 유통 시스템이 인간다움을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예전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더믹(Pandemic) 상황에서마저도 평소와 다름없는 소비 일상을 유지한다. 인류의 기술문명과 자본이 결합하여 탄생한 새로운 시스템들이 일상을 차지한 모습을 보며, 그 이면에 도사린 자본의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 끝에 인류는 커다란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나의 어릴 적 추억이 있다. 해질녘 엄마를 따라 시장에 저녁거리를 사러 가곤 했다. 채소 자판을 지나 시장 안을 들어서면 맨 먼저 생생한 생선들이 산더미처럼 드러누워 있는 생선가게를 만난다. 보통 고등어자반이나 꽁치, 임면수어 등을 저녁거리로 샀던 것 같다. 생선가게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보리 볶는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낙화생이나 참기름, 보리차 가게를 지나 순대며 튀김, 덴뿌라 가게가 있었고, 시장 안 모퉁이를 따라 골목 쪽으로 나가면 닭장 안에 살아 있는 닭을 잡아 파는 닭집이 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사람이 존재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지금 우리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 그림 속으로 숨어든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는 ‘쓱’ 박스를 열고 먹는다는 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먹는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누가 생산하는지, 물건을 파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사라져버렸다. 나와 물건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가 사회적, 협동적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코로나19 이후의 미래 사회를 희망적으로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선 공동체의 붕괴가 현실화할 위기에 처해 있다. 말뿐이 아니다. 바로 우리 눈앞에 닥친 현실이다. 지금이야말로, 아니 지금부터라도 함께 공존할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창출한 물리적 기계, 인공지능 기계, 사회적 기계 및 과학적 지식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는 것은, 그 전장에서 우리(다중)가 착수할 수 있는 대담하고 강력한 하나의 사업인 것이다.” _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 2-7장 우리, 기계적 주체들 *
오늘 친구 아들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신랑과 신부에 대한 궁금함보다 이 시국에 결혼식에 가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마스크를 쓰고 발열 체크를 하고 예식장에 입장하였다. 친구와 기념촬영을 하면서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도 기록이라고 하며 웃었다. 이것은 이제 일상이다.
친구의 아들은 결혼 후 영국으로 연구 연수를 떠난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예측할 수 없는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었다. 인류의 기술문명은 세상을 가깝게 만들었지만, 이제 ‘국경’을 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날 피로연 자리도 어김없이 가족주의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미래에 우리 후손들은 지금 이 시대를 뭐라고 규명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가능한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지금 이 상황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형태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또 그러한 삶을 이어갈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환경파괴, 기상이변,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바뀐다는 것은 수많은 영화와 소설 등에서 다루어졌던 소재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인류가 지닌 원초적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기술문명 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지는 자연, 그리고 무너지는 공동체의 삶의 방식을 목격하면서 느꼈던 두려움이나 무력함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간 내가 느껴온 세상에 대한 단상은, 과연 인류가 멸망의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였다. 무기력한 인류를 보는 슬픈 방관자라고나 할까.
김규항은 『혁명노트』**에서 “개인으로서 삶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앎과 삶의 분리’는 그의 윤리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삶이 물신성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노예이며, 물신의 명령과 의지에 따라 제 역할을 수행하는 노예라는 것이다. 자본화에 대한 경계의식이나 견제가 해제된 사이 매우 빠르게 더욱더 견고해진 자본에 예속되는 물신사회로 치닫게 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극도의 자본주의 하에서 바이러스 창궐 시대를 막을 수 있을까? 환경파괴와 기상이변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으려면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혁명노트』에서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어떤 질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이승준·정유진 옮김), 『어셈블리(Assembly)』(2017), 알렙, 2020. 『어셈블리(Assembly)』는 좌파 중 가장 창의적인 사상가인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다중』, 『공통체』의 작업을 계승하며 최근의 세계 정치 상황을 분석하며 사회운동의 실천을 도모하는 책이다. 저자들은 아직까지는 오래 지속되는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진단하면서, 이제는 지도자와 다중의 역할의 전도가 필요하고 나아가 그것을 장기적 안목에서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다중이 전략을 주도하고 지도자들은 전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셈블리(Assembly)’라는 제목은 함께 모여드는 힘과 정치적으로 합심하여 행동하는 힘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붙여졌다.
** 김규항, 『혁명노트』, 알마, 2020. 사회문화 비평가 김규항의 『혁명노트』는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교육·인물·시사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구조를 분석한다. 이 책은 개인적 층위에서 영성의 혁명을 넘어, 개인들의 총합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사회 시스템을 관통한다. 김규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전망 없는 세계’는 자본주의가 보이는 일시적 병증이 아니라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국지적이거나 시의적인 관점을 넘어 자본주의의 본질과 구조를 직시하고, 자본주의 극복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마련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촛불을 보며 새로운 정치 주체인 ‘다중(multitude)’을 규정했다. 다중은 제국의 지배를 끝내고 새로운 삶, 민주적 세상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들이다. 저항과 투쟁이 마주치고 이어져서 이루어진 결합체가 결국 다중으로 나타난다.
2017년 발행한 네그리•하트의 『어셈블리』에서는 사회적 불평등과 끔찍한 가난에 대한 격분, 지구와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분노와 걱정, 멈출 수 없을 듯 보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규탄이 가득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모든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힘이 없다고 느낀다. ‘어떻게 이 운동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지속하는 대규모 방식으로 민주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을 구원할 대안과 그것을 현실화할 정치적 주체의 창출로서 ‘다중의 군주 되기’를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 앞에 질문이 놓여 있다.
‘어떻게 이 운동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운동들은 오래 지속하는 대규모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민주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이 위기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코로나 이후에도 ‘다중의 모이기(어셈블리)’가 해방의 열쇠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은 다양한 시스템을 통해 자본을 증식하고 이러한 위기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현실을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행동하는 주체로서 깨어나고 다중을 형성하고, 공동체로서 연대하고, 사회적 협력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자본으로부터 되찾는 것, 그것을 위해 모이는 것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팬더믹 상황 속에서 연대와 협력을 통한 실천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역으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술문명 안에서 다중의 어셈블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의 위기는 사실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사회가 젠더화한 사회적 서비스 같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얼마나 크게 의존해왔는지를 오히려 드러낸다.”며 “이 위기의 시대에 ‘어셈블리’와 사회적 협력은 여전히 필수적이며, 다양한 방식의 어셈블리가 한편으로는 미래에 다가올 해방의 열쇠라는 점에 유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_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 4-16장 포르톨라노
마지막으로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故 김종철*** 선생님의 4월 17일자 한겨레 칼럼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을 통해 우리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의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손 씻기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 김종철은 한국 사회의 가장 급진적·선구적인 인문잡지로 평가받는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진주의 남강변에서 자라던 유년 시절에 6·25 전란을 겪었다. 전쟁 이후 마산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읽고,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군복무를 했다. 제대 후 숭전대학교, 성심여자대학, 영남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0~80년대에는 문학평론 활동을 하다가, 1991년에 격월간 『녹색평론』을 창간하여 에콜로지 사상과 운동의 확대를 위한 활동에 열중해왔다. 2004년에 대학의 교직을 그만두고, 『녹색평론』 편집·발간에 전념하면서,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 2004년 이후 10여 년간 ‘일리치 읽기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자주강좌를 개설·진행했다.
2020년 6월 26일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저서에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간디의 물레』(1999),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2008), 『땅의 옹호』(2008), 『발언 I, II』(2016), 『大地의 상상력』(2019) 등이 있고,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2),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2007)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