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름과 땅이름은 낱낱의 사람과 땅을 구별하여 일컫는 고유명사이다. 사람이름은 작명 형식에 따라 이름의 두 음절 가운데 돌림자가 있어서, 사실상 한 음절만 이름 구실을 한다. 따라서 독립지사 ‘안중근’의 이름에서 성씨 ‘안’과 돌림자 ‘근’은 모두 같아서, 아우 안정근, 안공근과 분별하는 고유의 이름은 오직 ‘중’ 뿐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사로서 변별력이 떨어진다.
더 문제는 아기 때 어른들이 이름을 지어주는 까닭에 사람됨과 이름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이름 ‘안중근’은 독립지사라는 뜻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실제 인간 안중근은 사냥꾼, 천주교도, 독립지사로 시기마다 다른 삶을 살았다. 다만 우리가 독립지사 안중근을 특히 주목하고 기릴 따름이다. 따라서 안중근은 독립지사라는 이름을 남긴 것처럼 착각할 뿐 이름의 뜻과 독립지사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러므로 인명사전에는 인명 유래나 전설이 없다.
그러나 땅이름은 같은 고유명사라도만 사람이름과 전혀 다르다. 작명방식부터 거꾸로다. 땅에 관한 일정한 근거에 따라 땅이름이 지어지기 때문이다. 형식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땅의 내용과 형태, 위치 등에 따라 제각기 일컫다가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 어느 하나로 자연스레 귀결되면서 하나로 결정된다. 이처럼 땅이름은 민주적으로 일컬어지는 공동작인 까닭에 땅의 이름과 실제 땅은 상당히 유기적인 관련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땅을 알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땅과 이름의 관계를 잘 풀어서 지명의 내력을 설명하는 지명 유래도 있다. 그러므로 지명사전에는 지명유래가 긴요한 정보 구실을 한다.
행적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이름 자체가 정보를 전혀 담고 있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땅이름은 땅의 실상과 역사와 기능에 관한 정보를 여러 모로 담고 있다. ‘논골’ 마을은 예전부터 논농사를 지은 마을이고, ‘보나루’는 냇물을 건너던 나룻배가 운행되던 포(浦)이며, ‘솔뫼’는 산기슭에 소나무숲이 훌륭한 경관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현리(縣里)에는 예전에 현이 있었고, 탑골·탑마·탑리에는 으레 탑이 있기 마련이다.
안동 송천동 솔뫼 마을의 소나무숲: 지금 마을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처럼 마을 이름에는 마을의 생업과 기능, 생태, 지리, 역사, 입지, 행정, 문화 등에 관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골짜기 이름도 일정한 정보를 담고 있는 지명이다. 조탑(造塔)리에 5층 전탑이 있는 것처럼, 모랫골에 모래가 많고, 당골은 신을 모시는 당터가 있으며, 못골에는 저수지가 있고, 절골에는 절이 있었다. 이처럼 지명은 지질을 비롯해서 민속신앙, 수리시설, 문화유산 등의 정보를 담고 있는 압축파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지명은 인명과 달리 땅의 특성을 귀납하여 이름이 지어진 까닭이다. 따라서 이름은 땅의 실제 사실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장승을 세우던 곳을 ‘장승백이’이라 하는 까닭에 사라진 장승문화의 전통을 복원할 수 있고, 가난한 남매가 빠져죽은 못을 ‘남매지’라 하므로 빈부 차에 따른 지역사의 비극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지명조사만으로 지역의 지질과 입지, 생태 등의 지리적 정보는 물론, 행정과 역사, 신앙, 전통 등의 인문학 정보도 두루 발굴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행정동에 속한 여러 모듬살이마다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골목과 , 놀이터, 개울, 빨래터, 언덕들도 이름이 있어서 다양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마을을 나서서 들로 산으로 가도 주민들의 행동반경이 미치는 공간에는 모두 이름이 있다. 따라서 산과 골짜기, 들, 시내, 숲, 고개, 소(沼) 등에도 제각기 고유한 이름이 있다. 주인 없는 땅은 있어도 땅이름 없는 땅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명은 보이는 땅에 보이지 않는 인문학 정보와 지식을 담고 있는 압축파일이다. 왜냐하면 지명 속에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전통의 세계를 압축하여 갈무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명의 압축파일을 잘 풀면 그 동안 몰랐던 지방사와 지역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지명조사활동을 하는 것은 잃어버린 지방사 발굴이자, 숨겨져 있는 지방문화의 보물찾기나 다름없다.
지명과 함께 유래와 전설이 전승되기도 한다. 지명유래가 특정 지리적 장소의 이름 내력을 풀이한 단순한 설명에 머문다면, 지명전설은 지명 관련 유래가 일정한 구조의 이야기를 이루어 서사문학의 형상을 갖춘 것이다. 따라서 지명유래나 지명전설은 지명의 압축파일을 푸는 열쇠이자, 사실상 지역의 문화유산 해설사나 향토사가 구실을 한다. 지명전설은 인물전설과 함께 전설의 중요한 양식이자 설화문학 작품이다. 그러므로 구비문학 조사를 가면 먼저 지명전설부터 수집한다.
지명유래는 지명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 이를테면 ‘하이마’라는 마을이름은 유래를 모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임하현(臨河縣)에 대해서 아래쪽에 있는 임하(臨河)라는 뜻으로 ‘하임하(下臨河)’ 곧 ‘하이마’로 일컫게 되었다는 유래를 알면 지명의 의문이 풀린다. 하이마의 지리적 위치와 입지를 포착하는 긴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까닭이다.
임하현의 절터에 있는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5층 석탑(경북 유형문화재 180호)
하이마 지명유래 조사는 나비효과처럼 임하사지(臨河寺址) 발굴성과까지 거두었다.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부(府)의 서쪽 7리”에 임하사 절터와 전탑(塼塔)이 있다고 했는데, 기록과 달리 임하사 절터는커녕 전탑도 찾을 수 없었다. 임하는 안동부의 동쪽에 있으며 절터와 탑들이 남아 있는데, 정작 서쪽 일대에는 절터는커녕 전탑도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런데 지명조사에서 ‘하임하’ 유래와 함께 절골의 지명도 찾아냈다. 유래에 따라 하이마의 절골을 찾아가 지표조사를 한 결과, 마침내 임하사 전탑지(塼塔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전탑지 발굴조사를 하여 보물급 은제사리(銀製舍利) 장치까지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명과 지명유래가 거둔 고고학적 성과이다.
하이마에는 풍수전설을 겸한 ‘학의마’ 전설도 있다. 초상을 당한 상주가 중을 대접하고 묘터를 잡았다. 중은 하관할 때 “한 자만 파고 묻어야 한다”고 했다. 광중을 파내려가니 한 자 깊이에 바위가 나오자 관을 그 위에 묻으려고 했다. 어른들이 나무라며 더 깊이 파라고 하여, 바위 한쪽을 곡괭이로 들어 올리니 학이 날아올랐다. 깜짝 놀라 바위를 덮고 묘를 썼으나 발복하지 못했다. 그 뒤로 ‘학의 마(을)’라고 하다가 ‘하이마’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중의 비범한 안목과 학을 품고 있는 땅의 경이로움이 얽혀 있는 명당전설이다. 비범한 능력과 초월적 경이가 사람들의 상식에 의해 부정되고 불행한 결말에 이르는 전설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임하’가 ‘하이마’로 일컬어지면서 ‘학의 마’ 명당전설이 덧붙여졌을 수 있다. 지명이 먼저 있고 그 지명에 맞추어 유래나 전설이 뒤에 지어지는 경우도 있다. 지명을 거꾸로 유추하여 지어낸 전설이라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 기능은 다르지 않다.
“성주의 본향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레라.” 성주풀이에서 성주신앙의 본향으로 노래되는 안동 ‘제비원’도 지명전설이 없으면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연비원(燕飛院)이라는 지명으로 제비와 관련된 역원(譯院)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제비원에는 20여 가지 관련 전설이 있는데다가 성주풀이까지 구전되고 있어서 제비원 관련 문화사 정보를 풍부하게 전해주는 미디어 구실을 한다.
제비원에 사는 연이(燕伊)라는 처녀와 이웃마을 김씨 총각의 사랑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형제 석수장이가 나라 최고의 조각가가 되기 위해 미륵을 조각했다는 전설, 목수가 제비원 미륵을 덮는 연자루(燕子樓)를 짓고 기와를 이은 뒤 지붕에서 뛰어내려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제비원에 비범한 소나무가 있었는데, 세종이 지나갈 때는 가지를 들어서 길을 터주고, 세조가 지나갈 때는 가지를 늘어뜨려 길을 막은 대부송 전설도 있다. 따라서 지명 유래와 전설을 조사하게 되면, 지역문화의 다양한 세계를 포착하는 것은 물론, 이곳이 성주신앙의 본향이라는 사실까지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므로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유일한 메카로 주목된다.
제비원 미륵불, 아미타여래상인데 주민들은 으레 미륵이라 일컫는다. 불상 위에 연자루라는 전각을 지어 불상이 비를 맞지 않게 하였다.
특정 공간을 일컫는 지명이 여럿인가 하면, 하나의 지명에 유래나 전설이 여럿이기도 하다. 지역의 여러 근거에 따라 지명과 지명풀이가 거듭 지어지는 까닭이다. 지명과 유래가 여럿일수록 지역사료는 더 풍부하게 된다. 선어대(仙魚臺)는 산기슭 아래 깊은 소(沼)에 인어가 깃들어 있다가 마씨 총각의 도움으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 따라 소는 선어대, 들은 마뜰, 마을은 용상(龍上)이라 일컫는다. 하나의 전설에 세 곳의 지명이 창출된 것이다.
성주신앙의 본향 안동 제비원 범바우 당산에서 하는 성주맞이 큰 굿
하임하를 하이마라 하는 것처럼, 선어대를 ‘서너대’라고도 한다. 서너대의 유래는 선어대의 벼랑을 따라 만들어진 오솔길의 모롱이가 헤아리는 데 따라서 셋이나 넷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 모롱이만 헤아리면 셋이고 작은 모롱이까지 헤아리면 넷이어서 서너대인 것이다.
안동시 선어대 원경: 벼랑 밑의 깊은 소에 용이 살아서 仙魚臺라고 하며, 골짜기 모롱이가 서넛이어서 ‘서너대’라고도 한다.
지명을 ‘선어대’로 표기하지만 사실 ‘서너대’라는 지명이 지형을 지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더 적절한 이름이다. 그러나 서너대는 맞고 선어대는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어대의 소는 인어나 용이 살 만큼 아주 깊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지역의 두 지명은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까닭에 모두 유용하며 둘 다 옳다고 봐야 한다. 같은 지명에 여러 유래가 전승되는 경우도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여러 유래가 다 옳은 것은 물론 오히려 유래가 여럿일수록 지역에 대한 더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동 마령리의 분통골 유래는 3가지이다. 하나는 여기서 분토(粉土)가 난다고 하여 분통골이고, 둘은 지형이 오목하여 분통처럼 생겼다고 분통골이며, 셋은 동네에 초상이 많이 나서 분통 터진다고 분통골이라 한다. 정확한 분통골 유래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고 여기고 다른 둘을 버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세 유래가 모두 분통골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첫째는 지역의 토질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분토가 많이 난다는 지질정보가 담겨 있다. 둘째는 마을이 생긴 형상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분지형으로 오목하게 분통처럼 생겼다는 지형정보이다. 셋째는 사람들의 심성과 감정을 나타낸 지명이다. 사람들이 잘 죽어서 울화가 치밀었다는 주민들의 집단정서를 나타낸 정보이다. 세 유래의 정보는 서로 상보적일 뿐 아니라, 분통골에 관한 마을 정보를 더 다각적으로 제공해 준다. 지명유래가 여럿일수록 더 흥미로울 뿐 아니라 지역문화를 이해하는 폭이 더 넓고 깊다.
지명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정보를 저장한 압축파일이라면 지명유래는 그것을 풀어주는 열쇠라고 했다. 지명은 물론 지명유래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거듭 조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명유래는 사라져버린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식을 간직한 무형의 박물관이자 책 없는 도서관이이다. 그러므로 지명유래 지식으로 지리정보와 지역사회의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포착하게 되면, 지역문화 연구와 발전에 긴요하게 활용할 수 있으며, 지역의 미래를 전망하는 창조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