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발전과 개발을 시대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그 결과,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역의 지역성을 빠르게 훼손하고 지역의 공간은 물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문화까지 획일화시키고 있다. 마을 기반의 마을 이야기, 공동의 기억을 기록 작업을 통해 발전의 속도에 따라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로 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 소중한 역사를 후손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100여 년의 짧은 시간 동안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발과 발전, 그리고 효율성 부분이 모든 것에 우선되었다. 우리는 앞만 보고 땀 흘리며 달려왔고 그 덕분에 많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당장의 발전에 불필요한 것들은 너무나 쉽게 버려졌다. 개발 지향적이고 근대적인 토건 프로그램은 이웃 간의 유대감, 상호호혜적인 관계, 돌봄의 문화 이런 것들은 다 깨져 나가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오랜 관습과 전통일지라도 효율과 일상의 편리함을 위해서는 빨리 버려져야만 했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의 욕망 실현을 위한 무한 경쟁이 대물림되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에서는 개발 중심의 사회가 획일적이고 단일한 문화를 양산하면서 오랫동안 지역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문화가 소멸되고, 더불어 그곳에 축적되었던 지식도 함께 파괴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물신을 좇느라 파괴된 공동체와 자신에게서조차 분리되어 버린 사람들. 산업화 도시화로 점점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변형되고 해체되고 결국은 소멸될 것이다. 이젠 바야흐로 물신의 시대이다.
마을기록 활동은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비공식화 된 지역역사, 문화에 관한 기억들의 흔적과 조각을 모아가는 과정이다. 마을기록은 지역의 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역사에서 빗겨나 있던 민중의 생활사를 기록한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몸으로 일하는 수많은 보통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성공한 사람들과 중앙의 역사만이 기록된다면 결국은 수많은 보통사람들은 기록에서 소외되면서 후세에 역사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왜곡된 역사가 반복된다. 이것이 성실하게 일하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중요한 이유이고 기록자들이 공동체를 기록하면서 지향하고 있는 목표이다.
이러한 가치부여는 민중들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갖게 하면서 우리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넓게는 한국의 문화다양성을 지켜 국가 전체의 튼튼한 문화구조를 갖게 하는 길이다. 공동체의 기록 속에 우리의 미래가 담겨있다고 믿고 있다.
세류동 어르신들 「골목잡지 사이다」 中
첫 번째는 공동체 자생의 아카이브 구축과 지향이다.
자신들의 기록이 없다는 현실 모순에 대한 내적 자각. 그리고 기록이 있더라도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들이 기록된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공동체가 주체가 되어 각 공동체의 개성, 개별성에 기반한 공동체 아카이브가 구축된다. 마을은 단순한 지리적 공동체가 아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사회적 작용에 의해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마을은 일상생활의 토대로서 생산과 소비, 일과 놀이, 삶의 희로애락이 있는 공간이다. 마을기록은 사람들의 관계와 지역적 특성을 담는다.
역사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날의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민중들에게 일상적 삶은 전쟁이나 혁명보다 중요하다. 공동체의 기록들은 개인적 의미를 넘어 개인들의 삶이 모여 시대의 역사가 기록된다는 측면이 있다. 그들의 일상의 기록을 통해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공임을 자각하게 하며, 지역사람들의 진솔하고 디테일한 이야기는 공감을 일으키고 이러한 마주침은 세대 간의 벽을 허물고 공동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수집 주체로서의 공동체이다.
주류 문화기관들이 공동체 아카이브를 수집할 때 타자의 시선에서 공동체를 하나의 수집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과 달리 이 기록에는 마을 공동체가 주체가 된다. 공동체의 어떤 기록이 중요한지 공동체를 대변하는 기록이 무엇인지 기관들은 잘 모른다고 생각된다. 공동체들이 어떻게 기록을 생산하고, 그 공동체에서 중요한 기록이 뭐며, 주로 그 기록이 어디에 모이며, 그래서 정말 보존해야 되는 기록을 어떻게 선별해야 되는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공동체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지역민들의 구술기록은 지역의 민중생활사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마을주민이 모여 기록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역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고 보여주는 전 과정을 진행한다. 마을주민 스스로 기록에 참여하는 행위는 지역성과 공동체성을 강화시키고, 주민들의 참여를 지속시키는 공동체아카이브의 가치를 갖는다. 주민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록화하고 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주체적’ 역할은 공동체아카이브 구축의 중요한 요소이다.
세 번째는 마을 아카이브의 구축은 컬렉션의 구축보다는 풀뿌리 운동의 과정이다.
마을기록이 풀뿌리 운동의 일환으로 본다면 마을 주민들 간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민들 간에 서로 소통을 통해 마을 아카이브에 대한 합의 체계와 마을공동체 내부에 지속가능한 내적 동력 확보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고, 그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소통, 그리고 다양한 공유 이런 것들이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지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민기록자의 양성이다. 지속적인 시민기록자의 참여는 지역을 기록화 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다. 시민기록자의 양성은 마을기록학교와 같은 형태의 교육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민간과 공공이 함께 협력하여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민기록자의 양성이다. 지속적인 시민기록자의 참여는 지역을 기록화 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다. 시민기록자의 양성은 마을기록학교와 같은 형태의 교육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민간과 공공이 함께 협력하여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을기록학교’는 마을기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기록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면서 보다 많은 주민들이 마을기록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기록학교이다. 지역 주민의 삶을 지속적이고 생동감 있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마을 단위의 기록 사업을 추진하고 시민기록자 커뮤니티를 운영하여 마을 아카이빙의 플랫폼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마을 담론을 형성하고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서 현장에 접목된 경험과 역량을 축적하여 시민이 주체가 되는 마을기록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
마을기록학교를 통해 첫 번째, 그동안 마을기록 작업에서 지역 주민이 대상화되는 한계를 벗어나 마을기록에 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록 과정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는 과거 전승문화를 기록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재 주민의 관점에서 마을이 가진 문화, 역사적 자원과 미래적 활용 방안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해야 한다. 세 번째는 마을 주민의 욕구를 파악하고 시민기록자, 마을 주민, 전문가가 충분한 인적 유대와 협력, 의견 수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진행구조로 과정 중심의 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마을기록학교를 통해 양성된 시민기록자를 중심으로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분들의 기억을 통해 지금은 사라진 마을의 흔적을 찾아내고, 지역의 수많은 문화 콘텐츠를 모아내는 기초자료로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구술채록 작업을 수행하여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구체적으로 구술기록, 사진기록, 공간기록과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까지도 기록하여야한다. 전승되어온 전통과 민속자료, 전쟁, 새마을운동 등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커다란 사건들을 구술을 통해 기록하고, 늘 우리 삶에 함께한 물건들을 통한 생활기록 작업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공간에 대한 기록과 시대마다의 마을 지도를 만드는 작업도 의미있는 기록물을 만들 수 있다.
수집대상은 마을의 성장과정, 커뮤니티 생성과 발전, 마을의 갈등과 해결, 마을기업의 활동, 마을행사, 마을사람들의 일상에 관한 기록들이다. 마을기록학교에서 함께 모여 시작된 이야기가 조금씩 ‘내 것’이 되고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기 시작하게 된다. 기억의 공유는 설명을 건너뛰게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함께 공유한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기억할 만한 것들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게 한다.
민기록자와 함께하는 ‘수여선 도보답사’
마을이란 함께한 기억을 공유하는 관계이며, 공유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기억들을 모아 기록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기억을 교류하고 공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억의 기록화는 마을에서 세대가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양성된 시민기록자들이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게 된다면 그 지속가능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많은 시민기록자들이 참여하고 커뮤니티 간의 연대가 활발할 때 우리의 기록 생태계는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수여선’ 아카이브 전시
동네에서 발행되는 ≪골목잡지 사이다≫는 수원 골목의 사람, 자연, 문화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원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여 이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를 조명하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기록되지 못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저장하는 일들을 해오고 있다.
≪골목잡지 사이다≫는 동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며 만들어내는 이웃의 일상과 마을에 뿌리내고 살아온 사람들의 내력을 기록하는 일, 지역의 문화 예술을 담아내는 일, 마을 사람들과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 미디어로서 민중의 생활사를 느리지만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잡지 속 활자 하나하나,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어간다.
≪골목잡지 사이다≫는 사회적기업 (주)더페이퍼가 회사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발행비를 마련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지역의 전문가들, 예술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들의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마을의 이야기와 일상의 삶을 직접 만들고 이용하고 있다. 잡지에 수록되는 모든 글과 사진, 그림은 무료로 싣고 있으며, 상업적 판매가 아닌 무가지로 발행되어 계절마다 5천부가 지역에 배포되고 있다.
그간 “사이다”는 경기도 지역 아카이빙 활동을 통해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폭 넓게 수집하면서 경기도와 지역문화원과 협력하고 그 결과물을 공공과 민간이 함께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2014년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와 2015년 ‘지금은 잊혀진 협궤열차 수여선’ 2017년 “동요 오빠생각” 등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그중 ‘지금은 잊혀진 협궤열차 수여선’ 아카이브 작업은 수원~여주간 운행되었던 협궤열차 이야기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 12월 여주 지역의 쌀 수탈을 목적으로 부설되고 해방 이후에는 여객용으로 운영되며 수원과 용인, 이천, 여주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다 1972년 폐선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춘 수여선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수여선이 운행되었던 수원, 용인, 이천, 여주 등을 찾아다니며, 남아있는 수여선의 기록자료, 사진자료, 사람들의 구술을 통한 기억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이 작업은 수원문화원, 용인문화원, 이천문화원, 여주문화원과 함께 아카이브 구축작업을 진행하였고 구술채록과 출판을 위한 원고작업, 다큐 작업 등 일반인이 공유할 수 있는 2차 저작활동이 포함되었다.
조사방법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구술인터뷰, 현장답사, 전문가 원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심층 조사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조사자의 참여 관찰·청취·인터뷰 등이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2개 노선의 협궤열차 중 수여선을 깊이 있게 집중 조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이 변하고 그에 따라 지역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도 답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특히 구술채록과 더불어 모아진 자료를 중심으로 결과를 기술·정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 아카이브 작업은 지역 문화의 보고인 지역문화원들과 예산집행자인 공공기관, 그리고 민간 출판사가 참여하여 지속가능한 지역아카이빙의 방법의 하나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문화원의 참여로 구술자의 선정과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관련 소중한 자료들이 문화원을 통해 지역의 소중한 아카이브로 구축될 수 있었고, 이 구축 작업에 소요되는 제작비는 ‘경기도메모리 사업’의 일환으로 경기도사이버도서관을 통해 조달하였으며, 완성된 인터뷰 내용과 사진, 구술영상은 경기도메모리 웹 사이트에서 제공되고 있다. 독자들에게는 도서를 통해 공유되었으며, 그 후 수원에서 여주까지 4개 도시를 순회하는 전시가 진행되었다. 그 후 수집된 자료는 참여한 각 문화원에 공유되었으며, 『사이다』 12호 (2015)에 게제 되었다.
‘수여선’ 관련 수집품
지역민들의 삶은 계속되고 수집해야할 대상들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따라서 지속성이 담보되는 아카이빙이야말로 살아있는 아카이빙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인 지역아카이빙을 위해서는 지역사회 안에서 다양한 공동체와 소통하고 협력하며, 마을과 사람을 연결하며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기록생태계 조성을 위한 자구적인 노력과 정책적 방향이 꼭 고려되어야 한다.
단기적 프로젝트로 박제되는 아카이브가 아닌 지역민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기록의 사회화를 통해 지역의 사람들과 마주치고 재생산되는 살아있는 아카이빙를 위해서는 기록생산자의 기록주권을 인정하고 협력을 통해,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기록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아카이브는 연대를 통해 더 큰 의미를 발휘할 수 있다. 민간과 공공의 함께 참여하는 거버넌스형 기록네트워크가 형성되어 논의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민간 매체를 통한 아카이빙은 다양한 시각으로 당대를 기록해서 담아놓고, 고여 있지 않고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록합니다. 공공에서 하는 것은 어떤 사업을 통해서 한 번에 끝내고 말지만, 민간에서 하는 것은 한번 간 곳을 다시 갈수도 있습니다. 박제화 된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계속 덧붙이고 업데이트 되는 아카이브입니다. 민간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아카이빙이 되도록 해주는 게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마을기록물이 수집, 보존, 활용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 교육적, 예산적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국가의 정책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