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했다.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세상을 구할 구세주가 거대도시 로마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시골 촌구석 베들레헴이라는 동네 출신이라는 것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서울 출신이 아니어도 그 삶이 의미 있고 위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표어는 낙후지역도 언젠가는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세상을 밝힐 구세주의 역할을 해온 것은 ‘지식’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독점적 기술인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그 불은 인간을 각성시켜서 인간을 더 이상 신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 불도 처음에는 소수의 권력층, 소수의 지식인만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그 불은 이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기예수의 탄생과 목자의 경배, 루벤스
지식인이란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학자, 교수, 전문가 등 가방끈이 긴 사람이다. 과거에 지식인은 시대의 양심,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은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이들의 전문지식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IN에 물어보면 뭐든지 대답해주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새로운 미디어와 플랫폼들은 과거 금단의 영역에 속했던 지식들을 단번에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린 아이들도 매일매일 유튜브를 통해 지식을 배우고 자신의 일상과 경험을 업로드하고 시청한다. 지식의 생산과 창조, 유통과 소비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비싼 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졌다. 대학 졸업장이나 박사학위가 이제는 그리 큰 장점이 되지 못한다. 학생들이 없어 대학은 폐교를 걱정하고 학생들은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들다. 네이버 지식IN보다 못한 시간강사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접속하는 순간 나의 모든 사적 정보들은 구글 같은 거대기업의 데이터 저장소에 흘러 들어간다. 인류의 온갖 지식과 개인의 생애경험까지도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의 원료 데이터가 되어버린다. 이제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터넷 검색능력과 미디어 해독능력일 뿐이다. 지식인은 더 이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만 지식을 검색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인류에게 과연 축복인가, 재앙인가?
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인공지능과 로봇,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그리고 생명공학 같은 기술의 혁신은 인간의 삶을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시대로 이끌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기계와 기계, 기술과 기술, 그리고 기계와 기술이 인간 없이 자율적으로 연결되는 기술사회의 출현이다. 하지만 기술사회는 인간에게 끔찍한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이 사람들을 실직의 위기로 내몰았을 때 영국에서는 기계파괴운동(Luddite Movement)이 일어났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된 컨베이어벨트 생산방식은 대량생산체제를 가능하게 하면서 수많은 도시노동자를 공장노동자로 변화시켰다. 20세기 후반 디지털 정보화에 의한 공장자동화는 공장노동자의 대량해고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21세기 기술사회에 들어선 우리의 운명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파괴운동
기술사회는 고용의 종말을 뜻한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간의 일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기존의 수많은 종류의 직업들은 소멸되고 새로운 직업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경기불황이 지속되면 우리 사회는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실직으로 내몰곤 한다. 고속도로 하이패스로 수납시스템이 자동화되면서 해고 위기에 몰린 요금수납원들이 톨게이트 구조물 위에 올라가 기습농성을 시작한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는 경비원 수를 줄이는 것으로 관리비를 절감하려고 한다. 대학에서도 학교 재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교내 청소부 아주머니들을 자르기 시작한다.
지자체나 기업들도 이윤이 줄어들거나 재정이 악화되면 제일 먼저 손을 대는 것이 임시직 근로자들을 해고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의 직업이 직접노동이거나 단순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의 노동을 별 볼일 없는 노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융합과 혁신을 통해 점점 인간이 필요 없는 사회를 구현해 나가고 있다. 무인경비시스템, 무인자판기, 무인식당, 무인은행, 무인요금정산기, 무인주유소, 무인택배…. 이렇게 사람이 필요 없는 무인사회가 되어버리면 그때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자동화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건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이나 아파트경비원 직종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지금 미국 여러 도시에서 시범운영하고 있는 아마존고(amazon go)를 보자. 아마존고는 물건을 그냥 집어들고 나오면 자동으로 계산이 되는 무인편의점이다. 더 이상 계산대 앞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계산원 일자리는 머지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계산원이 39만 명이나 있다.
요즘 주유소에는 반갑게 맞이하는 주유원을 보기 힘들다. 은행도 무인점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율주행택시를 보자. 부르면 자동으로 와서, 목적지까지 기사 없이 모셔다 드리는 이 택시는 이미 영국, 호주, 프랑스, 싱가포르 등지에서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가히 기술사회가 추구해온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7만 명의 택시기사, 30만 명의 셔틀버스 운전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들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느 시점부턴가 경제는 성장해도 고용은 늘어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그 원인으로 노동생산성 하락을 들었다. 그동안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은 기계화, 자동화 비율을 높여왔는데 어느 시점부턴가 자동화가 노동수요를 대체해버린 것이다. 인공지능과 무인자동화는 이제 더 이상 GDP에서 인간의 노동기여분을 키울 여지가 없으며 고용도 유지할 수 없는 사태를 가속화시켰다. 고전적 경제개념에서 생산은 반드시 고용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이제 첨단 기술사회에서는 인간의 고용 없이도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일자리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에 대한 고용주의 반응은 어떨까? 기계보다 비싸게 임금을 주어야 하는 인력은 당연히 해고하려 들 것이다. 무인경비시스템이 도입되면 경비원은 해고다. 자동화설비가 투입되면 공장라인 노동자는 해고다. 바코드시스템이 확대되면 단순계산원은 모두 해고다. 자율주행차가 들어오면 택시기사는 해고다. 버스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럼 누가 남게 되는가? 기계보다 더 싸게 일할 수 있는, 그리고 손쉽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나 외국인노동자들이다. 정규직은 기계와 로봇, 무인시스템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관리요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무인자동화시대에 인간의 노동력은 비효율적이고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의 지식은 한없이 왜소할 뿐이다. 인공지능이 지식인의 일을 대부분 대체하게 되면 이제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인공지능을 돕는 일을 하거나 인공지능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이 시대는 지식인을 위한 일자리를 더 이상 만들어주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지식의 개념, 고용의 개념을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기술사회는 인간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기업에 종속되어 노동력을 바치지 않아도 될 만큼 인간을 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여가와 휴식을 줄 것인가? 불행하게도 기술개발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동은 새로운 일자리 분야에 대한 재교육, 재취업에 성공한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비숙련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를 갈수록 떨어뜨리게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 사회의 어두운 전망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일까?
이제 생각을 바꿔보자. 그것도 우리가 기존에 가져왔던 일에 대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달리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더 좋은 기회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우리는 ‘일’ 하면 쉽게 고용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이 아니라 그저 자리일 뿐이다. 핵심은 일자리가 아니라 ‘일’이다. 일자리는 고용주, 정책입안자에게 달렸지만, 일은 창조적으로 지역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파트에 무인경비시스템이 도입된 후 경비원들은 새로운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동화로 없어진 업무 대신 방범안전관리, 택배관리, 분리수거와 주차관리에 이르기까지 창의적으로 주민들을 돕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자. 이들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동네도서관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또 전등을 교체해주거나 고장난 주방을 수리해주면 어떨까? 과거 이발소를 했다면 동네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면 어떨까? 아파트경비원이 아닌, 공동체 도우미의 탄생이다. 이게 해법이 아닐까?
고용노동은 한계가 있다.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노동으로는 자발성과, 창의성, 그리고 진심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러나 고용과는 관계 없는 새로운 노동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다. 일을 하는데 자리는 필요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자리가 먼저고 그 다음에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우리는 어디에 고용되어야, 또는 누군가를 고용해야 ‘일’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이런 기준에 따르면 엄마의 가사노동은 생산활동이 아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성직자는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기계나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기초로 한 노동이다. 그렇다. 고전경제학에서는 그동안 생산활동에 잡히지 않았던 돌봄노동이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 동네 등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돕는 일이다. 또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창작활동도 있다. 이런 일들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기술사회의 유토피아적 전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가 이루어진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첫째, 기업은 자동화를 통한 생산성의 증가와 그 이익을 노동자들에게 잘 분배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노동을 생존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도 예속적인 일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기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생산성 증대와 이윤추구를 위해 공장에 로봇을 들이고 자동화를 시도한 기업이 그 결실을 사회에 내놓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없을까?
버트런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글에서 사람들이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멋진 발상의 전환이다. 자동화로 인해 인간의 노동력이 덜 필요하게 되면 그만큼의 노동자를 해고하기보다는 필요노동력이 감소된 만큼 노동자 개개인의 노동시간을 줄이면 된다. 켈로그는 1935년에 이미 ‘3교대 8시간 대신 4교대 6시간으로 작업방식을 바꾸어 300명 이상의 일자리와 추가 샐러리를 지급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Bertrand-Russell (1872~1970)
둘째, 기업의 영리적 활동을 위한 고용노동 이외에 비영리부문의 활동에서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른바 제3섹터, 시민사회부문의 활동을 넓히는 것이다. 개개인의 고용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이제 사람들은 남은 시간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쓰고 싶어할 것이다. 비영리부문의 일들을 고용으로만 흡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 어떤 대안이 있는가? 주민의 비영리적 사회문화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식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고용노동에 대한 임금만으로는 생계비를 충당하기 힘들다. 이 부분을 기본소득이 채워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생계에 쫓기지 않고 그 사회의 공동체적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이에 기반해 자신의 가치와 전문성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이제는 고용주와 종속적인 고용계약을 맺지 않고도 자신의 지식이나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에게 직접 제공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일을 ‘독립노동’, 또는 ‘자유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자유노동의 가장 큰 한계인 소득불안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조건이 이루어진다면 기술사회는 인간이 힘겹고 종속적인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보다 인간미 넘치는 살만한 세상을 이루어 가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은 늘 노동시장과 노동조건의 유연성을 주장해왔다. 필요노동력이 줄어들 때 쉽게 해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으로 생계에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면 이제 칼자루는 기업이 아니라 사람이 쥐게 된다. 모든 생산은 수요가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요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서 창출된다. 그렇다면 역시 시작점은 지금 여기,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존재의 기반이 되는 현장, 바로 동네와 마을이다. 생존과 생계의 위기에 몰려 서로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War of all against all), 고립된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아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의 존재의 기반이 되는(Harmony of all with all),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자아로 서로 연결이 되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가까운 지인에게 물었다. “동네지식인이요? 동네에 사는 지식인 아닙니까? 우리 마을에 도시에서 은퇴하고 오신 분이 있는데 교수님이셨대요.”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엔 지식인이 넘쳐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아 헤매는 석·박사 출신의 시간강사, 해외유학파 지식인들로 넘친다. 수많은 지식연구자들이 배출되었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을 흡수할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공급과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제공하는 지식들을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동네지식인은 그저 동네에 있는 지식인이 아니다. 동네지식인은 동네에 살면서 동네를 배우고 동네생활 속에서 지식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동네를 성찰하는 사람인 것이다. 진정 지식인이고자 한다면 먼저 동네를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동네아낙들, 동네어르신이 체득하고 있는 동네에 관한 생활지식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며 가꿔온 일상적인 지식들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천문화원의 마을기록사업에 참여한 시민기록자들
동네에 자라고 있는 꽃들과 약초들의 쓰임새, 골목골목에 스며있는 마을의 역사, 24절기를 하루하루
이천문화원의 마을기록사업에 참여한 시민기록자들
몸으로 새기며 살아온 농군의 삶…. 주민들이 살아온 거대한 생애경험의 광산에서 어떤 광물을 발견하고 채굴할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세공해서 보석과 같은 지식으로 만들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 그런 지식인은 어디에 있는가? 동네를 유심히 살펴보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하거나 산책길에 피어 있는 엉겅퀴와 호박꽃, 종다리 소리에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동네산책자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다 보면 순간순간마다 걸음을 멈추게 하고 뭔가 뭉클한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면 당신은 동네지식인이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어설픈 시간강사가 일할 만한 자리는 지역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동네를 기웃거리는 얕은 지식인이라면 진짜 살아 있는 생애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동네지식인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아류만 만들어내는 껍데기 지식인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 충실한 알맹이 지식인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시간강사들이 동네지식인이 되면 좋겠다고. 지역에는 도서관과 카페, 책방, 문화센터와 아트홀, 미술관, 그리고 작은 문화공간들이 차고 넘친다. 그러니 이런 지역의 다양한 공간들을 지식연구학습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과연 그런가? 동네지식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대는 동네지식인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의 지식을 내려놓으라. 그 다음에 동네 사람들의 삶을 배우라. 그대의 지식으로 동네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먼저 그대의 생각을 바꾸라. 그대가 있을 자리를 찾기 전에 먼저 지역에서 해야 할 일을 찾으라.
베들레헴에 구주가 나셨는가? 나셨다. 하지만 전혀 다른 구주가 나셨다. 잠시 호적하러 온 것이 아니라, 혹은 해외원정출산처럼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베들레헴에서 평생을 살기 위해서, 촌구석 베들레헴을 정말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 주민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여관의 빈방을 내어드려야 할 것이다. 개천에 용이 나셨는가? 나셨다. 하지만 전혀 다른 용이 나셨다. 중앙에 등용되기만을 꿈꾸는 허황된 큰 용이 아니라,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이 동네를 바꾸어낼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한 시민이야말로 진정 지역이 필요로 하는 용이다. 그 용의 이름은 바로 ‘동네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