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식물』(마이클 폴란 저, 이경식 역, 황소자리, 2007)
『욕망하는 식물』이란 책은 사과, 튤립, 대마초,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이클 폴란이 쓴 진화식물학 논픽션으로 달콤함, 아름다움, 도취, 배부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냄으로써 인간과 식물이 서로 함께 ‘길들여온’ 공진화의 여정을 인간과 식물 양쪽의 시각으로 탐구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사과’는 그저 백설공주에 나오는 소재이거나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흔해빠진 과일이었다.
그나마 사과를 빼고 나면 튤립, 대마초, 감자는 내 일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식물일 뿐이다(개인적으로 감자를 안 좋아한다).
어느 날 누가 이 책을 읽어보라고 선물로 주었다. 표지의 타이포그래피가 강렬했고, 단아한 책 디자인이 맘에 들었다. 그 중에서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은 강렬했다. 책을 펼치자마자 「서장-인간 꿀벌」이란 목차가 보였고, 서장의 내용에 매료된 나는 한숨에 책을 읽어나갔다.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와 같은지, 혹은 일주일 전의 ‘나’와 같은지 생각해 보자. ‘나’란 변하지 않는 있는(being) 그대로의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변하며 되어가는(becoming) 존재인지. 지금의 나는 단연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욕망하는 식물』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내 스스로가 되어가는(becoming)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식물이 변해 왔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1백년 전의 사과, 1백년 전의 감자가 지금의 사과, 감자와 달랐다니. 끊임없이 변화(becoming)하며 인간에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욕망을 발산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꿀벌처럼 자신들을 보살피게 한다니. 어찌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이 책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식물이 인간을 길들여온 과정을 논리정연하게 전개해간다.
카자흐스탄의 야생 사과가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마침내 북아메리카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사과는 신맛에서 달콤한 맛으로 게다가 색깔까지 변화시키며 지구 절반의 땅에서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마초는 1980년대 대대적으로 벌어진 레이건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을 피해 암스테르담의 은밀한 실내정원 속에서 할로겐 전구빛으로 재배된 이후 자연 속에서 고작 2~3%였던 향정신성 물질 THC(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을 20% 이상 함유하며 변신에 성공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식물이 된 셈이다.
사과와 대마초처럼 혹은 튤립과 감자처럼『욕망하는 식물』은 단 한권의 책일 뿐이지만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이 책을 읽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나’로 변화한다. 첫째, 이전의 나는 세상을 딱딱한 콘크리트처럼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했고, 나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공격과 방어의 두 가지 태도로 세상을 대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거리에서 잡초를 보면 그 안의 욕망을 궁금해하고 잡초가 나를 어떻게 길들일지 상상하는 삶이 즐거운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변화한 후 나는 생각했다. 식물도 인간을 길들이고 변화해 가는데 사람과 사람은 어떻지?
그 뒤 현대물리학 강의를 들었다. 현대물리학에서 만난 세상은 존재(being)가 아닌 생성(becoming)의 세계를 밝히고 있었다. 베르그송과 랑시에르, 들뢰즈, 비트겐슈타인, 한나 아렌트, 비고츠키의 세계와 만났다. 단 한권의 책과 만난 후 나는 엄청난 속도로 변했다. 이 책뿐만 아니라 돌이켜보면 근원적으로 나를 변화시킨 두 분이 계셨고, 퍼포먼스 전시와 공연, 대화, 여행도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변화한 만큼 세상은 다르게 다가왔고, 다르게 읽혔고, 다르게 행동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 어떤 사건과 만난 후 삶 전체가 빠른 속도로 이전과 다르게 변한 경험을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비커밍’의 찰나다. 혹은 느린 속도라도 삶은 계속 비커밍의 상태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사용자경험(UX, user experience), 인문학(人文學), 문화기획, 통합예술교육 등 분야마다 다양한 말들이 사용되지만 ‘욕망하는 식물’의 전략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는 결국 다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를 변화시키는 전략이야말로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경험이 아닌 내 경험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인문(人文/人紋) 즉 사람에게 새겨진 삶의 무늬를 읽기 위해서는 오로지 내가 겪어서 새긴 무늬에 대해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문화기획도 그렇다. 내 안의 당사자로서 주체의 욕망 없이 타자를 위한 문화기획은 가능하지 않다. 통합예술교육은 단순히 연극 더하기 미술의 교육이 아닌 연극 안에서 미술성을 발견하거나 미술 안에서 연극의 성질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래야만 진정성 있게 타자와 조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문화기획은 ‘나’ 없는 ‘너’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2017년 제주문화기획학교에서 학교형(6개월 이상의 관계와 태도를 형성하는 과정중심적 시스템을 의미함, 실무와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코스[ㅇㅇ과정]형 양성 시스템과 대비되는 개념임) 양성 시스템을 설계하고 과정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이후 꾸준히 원주관찰사, 행화백년, 도봉비커밍 콜렉티브로 기획자 양성과 관련된 실험을 계속 해오고 있다.
문화기획자 양성 과정에서 사례연구, 기획서 쓰기, 예산 편성 같은 실무 위주의 내용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기법과 관련된 어떤 툴(tool)에 대한 것들인데, 예를 들면 영어, 엑셀, 파워포인트 같은 것이다. SWOT 분석, 액션 플랜, 디자인 씽킹 같은 것들도 기법처럼 다루어진다면 그것에도 반대한다. 그것들은 그저 단지 툴일 뿐이다. 툴은 망치나 칼, 자동차나 볼펜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쓰기 전에 먼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외로 자신의 욕망과 솔직하게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시간도 정성도 오래 들여야 한다.
그러고 나면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껍질과 세계를 깨고 나오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깨고 나올 때까지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톡톡 건드려주는 일이 기획자 양성과정의 본질이다. 미래 동료로서의 나는 스스로 깨고 나올 껍질을 따뜻하게 해줌으로써 내 온도와 껍질 안의 온도를 맞춰나가는(그것이 비커밍이다) 과정을 수행할 뿐이다.
수많은 기획서들이 문화예술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쓴다. 예술은 좋은 거고, 그래서 일단 한번 해보면 자존감도 높여주고, 커뮤니케이션도 잘 하게 하고, 사람들 간의 갈등도 해소한다고 한다. 거의 예술은 인성개조머신인 양 싶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예술가들은 삶의 부조리함을 논하고, 부적응 하며, 역사 속에서 쓸쓸히 죽어간 존재들이 그토록 많은 것인가. 뛰어난 예술가들은 왜 스스로의 예술이 그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빠진 기획, 나의 욕망이 보이지 않은 채 남을 위한다는 기획은 헛된 망상에 가까운 소리들만 늘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양성’될 리 없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자신의 변화, 타인의 변화, 그럼으로써 함께 변화되어 ‘되어가는’ 존재로서 만나는 그 일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욕망하는 식물』의 서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어느 날 정원에서 꽃에 물을 주다 고민했어….” 물을 주다 갑자기 생각하는 이런 ‘쓸모없는 질문’이야말로 기획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이 질문에는 기획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물을 주는 당사자로서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그 이야기는 아주 미세한 일상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런 질문은 한번도 던져진 적이 없는 아주 엉뚱한 질문이다. 이 부분은 연구로 치자면 연구의 필요성과 가설처럼 시작 지점 같은 것이고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일종의 리서치인데 단순한 아주 단순한 상상에서 질문을 던지고 가설을 설정하는 일종의 놀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획자 되어가기의 시스템은 이렇게 질문하는 ‘놀이법’을 즐기도록 도와주는 과정으로 설계된다. 그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는 여정은 현장 기반의 자료수집, 집요함과 성실함을 통해 성취된다.
랑시에르는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고 한다. 학습자가 스스로 배우는 과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 하는데, 개인을 지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바로 스스로 배움의 주체가 되는 ‘보편적 가르침’이다. 개인은 “자신이 받은 지적 해방의 혜택을 다른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남을 도울 수” 있다고 한다. 독자성을 늘 유지한 채 살아오고 있어 양성되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저 나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남을 돕고 있는 중이다. 랑시에르는 지식을 전달하지 않으며 보편적 가르침을 돕는 사람을 ‘무지한 스승’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까지 무지한 스승의 역할을 썩 잘해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치하한다. 무지한 스승은 모두가 비커밍될 수 있다는 것을 무한히 ‘신뢰’하는 스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무지한 스승도 기획자 되기 과정에 동참한 사람들도 모두 미생(未生)인 존재이다. 그저 좀 더 덜 미생인 상태로 우리는 함께 공진화한다.
참고로 ‘신뢰’와 ‘되어가는’ 기획자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신뢰’하는 ‘무지한 행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을 보는 기획의 시선을 만들어내는 무지한 행정과 무지한 스승이 많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